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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주 Apr 30. 2020

어딘가에 있겠지, 호모 딴짓엔스

소박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꿔나가는 사람들을 찾아서


2015년 3월에 셋이 모여 같은 해 9월에 창간호가 나왔다. 책을 낸다고 하면 인쇄와 제작 단계가 복잡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특이사항이 없다면 책이 인쇄되어 나오는 기간은 열흘을 채 넘지 않는다. 몇천 부를 찍더라도 말이다. 6개월 동안 우리가 제일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은 기획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


가장 처음 한 것은 국어사전에 ‘딴짓’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본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딴짓’을 이렇게 정의한다.


딴-짓

「명사」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에 그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함. 또는 그런 행동.

예) 다른 사람의 발표 중에 딴짓을 하거나 떠들어서는 안 된다.


딴짓의 용례는 대체로 ‘안 된다’ ‘하지 말라’는 부정어와 어울려 많이 쓰였다. 수업 시간에 딴짓하지 마, 업무 시간에 집중해야 하는데 딴짓하면 안 되지, 등등. 그런데 딴짓이라는 건 부정적인 행위만을 가리키는 걸까? 사람들은 딴짓을 할 때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어하지 않나? 그럼 사람들은 어떤 딴짓을 할 때 좋아하고 행복해할까? 그래서 우리 셋은, 주변 사람들에게 뭘 할 때 행복한지를 묻고 그걸 녹음하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맥주를 한잔 따라 벌컥벌컥 들이킬 때 제일 행복해. 

혼자만의 공간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누워 있을 때 행복해요. 

햇살 좋은 주말에 강아지와 공원을 산책할 때 너무 좋지.

친구들이랑 한강에서 피크닉을 하면서 놀 때 행복하더라고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별로 거창하지 않았다. 아주 소박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무언가에 몰입할 때, 누군가와 다정한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은 일이 아닌 오직 ‘딴짓’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그마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은 늘 ‘해야만 하는 일’이나 ‘할 일’에 밀려 뒷전이 되어버린다. 의무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딴짓은 어쩐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는 반대로, 너무 나이브하고 이상적인 태도처럼 느껴진다. 최소한의 사소한 행복은 너무나도 쉽게 침해당한다. 퇴근 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피아노를 배워서 뭘 할 거냐며, 차라리 그 시간에 주식 공부를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권하고, 러시아 키릴 문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제2외국어는 중국어라고 자신만의 기준을 들이대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재밌는 건 외국어에는 ‘딴짓’이라는 명사가 없었다는 거다. 인디펜던트 매거진을 만들게 됐다, 딴짓이라는 이름의 잡지다, 라고 외국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자 ‘딴짓’의 뜻이 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딴짓? 글쎄? 영어로는 ‘other thing’이었지만 딴짓의 숨은 의미를 포함하기엔 어려운 단어였다. 게으름을 뜻하는 ‘slack’과도 거리가 있었다. 어쩌면 외국은 딴짓이라는 보통명사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충분히 할 만한 여가 시간을 갖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재미있는 작당들을 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딴짓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좋아서 하는 일, 나 자신의 삶을 좀더 다채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굴하지 않고 계속 딴짓을 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가꿔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딴짓을 도모할 수 있는 재밌는 공간은 없는지… 그런 걸 우리가 만드는 잡지 『딴짓매거진』에 담고 싶었다. 우리는 딴짓을 하는 사람들을 ‘호모 딴짓엔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딴짓을 행하는 인류라는 뜻이었다. 밥벌이의 고단함에 굴복하지 않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이 잡지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아래와 같은 창간사를 썼다. 




<딴짓매거진> 창간호 표지


호모딴짓엔스(Homo-DdanZitens)[명사] 밥벌이와 연관이 없는 행동을 하는 인류를 뜻한다. 인간의 본질을 딴짓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인간관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소소하고 쓸데없는 이런저런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채우는 인간 집단을 포괄하고 있다.


『딴짓매거진』은 21세기 대한민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호모딴짓엔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잡지입니다. 호모딴짓엔스들은 일터에서는 보호색으로 스스로를 감추고 있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딴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공무원이었다가 밤에는 라틴댄서가 되기도 하고, 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창업을 꿈꾸며 요리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대기업에서 영혼을 팔아 모은 돈을 들고 순례길을 떠나고, 편의점에서 포스를 찍으며 소설을 씁니다. 또 누군가는 딴짓에 대한 이야기로 잡지를 만드는 별 쓸데없는 딴짓을 하기도 하고요.


이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밥벌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럼에도 스스로를 위한 의미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끊임없이 '딴짓'을 합니다.

2015년 3월. 호모딴짓엔스 중 세 명이 모여 딴짓에 대한 잡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러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딴짓’을 할까?

그들이 꿈꾸는 ‘딴짓’은 무엇일까?


하여 여기에, 우리가 만난 딴짓의 세계를 펼쳐놓으려 합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에 다양한 색을 입히려는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중에는 딴짓과 일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경우도, 아예 딴짓 쪽으로 인생의 방향키를 확 틀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딴짓이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전해져 ‘지속가능한 딴짓’이 이어질 때, 고단한 일상이 조금은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딴짓매거진』은 2015년 가을호로 시작하여 딴짓 시스터즈 세 명의 기력이 쇠하기 전까지 발간할 예정입니다. 모쪼록 당신에게도 ‘딴짓의 용기’가 강림하여, 이 다채로운 세계로 한 발짝 내딛기를 바랍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딴짓'의 세계에 들어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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