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을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앞 서 두 번도 겨울산행이었다. 겨울 산행을 하는 이유는 대개 눈꽃이나 상고대를 기대하고 산을 오른다. 꼭 눈꽃이나 상고대가 아니더라도 눈을 밟으며 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키며 머릿속을 비우는 겨울산행은 다른 계절의 산행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가 많아 겨울에도 더러 푸른빛을 볼 수 있지만 대체로 앙상한 가지들만 남은 겨울산은 계절에 관계없이 산행이 습관 된 사람들에게도 춥고 을씨년스럽다.
그런데도 나는 봄, 가을보다 겨울에 더 많이 산행을 한 것 같다. 특히 눈 소식이 있으면 산행의 욕구가 꿈틀거렸다. 산을 좋아하는 등산인들 상당수가 그러하다. 왜 겨울 산행을 좋아할까?
굳이 추운 겨울에 산을 오르는 이유는 산에서 진짜 겨울과 맞서며 추위에 웅크리고 지내는 자신의 온몸을 깨우는 것이 아닐까? 또한 눈 밟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각자 나름의 즐거움이나 느낌이 있겠지만.
이전 두 번의 무등산행은 특별히 눈과 관계없이 지인들과 약속된 겨울 산행이었다. 1000미터 가까운 산정상부에는 눈이 남아 있었고 맑은 하늘과 대비된 특이한 지리적 특성-주상절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번 산행은 달랐다. 며칠 전부터 강추위와 함께 눈 예보가 있었고 서쪽과 남쪽으로 어느 정도 눈이 내렸다. 이틀 소강상태 후 다시 추위와 눈 예보가 전해졌다. 폭설로 등산코스를 막지 않으면 겨울 눈꽃 산행의 기회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나서 차량운행을 포기하고 기차를 선택했다. 전라도 지역의 폭설은 예전에도 교통마비를 불러온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위험은 회피하는 게 상책이다. 예매를 위해 기차시간을 살폈으나 이른 아침 출발과 당일 복귀 가능한 기차시간은 없었다. 승용차로 가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눈예보를 확인한 이상 승용차는 포기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숙박을 결정하고 전날 오후 기차로 광주에 가서 자고 다음날 일찍 산에 오르기로 하고 기차표 예매를 했다. 숙소도 예매를 해두어야 맘이 편할 것 같아 비즈니스호텔에 조식포함으로 예약을 했다.
간만에 눈꽃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품고 짐을 꾸렸다. 가장 중요한 아이젠과 스틱. 그리고 방한과 방풍을 위한 외투, 모자, 장갑, 여분의 양말과 뜨거운 물을 가져갈 보온병과 일회용 커피 등을 익숙하게 챙겼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빼놓으면 안 된다. 눈이 쌓인 겨울산에 햇볕이 들면 강한 빛반사에 눈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오후 승용차를 몰고 논산역으로 가서 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 기차를 기다렸다. 날씨 때문인지 KTX기차가 무려 15분 연착한다는 안내문이 떴다. 커피 한잔해야 할 타임이었다.
기차는 15분 연착해서 해가지고 어둑한 시간에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의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비즈니스호텔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룸은 깔끔했고 단출했다. 짐을 내려놓고 바로 숙소 근처 식당을 찾았다. 떡갈비로 유명한 상가지역이어서 떡갈비 1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오래간만에 겨울 혼산에 혼자 숙박이니 술 한 잔 생각을 회피할 이유가 없었다. 식사와 함께 소주 2/3쯤을 비웠다.
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는 생수 4병이 있었다. 생수 2병을 배낭에 넣고 두병은 커피포트에 옆에 두고 아침에 뜨거운 물을 챙겨가기로 했다. 저녁시간을 위해 챙겨 온 책을 꺼냈다. ‘불편한 편의점 2’
아침 6시 30분에 스마트폰 알람을 맞추었으나 그전에 잠을 깼다. 6시 20분이었다. 알람을 해제하고 바깥을 보니 밤사이 눈이 조금 내린 듯했다. 아직 어두웠으나 날씨는 맑았다. 호텔 안에서 간단히 조식을 하고 가까이 있는 전철역에서 지하철로 ‘증심사입구역’까지 갔다. 다시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증심사입구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도로 위의 눈은 반쯤 치워져 있었고 질척거렸다. 버스 안에 승객은 달랑 둘 뿐이었다.
등산로 입구는 썰렁했다. 가게들의 문은 아직 닫혀있었고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와서 눈꽃 산행할 사람이 좀 있으리란 생각은 빗나갔다. 공기는 찼으나 날씨는 쾌청했고 바람도 없었다. 눈이 내리면 더 운치는 있겠지만 산행에는 불편하다. 눈 온 뒤 이런 맑은 날이 겨울산행에는 최적이다. 가자.
산행코스는 지난번 딸과 함께 갔던 길로 정했다. 혼자 산행할 때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로 가는 게 안전하다. 『증심사~중머리재~장불재~입석대~서석대(정상)~중봉~중머리재~증심사 』 왕복으로 족히 10 km가 넘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입구 상가 지역을 벗어나 몇 백 미터를 지나니 증심사가 나왔다. 굳이 절안을 구경할 필요를 못 느껴서 산 입구를 찾는 데 빨간색 점퍼의 한 덩치 하는 남자가 혼자 산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지? 그를 앞세우고 10미터쯤 뒤에서 그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오르막 몇 구배를 돌고 나니 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저만치 올라간 모양이다. 이젠 아이젠을 해야 했다.
서둘러 아이젠을 착용했다. 이 놈을 착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겨울 산행에서는 위험을 회피하는 필수 장비다. 오르막에서는 덜 하지만 내리막에서 아이젠 없이는 한 걸음 내딛기도 조심스럽고 위험하다. 자칫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으면 골절상이 올 수 도 있다. 겨울산에서 골절상은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부상이다. 부상자체보다도 이동이 어려워져 체온 저하가 생기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 겨울산행에 동행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걸음 한 걸음 20여분 지나니 당산나무 쉼터가 나온다. 중년의 남자 한 분이 쉬고 있었다. 나무의 수종 확인은 못했지만 거대한 몸집과 높이로 봐서 느티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잠깐 쉼을 고르고 바로 다시 출발했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산 높이가 1000미터가 넘는데 이런 낮은 경사가 계속되면 정상까지는 한없이 멀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르막이 달라질 것이 분명한 데 어느 기점부터인지 기억이 별로 없다. 많은 산행의 경험으로 대부분 산이 정상 가까이 다가가면 반드시 급경사 구간을 거쳐야 정상에 이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아직은 아니다. 두어 시간은 족히 올라가야 산다운 경사구간을 만날 것이다.
비교적 순조로운 코스를 천천히 계속 걸었다. 나뭇가지들이 나뭇잎 대신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눈꽃인가? 얼마만의 눈꽃 산행인가? 겨울마다 빼놓지 않고 산을 찾았다. 몇 해 전 서울이 영하 10도 아래까지 내려간 추운 날에 딸과 함께 대관령 ‘선자령’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전날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었다. 대관령마을 휴게소(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는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붐볐고 등산객들로 넘쳐났었다. 눈구경에는 대관령만 한 곳도 드물다. 대관령에서 선자령까지의 왕복 산행은 거리나 코스 난이도는 쉬운 편이나 바람과 추위와의 싸움이다. 바람이 심한 날은 정말 걷기도 불편할 정도로 바람도 강하고 그에 따라 춥기도 엄청 춥다. 복장이 부실하면 동상이나 저체온증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딸과 함께한 그날의 눈꽃 산행이 핸드폰 속에 멋진 그림으로 남아있다. 눈을 무겁게 이고 있는 큰 소나무 아래에서 딸과 함께 나눠 마신 따끈한 일회용 커피 한 잔은 그 어떤 커피보다도 따뜻하고 감미로웠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눈꽃을 보며 느긋하게 산을 오른다. 중간중간 눈 쌓인 숲과 먼 산 경치를 저장하며 당산나무에서 40여분을 지나 중머리재에 도착했다. 부지런한 등산객 서 넛이 도착해 쉬고 있었고 다시 출발해서 올라가는 사람도 보였다. 등산 안내판을 보니 1/3쯤 온 것 같다. 다음 목표는 장불재.
잠깐 숨만 고르고 바로 출발했다. 장불재까지는 1.6Km. 길은 이전보다 조금 더 경사구간이 있었지만 아직은 험하다고 할 만한 길이 아니었다. 좌우로 위험한 곳은 전혀 없었고 돌계단과 가끔씩 데크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산길은 치악산이 절정이다. 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한 곳도 쉴 틈이 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산악 마라톤 훈련을 하는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계단이 많다. 거기에 비하면 이런 길은 쉬엄쉬엄 가는 산 둘레길이다. 아직은 그렇다.
스마트폰에 풍경을 담느라 조금 지체했다. 산길에서 무언가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둘러봤지만 사람은 없었다. 나무 부러지는 소리는 아닌데 또다시 탁탁 탁탁. 순간 약간 긴장이 되어 혹시 산짐승인가 싶어 이번엔 주의 깊게 숲을 살폈다. 탁탁 탁탁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뭇가지를 쪼아대고 있었다. 얼른 폰카메라를 켜서 피사체를 잡았지만 너무 멀어서 딱따구리를 구분해내기 어려웠다. 3배 줌, 다시 10배 줌으로 당겨보았다. 화면 안에 딱따구리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40초짜리 딱따구리의 작업 동영상을 획득하고 나서 발길을 잡아갔다. 큰 행운을 얻은 기분이었다.
딱따구리의 집짓기
중머리재에서 한 시간쯤 걸려 장불재에 도착했다. 높이가 800미터에 이르니 바람 없이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도 아래보다는 추웠다. 안에서는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했고 몸 밖에는 추위가 에워싸고 있었다. 이게 겨울 산행이다. 오래 쉬면 추위가 몸 안으로 엄습한다. 지도를 보니 정상까지 남은 코스는 1km가 안된다. 그런데 안내판의 코스 색깔이 검붉은 색이다. 코스가 더 험하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산에서 마주하는 마지막 경사구간이다. 살면서 무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좀 더 험한 고비를 넘어야 제대로 된 성취를 맛보게 되는 것을 매번 산행에서 되풀이하는 것 같다.
원래 무등산 정상은 천황봉(1187m)이지만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정상을 밟을 수가 없다. 지자체가 곧 군부대를 옮기고 정상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했지만 아직은 실현이 안된 상태다. 오랫동안 무등산은 서석대(1100m)가 실질적인 정상 역할을 해왔다. 서석대, 그 아래 입석대 등 무등산은 지질학적으로 바닷가 지형이 화산활동과 융기를 통해 ‘주상절리’가 산 정상부에 위치하게 된 특이한 경우다. 제주도 해안가나 철원 한탄강에서 볼 수 있는 주상절리가 1100m의 산꼭대기에 있다는 것이 인간의 상상으로는 1억 5000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가늠해 볼 수가 없다. 그런 지질학적 특이성 때문에 ‘국가지질공원’과 유네스코의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장불재에서 입석대까지는 꽤 경사가 있는 험한(위험 x) 오르막 코스다. 중간쯤인 입석대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쉬고 있는데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제법 씩씩하게 올라오다가 한 마디 내뱉었다. “에이씨, XX 힘드네.” 아마도 10m쯤 위에서 쉬고 있는 나를 못 보고 힘든 오르막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혼자 욕이었다. 그럴 만했다. 두 시간 정도 계속 걸어 올라왔는 데 마지막은 앞서 지나온 길보다 훨씬 힘든 오르막의 연속이니 속으로 욕이 나올 만하다. 혼자 한 걸 들은 게 잘못이다. 나는 모른 체하고 ‘수고하세요’하고 한마디 던지고 길을 내주었다. 사내는 멋쩍은 듯 힘들게 계속 올라갔다.
무등산 ‘서석대’라고 쓰인 정상석에 먼저 도착한 또 다른 젊은 남자가 눈을 집어 음각으로 새긴 검은 글씨를 흰 눈으로 메우고 있었다. 검은색 서석대는 새하얀 서석대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글씨를 모두 하얗게 메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미있네요’ ‘사진 한 장 부탁할까요?”라고 건넸다. 남자는 내 스마트폰으로 연거푸 네 장을 찍어줬다. 나도 혼자 온 그 젊은 남자의 정상 등극을 사진으로 남겨줬다.
무등산 정상(서석대)
하늘은 맑고 바람도 별로 없었다. 정상에서 사진 찍고 주변 둘러보고 심호흡하고 나면 더 이상 정상에서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대개 산정상은 바람이 많이 불어 그곳에서 쉬기는 불편하다. 정상 아래에 비교적 아늑한 곳에서 쉬기 마련이다. 서석대에서 중머리재 쉼터까지는 중간에 ‘중봉’을 거쳐 약 2km. 장불재로 되돌아가지 않고 하산할 수 있는 최적코스다. 중머리재로 향했다. 내리막 길이니 한 시간이면 될 것이고 거기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산하기로 했다. 중봉으로 가는 길에서 계속 사람들과 마주했다. 나는 아침 8시 반쯤 출발해서 이제 하산하고 있는 데 아침에 집에서 출발한 등산객이면 지금쯤 산 중턱에 와 있는 게 정상적이다. 출발할 때는 거의 사람을 못 봤는데 올라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년 이상이 대부분이었던 이전과 달리 젊은 등산객들이 많이 보였다. 대학생이거나 직장초년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들도 있었고 중년으로 보기엔 젊은 커플도 있었다. 얼마 전 후배가 산에 갔다가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아서 자신도 놀랐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취미도 유행이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빠른 걸음으로 중머리재까지 쉬지 않고 내려왔다. 중머리재 쉼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빈자리에 앉아서 컵라면을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데워서 먹었다. 주변의 다른 등산객도 대부분 컵라면을 준비하거나 먹고 있었다. 추운 겨울 산행에서는 컵라면만 한 게 없다. 김밥이나 초코바 등은 겨울에는 적합하지 않다. 뜨끈하지는 않아도 따뜻한 국물이 있는 컵라면이 제격일 듯싶다. 일회용 커피도 한 잔, 그리고 곶감 두 개를 먹고 나니 허기가 채워졌다. 겉옷을 가볍게 바꿔 입고 다시 출발. 올라오면서 경치에 취해 사진 찍고 딱따구리에게 뺏긴 시간 때문에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산입구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내리막길은 편안했지만 오랜만에 찾은 겨울 산행은 다리에 미세하게 경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느리지는 않게 꾸준히 걸었다. 경련은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하산을 마쳤다. 집에 안전하산을 알리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증심사 근처 산입구의 계곡
겨울 산행의 묘미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내적 열기와 외적 한기의 순환으로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할까? 바깥 찬바람을 맞으며 자연 속에 몇 시간을 보내고 멋진 겨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스스로 찾아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이며 자연과의 교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절은 겨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