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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달 Sep 08. 2016

모처럼 비가 온다

기억 속 나의 모습

비가 그치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금세 추워지겠지. 낙엽이 뒹구는 모습만 봐도 정말 웃겼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책에 흔히 있었던 말처럼. 창밖으로 느껴지는 풍경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낙엽이 정말 뒹구네?"

나는 우습기는커녕 괜히 우울해지고 외로워졌다. 밤새 잠을 설쳤다. 가을비가 아니라 장마처럼 한동안 쏟아부었다. 뒤척이는 밤에...


모든 일어나는 상황들마다 삶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조금 아쉽기도 하고 속상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예전에 비해 마음을 놓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조목조목 생각해 보면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깨알같이 작은... 하지만 이 정도면 항상 감사하며 살아도 된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저편 한쪽 귀퉁이에 잠시 접어둔 고민조차도 명쾌한 답을 얻었지 않는가.




내 어릴 적 모습은 약간 마른 듯 한 체형에 키가 머쓱하게 크고 커트머리를 한 아이로 기억한다. 약간은 내성적이며  자존심 강한 느낌을 풍기는 인상이랄까. 아직은 특별한 뭔가 될 생각을 못하는 그런 나이. 남들한테 나서면 괜스레 눈물부터 쏟는 나는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밤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게 되었고, 도착한 곳이  아버지의 고향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집안에 있던 (참 좋았던) 거울 달린 장롱이 생각난다. 집안 가구도 챙길 여력이 없으셨는지 옷 몇 가지와  작은 보따리인지  가방인지가 있었던 것 같고. 논과 밭으로  이뤄진 들 한북판쯤에  윗집, 아랫집 딱 두채만 있던  아랫집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 집안 제사를 (시제) 지낸다는 조건으로 살았던 것을 보면 최씨 문중에 집이었나 보다.


울퉁불퉁한 바닥의 부엌은 얼마나 쓸었는지 흙이 맨질맨질했다. 엄마의 코트와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던 어느 날부터인지 엄마는 남의 집 모내기도 하러 다니셨고 과수원 사과 따는 일도 다니셨다.  겨울이면  뜨개질을 해서  우리들 옷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 당시 이름도 모양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망토(사각으로 손뜨개해서 마름모꼴 위에 목을 내밀어 입는 옷)는  시골에선 혁신이었고  우리 딸 셋은  그걸 입고 나가라는 엄마의 강압 아닌 강압을 견디며  할 수 없이 입고 다닌 기억이 난다.


너무 가난해서 튀고  너무 특이한 옷들 때문에 튀고  인천에서 표준어를 쓰던 나는 출석을 부를 때마다 "녜"라는 소리에 말거리였다. 시골엔 사투리가 심해서 내가 말하는 대부분의  서울 말씨는 질투반, 말거리 반, 해서 항상 이슈였다. 왜들 그렇게 나를 미워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등교시간이 되면 셋을 앉혀놓고 긴 머리들을 갖은 모양과 핀으로 장식을 해주신 기억이 난다. 시골생활이 길어질수록  빈곤과 머릿니는  늘어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 점점 자신감을 지키는데 포기가 되었다. 하나씩.. 하나씩..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말라비틀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 인천에서 선박회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부도와 함께 무책임하고 가족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사람으로 변해가셨다. 어쩌다 친척집 부탁으로 일을 나가시면 늘 술에 취해 엄마와 싸우셨다. 동네를 나가면 아버지께 "도련님, 도련님"하며 살던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껴가시는지 늘 괴로워하시는 게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술을 자주 드시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친척집에 가서 행패도 부려 동네 사람들쑤근덕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면  눈물이 나왔다.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고통스럽고 뭔가가 속에서 울컥거림은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차라리 내가 뻔뻔해지기라도 해야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절실히... 그런 생각들이 다져지며 나는 좀 더 냉정해졌고 간 큰애로 변해갔다. 우리 독수리 5형제는 특별한 형제애가 형성된 어렸을 적 추억은 허구한 날 꺼지는 구들장과 함께 똘똘 뭉쳐졌다.


제일 막내는 우리 딸 셋이 번갈아 가며 결석을 해대며 돌봐줘야 할  고민거리였고 3일에 한 번꼴로 행사 아닌 행사가 생겨야 하는 와중에도 나는 공부를 꽤 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1등 하고 아주 근소한 차이로 2등을 한 성적표를 들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성적이 잘나 온 걸 아시면 다소나마 위로가 되시겠지"하는 기쁜 맘으로. 엄마,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 난 큰소리로 "나 2등 했어 엄마!!!" 성적표를 보시곤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기대와는 달리 핀잔을 주셨다. 그 잘난 성적표를 움켜잡고 여기까지 뛰어온 게 허탈했다. 그래도 동네에 소문은 파다하게 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를 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우리 형제들은 항상 상위권을 휩쓸었고 둘째는 서예로 특기를 보였고 셋째는 무용에 두각을 나타냈다. 난 노래와 아이들을 휘어잡는 왈가닥으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인근 교회를 다니던 우리는 어머니 합창단에서 활약하는 엄마 덕분에 크리스마스에 무대에까지 올랐다. 난 "노엘"이라는 곡에 솔로로 춤을 췄다. 하얀 천사 같은 옷을 입고  손가락엔 옷 끝자락을 끼워 날개처럼 만든 의상인데 엄마 한복을 개량해서 직접 만드셨다. 참 극성 이셨던 우리 엄마... 직접 안무에 의상까지 혼자서 척척 만들어내는 엄마의 성화에 부끄러움에 울면서 율동을 하던 셋째 얼굴은 지금도 내 입가에 미소롤 머금게 한다.




작년 크리스마스가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1년이 다 돼가는 크리스마스가 또 오는 중이다.


올 한 해는 정말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말 그대로 그런 한 해였다. 어떻게 내 미래가 펼쳐질지 몰라도 대강은 그려진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이유로 허전하고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 암튼 열심히 현실에 대응하며 희망과 꿈을 항상 기억하며 내 인생을 꾸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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