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교황>을 보고
가톨릭에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두 손을 모으고 “평화를 빕니다”라고 주변 사람과 맞절을 한다. 사제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 신자들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답한다. 성공도 성취도 돈도 명예도 아닌 ‘평화’를 바란다는 건 얼마나 소박하고도 어려운 일인지. 그건 종교의 본령과도 같은 일이다.
가톨릭에서 교황직은 사망을 해야 다음 이에게 승계된다. 4년 혹은 5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과 달리, 교황은 종신직으로 살아 있는 한 그 권한을 누리게 된다. 그 원칙이 깨진 적이 단 두 번 있다. 바로 1294년 첼레스티노 5세와, 무려 719년 뒤인 2013년의 베네딕토 16세다. <두 교황>은 가톨릭 역사상 충격적이었던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사임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추기경 사직의 의사를 전달하러 직접 바티칸으로 향하는 아르헨티나의 추기경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교황청의 여름별장에서 교황을 독대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별장의 정원에서 두 사람은 치열하게 논쟁한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종교의) 영업사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동떨어진 무언가인 것 같다며 말이다. 변화는 타협이라고 말하는 베네딕토 16세와, 삶은 변화한다고 말하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두 교황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베네딕토 16세는 원칙주의자다. 그는 2000년간 이어온 가톨릭의 전례와 중심축이 흔들리지 않게 지키려 노력한다. 반면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진보주의자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가톨릭의 오래되고 가장 엄밀한 관례를 깼으며(‘성체’는 예수의 몸을 뜻하는 동그란 모양의 빵이다. 가톨릭 미사 중 신자들은 사제가 나눠주는 이 빵을 먹는다), 동성애자를 포용하고 이혼하거나 피임하는 부부들도 가톨릭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통상의 가톨릭은 동성애, 이혼, 피임을 엄격히 반대한다).
둘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논쟁을 끝내게 되고,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여름 별장에서 하루 묵게 된다. 그 저녁, 베네딕토 16세는 누구에게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 신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함께 넘어온 로마에서, 더욱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교황이 되라고 말이다.
“우리는 신과 함께 존재하지만, 신은 아니오. 당신은 권력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다만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된다. 교황의 고해성사다. 묵음 처리된 화면 안에서, 교황은 가톨릭 사제의 성추행 스캔들과, 그를 묵인했다고 비판받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죄를 고해한다.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고개 숙인 교황의 머리에 성호를 그으며 말한다.
“기억하십시오. 진실은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진실은 견디지 못합니다.”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된다. 그러고 나서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카 퍼레이드를 멈춰 세우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듬는 사람, 교황청이 아닌 작은 여인숙에 머물며 경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이민자와 집시, 교도소 죄수들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는 사람. 사제는 신이 아니지만,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인간이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가치를 상기하는 존재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리고 평화 같은 것들.
평화란, 담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다. 담을 무너뜨리는 평화, 타협이 아닌 변화를 추구하는 평화,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포옹하는 평화, 싸움을 피하지 않고 기꺼의 논쟁의 복판으로 뛰어드는 평화, 그리하여 가장 높은 곳의 소리와 가장 낮은 곳의 소리가 고루 들리는 평화. <두 교황>의 마지막 장면은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결승전을 응원하는 두 교황의 모습으로 끝난다. 맥주를 손에 들고 출신 국가를 열렬히 응원하는 두 교황은 너무나 소탈하고 인간적이기에, 어쩌면 평화가 이처럼 시시콜콜한 인간사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너무나 다른 두 사제의 공존을 통해, 보는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는 영화, <두 교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