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를 보고
직업적 특성상, 언어에 민감한 편이다. 어떤 이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여긴다. 그건 내가 쓰는 언어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세계 혹은 세계관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영화 <컨택트>가 내게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건, 언어라는 소재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특성을 극대화해 보여줬다는 점 때문이다. 누가, '언어' 그 자체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언어에 대해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세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 원작자인 테드 창과 드니 빌뇌브 감독은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그 세계를 직조해냈다.
<컨택트>의 원제는 <Arrival>이다. <컨택트>와 <Arrival>의 간극이야말로 이 영화에 내재된 많은 것들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싶다. <컨택트>란 말 그대로 접촉이나 연결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지구에 미지의 비행물체 열두 개가 나타난다. 까맣고 단단한 타원형의 이 물체는 어떠한 화학성분, 자기장, 음향 등을 송신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공중에 떠 있다. 지구 곳곳에 출몰한 이 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최고의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애덤스 분)도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그는 '셸'이라고 부르는 이 비행물체에 직접 들어가 미지의 생명체와 접촉(contact)한다. 한국 개봉작의 제목인 이 <컨택트>는 철저히 '지구인'의 입장에서 미지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쓰인 것이다. 지구인의 입장에서 알아내야 할 것은 하나다.
'What is your purpose?' 그들은 왜 왔는가, 그들은 인류에게 해가 될 것인가 도움이 될 것인가?
언어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저 간단한 하나의 문장을 그들에게 묻기 위해서는 '퀘스천마크', 즉 '질문'이라는 개념을 알려줘야 한다. 'You'가 타자의 개념이라는 것을, '목적'이라는 것이 '오다'라는 행위에 선행된다는 걸 말해야 한다. 여기서 사피어 워프 가설이 잠깐 등장한다.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은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인 가설이다. 외계인에게 언어를 가르치던 루이스는 되레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와 시간이 뒤섞이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들의 언어는 비선형적(non-linear) 체계를 지닌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루이스의 딸은 그가 이곳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죽었다. 아니,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새로운 언어를 통해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며, 루이스는 자신에게 잠깐잠깐 떠오르는 환영들이 과거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곳 연구소에서 남편을 만나고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일찍 병들어 죽고, 외계인이 등장하고, 다시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딸이 죽은 다음에 시작하는 이야기라 여겼던 영화는 사실, 딸이 죽고 나서 그전까지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거였다. 이제야, 영화의 첫 시작 대목에서 루이스가 읊었던 내레이션이 이해가 간다.
처음과 끝은 더이상 내게는 무의미하지.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해.
그렇다면 이제 원제를 돌아볼 차례다. <Arrival>. 도착, 혹은 당도. 이건 인류의 관점이 아니다. 외계인의 관점, 타자의 관점이다. 그들은 '무기를 주러 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 무기란 바로 언어다. 비선형적 시간을 선사하는 그 언어. 현재와 과거, 미래를 전부 한눈에 보게 되는 언어. 그건 무시무시한 재앙인 동시에 엄청난 행운이다. 목숨을 잃을 것이 자명한 아픈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일이자, 언젠가 내 곁을 완전히 떠나버릴 남편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모든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행하기로 마음먹는 일. 루이스는 묻는다.
만약 삶 전체를,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택하겠어요?
헤어질 걸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기로 한다. 그와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눈다. 아이를 잃을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머리를 빗기고 함께 물놀이를 하고 숫자를 가르친다. 언어학이 자신에게 줄 재앙을 알면서도, 언어를 파고들고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묵묵히 기다린다. 그건 우리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하기보다, 그저 짧은 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왜 온 걸까? 결국 인류가 잊고 사는 걸 일깨워주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산다, 행한다, 그리고 계속 살아간다. 모든 걸 알아도, 혹은 모든 것을 모르더라도, 오늘의 사랑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