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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주 Feb 01. 2021

꿈은 '폭죽' 같은 거였다

영화 <소울>을 보고



그렇게 원했던 순간이었는데, 합격의 순간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메일로 통보가 왔던가,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조회를 해봤었던가.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PD시험은 5차까지 이르는 긴 전형 기간에다 경쟁률도 500대 1이 넘기에 언론 '고시'라고 불린다. 8월에 졸업하고 12월에 공채시험 합격 통보를 받았으니. PD 시험은 짧으면 1년, 길면 2~3년 준비하는 일이 예사였다. 시험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그 직업을 원했던 날들은 기나길었다. 중학교 방송반을 하게 되면서부터였으니 10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장래희망란에 꾸준히 'PD'라고 적어 넣었다. 그랬다. 나는 정말로 꿈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꿈은 폭죽 같은 거였다. 팡 하고 아름답게 터지지만 끝나고 나면 깜깜한 어둠이 이어진다. 꿈이 현실이 되자, 나의 매일매일은 갈 곳을 잃었다. 나는 더이상 무엇을 좇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목표를 이루는 데 매진했을 뿐, 막상 그 목표를 이루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20대의 나만 내가 아니라 30대, 40대의 나에게도 삶은 이어질 텐데 말이다. 






 <소울>의 조를 보며 내내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조는 고등학교 밴드부 지도 교사다. 계약직으로 일하던 조는 학교로부터 정규직 채용 제안을 받는다. 오랫동안 밴드 세션과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해오던 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제안이다. 그러나 조는 고민한다. 뮤지션의 정체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조에게 꿈에 그리던 도로시아 윌리엄스 밴드의 멤버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 신나게 집으로 향하던 조는 맨홀에 빠지게 되고, 어떤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픽사의 세계관은 역시나 놀랍다. 그걸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은 또한 얼마나 대단한가. 조와 다른 영혼들을 가이드해주는 제리라 불리는 존재의 모습을 보면 피카소의 입체주의나 몬드리안의 드로잉이 생각나기도 한다. 선 하나로 차안과 피안을 오가는 영화 속 세계를 생각하면 아마도 거기에서 착안된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넘어간 세계에서 조는 자신의 생애 주요한 순간을 모아둔 장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 인생은... 정말 무의미했구나. 거기에는 거절과 실패의 순간만 가득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실패한 뮤지션. 늘 꿈만 꾸었지 꿈의 어떤 순간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무의미한 인생. 


어떠한 사고로 조의 육체를 대신 차지하게 된 22는(캐릭터 이름이다, 순번명 정도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지독한 허무주의자다. 태어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탄생 자체를 거부해 300년 동안이나 탄생을 피해 다녔으니 알 만하다. 조는 마음이 급하다. 얼른 둘의 영혼을 다시 바꾸어서 저녁에 재즈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에. 


우여곡절 끝에 조의 영혼은 무사히 육체와 만난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인생 최고의 공연을 해낸다. 공연이 끝나고 나와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 도로시아에게 묻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뮤지션은 말한다. 공연을 해야지. 내일도, 모레도. 도로시아는 이야기해준다. 


아기 물고기가 나이든 물고기에게 물었어. "전 바다를 찾고 있어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지. "여기가 바다란다."
아기 물고기가 말했어. "하지만 여기는 물뿐인걸요."


꿈꾸던 최고의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조에게 남은 건 내일도 모레도 이어질 하루하루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서 성취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그 허무한 밤. 불꽃은 내가 이룬 성취의 찰나가 아니라 내가 행복감을 느낀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다는 걸, 그는 깨닫는다. 비로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 그건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행복의 순간들이었다. 


합격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도 기억나는 다른 순간들이 있다. 내내 시험 준비를 하던 중, 점심 먹고 햇볕이 좋길래 일부러 빙 둘러 열람실로 돌아오던 산책길. 면접이 끝나고 후련한 마음에 이런 날에는 맵고 달콤한 걸 먹어야 한다며 친구와 함께 먹던 떡볶이와 조각케이크. 입사하고 나서 받은 월급으로 엄마와 함께 갔던 부산 여행. 


꿈이 폭죽이라면 일상은 등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길을 잃었다는 막막함이 들 때면 그 길을 밝혀주는 작은 불빛 같은 것들이 있어 우리는 살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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