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1.
한때 콩나물처럼 생겼다고 놀림당하던 에어팟이 너도나도 갖고 싶어 하는 인싸템이 된 것을 보면서, 그것이 에어팟의 내재적 요소 덕분인지 외재적 요소 덕분인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에어팟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외관상의 미적 요소나 사용자 편의성이나 성능 같은 에어팟만의 특징이 그것을 성공으로 이끈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나 인식의 변화가 그것을 성공으로 이끈 것인지 말이다.
나는 외재적 요소가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이상하게 생겨서 끼고 다니면 쪽팔릴 것 같다고 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세련되었다고 느끼고 갖고 싶어 하게 된 것을 보면, 에어팟의 내재적 요소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외재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떤 외재적 요소에 의해 에어팟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했고 그것이 디자인에 대한 평가까지 바꾸어놓은 것이다.
2.
그렇게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킨 외재적 요소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에어팟의 초기 사용자층이 지닌 특징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면 이 특징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데, 에어팟의 얼리어답터들은 타 브랜드의 얼리어답터들에 비해 젊고, 트렌드에 신경 쓰는 경향이 나타난다. 삼성에서 신제품이 나왔다고 누구보다 먼저 사서 갖고 다니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데모그래픽이 다르다. (그냥 전체적인 경향성일 뿐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그럼 결국 도시에 생활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인식이 형성된다. 에어팟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좀 트렌디한 것 같다는. 그리고 그런 인식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면 기존의 에어팟에 대한 인식을 헤집어놓고 어느 순간부터는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에어팟을 예쁘다고 느끼기도 한다. 나도 이걸 끼고 다니면 트렌디해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젊고, 트렌드에 신경 쓰는 사람들을 브랜드의 팬층으로 둔 것은 따로 돈을 들이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큰 자산인 듯싶다.
3.
그럼 내재적 요소는 중요하지 않을까 하면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애플이 정말 아무렇게나 만든 제품을 내더라도 성공하는 건 아닐 테니까.
처음엔 이상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세련돼 보이는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상해 보이는 디자인도 있다. 보통 어떤 디자인이 진부해 보이거나, 촌스러워 보이거나, 어떤 뚜렷한 부정적인 느낌이 느껴질 때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예뻐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의 이상한 느낌이 어색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인식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에어팟을 처음 봤을 때도 비슷했다. 그것이 진부해 보이거나, 어떤 뚜렷한 부정적인 무언가가 연상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단지 어색함에 가까웠다. 어색함의 감정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청기를 연상시키는 기존의 블루투스 이어폰들의 디자인보다는 아예 긴 막대 부분을 파격적으로 돌출시킨 것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보청기가 연상되는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어색함이 느껴지는 인식을 변화시키는 쪽이 훨씬 쉬울 것 같으니. 오히려 멀리서 봐도 튀는 외관이 그것을 액세서리처럼 인식되게 만드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4.
대부분 사람들이 에어팟이 성공한 원인을 말할 때 사용자 편의성과 성능을 얘기한다. 성능은 이어폰 알못이라 모르겠지만, 사용자 편의성은 정말 좋기는 하다. 귀에 꽂으면 자동으로 음악이 재생되고, 빼면 자동으로 음악이 멈추고, 손으로 톡톡 치면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은 동작도 가능하고, 정말 사용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많은 제품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이유는 에어팟이 성공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소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중요한 요소이고, 만약에 이런 것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건 부차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특징일 뿐 더 결정적인 요인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따로 있다는 것이다. 타 브랜드가 비슷한 사용자 편의성을 구현한다고 해도 에어팟의 지위를 빼앗는 것은 힘들다고 보는 이유다.
5.
어떤 사람이 에어팟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그 순간은 사용자 편의성이 좋아서라든가 성능이 좋아서라든가 하는 논리가 작용하기 전이다. 사용자 편의성이나 성능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서 일정 부분 사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사용자 편의성이나 성능은 합리적인 소비처럼 생각하도록 이유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너 에어팟 산 이유가 뭐야?”라는 질문에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서.”나 “이거 쓰면 좀 트렌디해 보일 거 같아서.”라고 대답하기보다는 “사용자 경험이 정말 좋아서.”나 “성능이 괜찮아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덜 노골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니까. 이런 합리화 작용은 때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용자 편의성과 성능은 합리적인 소비로 포장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고, 더 결정적인 것은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인 것 같다. 내가 이걸 착용하고 다녔을 때 어떻게 보일지 같은 것, 그런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사용자 편의성과 성능이 가격 대비 너무 별로면 합리화에도 한계가 있어서 서서히 브랜드 이미지를 갉아먹겠지만.
6.
그리고 이제 너도나도 다 갖고 있어 에어팟이 트렌디함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잃어갈 때쯤, 에어팟 프로를 내놓았다. 그리고 에어팟2와 다르게 에어팟 프로는 이전 모델들과 외관상 구별된다. 외관상 구별된다는 것은 엄청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제 서서히 에어팟 프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그 차이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착용하고 있는 것이 구식이 되었다는 그 구린 느낌은 한 번 찾아오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힌다. 트렌드를 신경 쓰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애플의 제품 라인업은 또 굉장히 단순해서 어떤 브랜드보다도 외관상 구별이 쉽다. 사람마다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대부분 그 차이를 의식할 것이다.
거기다 이번에 업그레이드된 기능들은 그 구매 사이클을 완벽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너 에어팟 프로 산 이유가 뭐야?”라는 질문에 “노이즈 캔슬링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그럴듯한가. 물론 그것이 정말로 구매 동기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뒤처지기 싫어서."와 같은 직접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구매 동기를 포장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긴 할 것이다.
그래서 에어팟 프로 디자인이 이상하다거나 기존의 에어팟이 더 낫다거나 하는 얘기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기존 에어팟의 사례에서도 보았듯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변화하기 나름이니까. 결국 에어팟 프로가 기존의 에어팟을 밀어내고 인싸템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유일하게 걸리는 부분이라면 가격이 좀 많이 뛰었다는 건데, 이 정도 갭은 가뿐히 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식으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