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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Jun 19. 2024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단평.

'국민적' 인기의 만화를 폭발적으로, 역사를 지긋이 응시하면서 재해석한다

한국에는 여전히 인지도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근래 들어서는 원작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며 조금은 알려졌을 작품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아직 대본소가 만화 유통의 중심을 이루던 1960년에 처음 출간되어 60년 넘도록 꾸준히 일본에서 사랑받고 있는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 만화 <게게게의 키타로>입니다. 데즈카 오사무와 더불어 일본 대중문화의 한 원형을 이루는 한편, 요괴를 소재로 한 현대 일본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하죠.


긴 시간 동안 생명력을 이어온 작품인 만큼, 영상화도 몇 차례나 되었습니다. 1968년 처음 TV 애니메이션이 제작된 이래, 2020년에 이르기까지 총 7차례나 TV 애니메이션, 극장용 애니메이션 총 10편이 제작되었습니다. 이외에도 TV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비디오용 실사 영화, 소설, 연극, 뮤지컬, 게임 등등 계속 변용되었죠. 이렇게 작품이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인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대중적으로 친숙하도록 플롯이 짜여진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착한 요괴’인 키타로가 동료들과 함께 ‘나쁜 요괴’들을 물리친다는 간명한 플롯은 ‘요괴’라는 기괴함이라는 장벽이 담긴 요소를 친숙한 ‘일본 전통 문화’로서 여기게 만들었고, 요괴들 사이에서 맞서 싸우는 과정왜 자연스럽게 액션과 카타르시스를 담기에도 용이했습니다.


하지만 <게게게의 키타로>가 이렇게 처음부터 대중에게 친숙한 구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게게게의 키타로>가 맨 처음 대본소 유통용인 <묘지의 키타로>으로 처음 유통될 때는 좀 더 어두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키타로는 단순히 ‘인간의 편인 요괴’라기 보다는, 인간이 거주하는 마을 근방 묘지에 살면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때로는 인간을 돕기도 해도 다시 때로는 인간에게 보복을 하기도 하는 거친 ‘아웃사이더’의 존재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점차 작품이 ‘국민적 수준’으로 인기가 상승하며 이러한 면은 점점 탈색되었지만, 여전히 키타로가 인간과 가까워도 결코 인간과 같은 존재는 아니며, 같이 사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60년이 흘러도 키타로의 아웃사이더적인 면모는 바뀌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즈키 시게루라는 작가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를 발매하며 처음으로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을 한국에 정식으로 발매했던 AK커뮤니케이션즈가 최근 발간한 <전원 옥쇄하라!>나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 제국시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정면으로 관통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징용된 뒤 파푸아뉴기니에 파병되다 미군의 공습을 받아 평생 왼팔이 없이 살아야 하기도 했죠. 이후로도 패전 이후의 혼란상과 급격한 경제 성장을 직접 지켜보았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한 만큼 미즈키 시게루는 매우 분명하게 전쟁이 가져오는 폭력에 반대하고, 다시 이 전쟁을 낳는 일본 제국의 구조를 고찰하며, 패전 이후 빠른 경제 발전 속에서 전쟁을 잊는 일본의 상황을 경계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게게게의 키타로>의 초창기 모습은 미즈키 시게루와 관찰한 일본의 당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대중적인 어필을 위한 변용 작업을 거쳤고, 이후 제작되는 작품들 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2008년에 <묘지의 키타로>를 바탕으로 다시 초창기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를 살려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주목은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신작 애니메이션은 이전까지 제작되었던 애니메이션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작품의 맨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장면처럼 타임라인 상으로는 TV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에 속해 있기야 하지만, 작품은 이전 TV 애니메이션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던 초반부의 어두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동시에, 원작으로 취하는 요소 또한 <게게게의 키타로>를 넘어 <전원 옥쇄하라!> 같은 미즈키 시게루가 분명하게 역사와 사회문화적으로 메시지를 내는 작품을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작품의 부제기도 한 ‘키타로의 탄생’은 원작에서는 그렇게 길게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작가의 이름에서 따왔을, 그러면서 마치 <아르센 뤼팽> 시리즈처럼 ‘작가가 실제로 체험하며 기록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작가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을 ‘미즈키’라는 한 남자가 우연한 계기로 죽어가고 있는 요괴 부부를 알게 되고 부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낳은 어린 요괴 ‘키타로’를 대신 기르게 되었다는 내용이죠. 영화의 제작진들은 여기서 미즈키가 혈액은행에서 일하는 설정이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미즈키와 요괴 부부의 전일담을 창작하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만든 이야기의 구조는 마치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처럼 전통적인 일본의 사회문화가 유지되는 폐쇄적인 공동체를 연상하도록 만듭니다. 작중의 미즈키는 물론, 관객들이 보기에도 작품에 등장하는 이 마을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한 눈에 봐도 무수한 비밀들이 잠자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실제 미즈키 시게루가 겪었던 일처럼, 2차 세계대전에 해외로 파병되며 끔찍한 일들을 겪은 작중의 미즈키에게는 더욱 마음의 부담이 쌓일 수 밖에는 없어요. 그런 미즈키 앞에 더욱 정체를 알 수 없는 백발의 남자 게게로가 등장하고, 이와 함께 마을을 지배하는 일족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작품의 장르가 만약 ‘미스터리’였다면 미스터리를 해결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과 일족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를 통해 일본 사회의 해묵은 문제를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장르는 미스터리적인 면모가 있긴 해도, 요괴를 소재로 한 ‘오컬트’에 가깝죠. 문제의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도, 결국 이를 풀어헤치는 국면도 모두 ‘오컬트’적인 면모를 강하게 폭발시키면서 전진합니다.


하지만 미즈키 시게루의 원작 만화가 오컬트적인 면모를 사용하면서 일본 사회의 폐부를 찔렀던 것처럼 이번 애니메이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수한 요괴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은 만든 건 요괴가 아니라 엄연히 탐욕스러운 인간입니다. 마치 ‘요괴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는 말을 실제로 구현하듯이, 작중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다른 인간들은 물론 요괴조차도 스스럼 없이 착취합니다. 그 착취는 그저 물질적인 착취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영혼’마저도 착취하는 매우 잔인한 모습입니다.


<게게게의 키타로>에서 요괴가 아무리 인간과 친해도 인간이 될 수 없는 변방의 존재인 것을 생각하면, 이번 작품에서 요괴도 처참한 착취를 당하는 모습은 매우 직접적인 비유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미즈키와 게게로는 물론 마을과 일족 전체를 계속 숨막힐 정도로 에워싸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클라이맥스에서 기어코 폭발하게 되는 정념과 선혈은 극의 차원에서도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은 물론, 중에서 묘사된 일본의 상황을 문제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는 원작자 미즈키 시게루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쉽게 제작되기 어려웠을 작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느 하나도 빙빙 돌리지 않고 비유의 대상은 매우 분명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구조가 여전히 계속 남아있는 1945년 이후의 일본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오컬트 호러의 장르적인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이 구조에 맞서는 방법으로 ‘폭력에는 폭력’과도 같은 ‘안티파’(antifa)를 연상케 하는 (또는, 일본의 역사를 생각하면 ‘적군파’ 등처럼) 선혈의 복수를 감행하는 모습은 일본 사회의 온갖 터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작품이 도에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일본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제작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일본 대중문화의 큰 상징으로 남아있는 미즈키 시게루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새로우면서도 원작자의 행보를 충분하게 반영한 해석에서 흥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서히 관객을 조여드는 감각에 몸과 마음을 조응하면서 몰입하며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메시지를 요괴물이나 오컬트 미스터리적인 장르하고도 충분히 잘 결합시켜낸 작품의 면모는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일본에 비해서 많이 등장하는 한국에서도 충분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역사와 구조의 문제에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해낼 수 있는 연출적인 면모도 평범히 놓아두지 않고 있으니까요. 특히 클라이맥스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폭발적인 액션 연출은 작중 내내 지속적으로 쌓아놓은 서사의 빌드업과 합치하면서 더욱 강렬하게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그렇게 <키타로 탄생 : 게게게의 수수께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2020년대 들어 새롭게 이뤄낸 경지이자, 일본 밖에서도 영화에서 역사와 구조를 독해하는 방법을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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