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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Apr 26. 2024

작가 통장 만들라고 한 사람

[나의 안식월 이야기] 우리 둘의 작업실은 가능할까

엄마의 여행은 아침이 다르다. 참 이상하지. 애들 깨우는 시간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6시 반에 한 번 깼다.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한 번 더 눈이 떠졌다. 8시에 또 깼다. 언니가 9시 정도에 온다고 했으니까 슬슬 준비해야지.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조용한 호텔 인근에서 절대 들을 수 없는 민주노총 투쟁가가 흐른다. 묘한 상황.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소음에 불과할, 아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철의 노동자”를 흥얼거리며 침대에서 브런치 구독 글을 확인했다. 그때 눈에 띈 제목이 ‘탑클라우드 호텔 801호에서’. 뭐야. 나랑 같은 방을 쓴 사람이 있었어? 커진 눈동자로 글쓴이를 보고 웃어버렸다. 배지영이었다.

           

“그는 나보고 쉬었다 가라 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는 손만 잡고 있을 거라고 맹세했다. 그와 나누는 이야기를 몹시 좋아하는 나는 침대에 딱 선을 그을 거라고 대꾸했다....(중략)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지 않았다. 호텔 들어오기 전에 본 번영주택(2층짜리 연립주택, 천변뷰)으로 화제를 옮겨 갔다. 거기를 사서 우리 둘의 작업실로 쓰자고 했다. ‘나 요새 쫌 돈 없는데....’ 염력과 독심술을 쓰는 그는 7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인세와 강연료와 원고료를 모아둔 자신의 ‘작가 통장’ 잔고를 밝혔다.     
김진영 철학자는 <이별의 푸가>에서 육체는 미래를 모르고 오로지 과거만을 안다고 했다. 자기가 있었던 곳, 머물렀던 시간, 자기가 만지고 감각하고 느꼈던 손, 팔, 입술, 목소리만을 안다고. 그를 알고 지낸 15년과 나눴던 무수한 이야기와 곁에 바짝 붙어 걸을 때의 감촉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말을 나는 카톡으로 고백했다. “최은경 작가님이 오늘 준 선물을 오래 기억할게. 작가 통장 잔고도. 제발 나를 가져.ㅋㅋㅋㅋㅋㅋ”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첫 문장부터 재능 낭비를 심하게 하셨네. 독자들은 빨려 들어가듯 그다음 문장이, 내용이 궁금했을 거다. 그가 나라서 실망하셨으려나.


나에게 작가 통장을 만들라고 해준 사람은 언니였다. 몇 년 전 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서면서 모아둔 돈을 헐어 쓰기 시작했다. 언니의 통통했던 잔고가 헐거워져 갈 때 매달 월급이 꽂히는 나는 ‘작가 통장’이라는 딴 주머니에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원고료, 강의료, 인세 그 외 몇 가지 소소한 수익만 모은 통장이다. 그 몇 년 사이 언니는 3만 부가 넘게 팔리는 동화 작가가 되었고, 나는 1쇄 작가를 거의 면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제발 나를 가져”라고 말할 사람은 언니가 아니다. 나다.

      

“제발 나를 가지라”는 언니 말에 그럴싸하게 답했어야 했는데... 그저 큭큭 웃기만 했다. 언니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언니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분발해야겠다. 어이쿠. 글 보다가 늦었다. 서둘러야 한다. 그때 걸려온 언니 전화.

    

“들어가서 쉬었다 갈까?”

“아니 언니. 점심 예약 성공했어. 산에서 여유 있게 걷다 가려면 서두르자. 그냥 내가 1층 로비로 나갈게.”

“그래.”     


야박했나. 서운하려나. 쉬었다 가자고 할 걸 그랬나, 0.1초쯤 생각하다 배낭을 멨다. 언니는 그런 쪼잔한 여성이 아니다. 언니도 빨리 르 클래식으로 가고 싶었을 거다. 소금빵과 커피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소금빵이니 무조건 먹어야 한단다. 군산 한 달 살기 하신 분도 인정한 소금빵이라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카페로 가는 길에 점심 예약한 곳을 고백했다. “에이본 호텔 일식집이야 언니.” 지인들 수소문해도 도다리쑥국 하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언니가 앞만 보며 운전하는 사이 내가 길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봤다. 점심 특선 메뉴, 도다리쑥국. 4월 말까지. 다행이다. 아직 4월이라서.

   

의외로 언니는 도다리쑥국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맛이 별로인가. 걱정했지만 먹고자 했던 것을 먹게 되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한다. 어제 솔밭 산책에 이어 좋은 추억을 언니와 함께 만들고 싶었다. 그거면 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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