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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풀잎 Mar 04. 2024

첫사랑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전하는 눈부신 안부

[책리뷰] 백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를 재밌게 읽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 팟캐스트에서 '백수린'을 검색해 작가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몇 개 들어보았는데

차분한 말투가 좋았다. 그래서 더욱 백수린 작가의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눈부신 안부>는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상큼한 파스텔톤 표지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표지와 달리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화자인 해미는 중학생이 될 무렵 엄마의 유학을 목적으로 초등학생 동생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사고로 큰 딸(해미의 언니)을 잃은 슬픔에 빠진 엄마, 아빠는 잠시 익숙한 곳에서의 결별을 원했고, 그를 위해 엄마는 독일로 유학을, 아빠는 부산으로 직장 발령을 선택했다.


사춘기 나이에 독일 땅에 던져진 해미는 낯선 언어와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지만 언니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걱정시킬 수 없어 마치 자신이 잘 적응하고 있는 듯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해미를 보고 해미가 독일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건 큰 이모였다.

큰 이모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독일에 처음 갔다가 공부해서 의사가 된 파독 간호사 출신 의사였다.



하지만 기억하렴. 그러다 힘들면 꼭 이모한테 말해야 한다.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안 돼. 아무리 네가 의젓하고 씩씩한 아이라도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았지?



이모는 이렇게 해미에게 따뜻한 조언자였다.


이모는 해미에게 같은 간호사들의 자녀 레나와 한수를 소개해준다.

레나는 한국인 간호사 엄마와 독일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고, 한수는 파독간호사 엄마와 파독 광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를 못하는 아이였다.


레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침햇살 아래 부드럽게 몸을 드러내는 연둣빛 들판처럼 완만한 것이었다면, 한수를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과 벅차도록 밀려오는 기쁨의 계곡 사이를 곡예하듯 걷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셋은 금세 친해졌는데 그 아이들 사이에서 해미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바로 뇌종양에 걸린 한수의 엄마 선자의 첫사랑을 찾는 일이었다.


한수의 엄마 아빠는 이혼한 상태였고, 한수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첫사랑을 찾기 위해 엄마의 일기장을 읽고 단서를 찾고 싶은데 자신은 한글을 읽을 수 없으므로 해미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 아이의 선자이모 첫사랑 찾기가 시작되는데....


정신적인 기쁨을 물질적인 기쁨의 우위에 두는 인생을 살 것.

마리아 언니가 내게 보이프렌드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언니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모두 언니를 웃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랑에 빠졌던 걸까.
나를 매혹했던 건 너의 낮은 목소리, 총기,
하모니카로 연주해 주던 <등대지기> 노래.
- 선자 이모의 일기 중




이후 IMF로 인해 급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독일에 사는 친구들과 편지로 소통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연락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 일을 떠올리고 선자이모의 첫사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파독 간호사들이 겪은 독일에서의 삶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하여 펼쳐지고,

그들과 함께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고난. 거기에 가난한 집안 살림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간호사가 되어 이국에서 고생했던 10대 후반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이야기. 그것을 자녀 세대가 여러 가지 단서들을 가지고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선자 이모는 일기장의 맨 앞 페이지에 이 문장을 적어두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자전거를 타고 시외로 한참을 달렸다. 이 나라에선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건물들이 하나도 없는 망망한 들판이 나온다. 가도 가도 계속되는 밀밭과 호밀밭. 그 끝에 펼쳐져 있는 새파란 하늘. 땅덩이가 작은 나라의 도회인이던 나로서는 말로만 들어본 지평선을 향해 그렇게 계속 달리다 지쳐서 자전거를 내평개치고 아무 데나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신록의 들판 위로 보랏빛 수레국화와 메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갓 베어낸 밀밭에선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많지만, 그렇게 누워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을 보며 감미한 기분에 젖어 있다 보니 이 모든 걸 모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선자이모의 일기 중


이 소설에서는 파독 간호사들을 평면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그저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독일까지 가서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했던 파독 간호사가 아니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 제 몸 보다 두 배 이상은 큰 서양인을 돌보아야 하는 일을,

일에 대한 경험도 없이 무작정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떠밀려 간 어린 소녀.... 가 아니라..



당시 독일로 향한 간호사들은

평소 선망하던 글을 작가의 언어로 읽고 싶은 배움의 열망을 가지고,

조국에선 허락되지 않은 배움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

혹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이 아닌 보다 넓은 땅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살고 싶은 열망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꿈 많은 소녀들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병상에서 선자이모가 쓴 편지


마치 유리병에 담긴 편지처럼, 받는 이가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편지를

마지막 죽음을 목전에 둔 선자 이모는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써 내려갔다.

누군가가 받아  읽기를 기대하지 않는 편지. 그러므로 저 편지는 자신을 향해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나 다름없을 것이다. 첫사랑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전하는 눈부신 안부.

이 편지에서 선자이모는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만족하고 있다.

타인의 눈으로 보면 어린 나이에 독일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이혼한 데다 뇌종양까지 걸려 짧은 생애를 살고 떠난 박복한 여자일 수 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이토록 충만한 기쁨이 있었음이 참 다행스럽다.


백수린 작가의 새로 나온 책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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