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하여
ㅣ 들어가며 ㅣ
<북유럽 디자인의 비밀>에서는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10여년간 디자이너로 경험한 특별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북유럽의 문화와 사회 전반에 관한 흥미로운 주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스며드는 북유럽의 디자인
북유럽의 선진 복지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를 지칭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정책은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투명한 관리와 철저한 운영 전략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러한 복지강국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 (universal design)’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범용(汎用) 디자인’ 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을 과연 이곳 북유럽에서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스웨덴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느낀 점 중 하나는 거리에 휠체어를 탄 사람들, 그리고 보행기를 끄는 노인들, 유모차를 끄는 부모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숨겨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휠체어, 보행기, 유모차 등을 거리에 끌고 나온다면 상당히 많은 제약이 따른다. 개인 승용차가 필요하고, 주차장이 확보되어야 하고,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 모든 것이 필요한 곳, 적재적소에 있어야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거리에서 그들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이유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배려'들이 완벽하게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용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소위 누구나를 위한 디자인 (design for all), 유니버설 디자인 사례가 이들을 거리로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 (Louisiana Museum)에 설치된 리프트 (lift). 불과 계단이 4-5개밖에 안 되는 낮은 높이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리프트가 마련되어 있고 작동법도 아주 간단하다. 이 친절한 리프트는 휠체어, 유모차, 보행기 등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요긴하게 사용된다. ‘불과 4-5개의 계단을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설치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곳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왜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되묻지 않는다. 이러한 작은 배려들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문화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제공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으므로.
(좌측 사진) 대부분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 문개페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능들이 아무리 오래된 (심지어 100년도 더 된) 건물에도 어김없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측 사진) 틸팅 (tilting) 기능이 기본으로 장착된 시내버스들. 휠체어나 유모차가 탑승 시 인도 쪽으로 버스가 기울어 수월한 승하차를 돕는다. 버스, 기차 안에도 이들을 세워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좌측 사진) 은행, 마트, 병원 등 어떤 공공장소를 가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반드시 마련되어 있다. 마트에는 지루해지기 쉬운 아이들에게 과일 등을 나눠주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우측 사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자전거 도로와 인도 그리고 차도. 북유럽은 자전거의 천국으로 알려진 만큼 다른 운송수단보다 월등히 쾌적하고 편리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의시설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어도 휠체어를 타고 거리에 나오길 꺼려한다면, 커다란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면 의미 없는 투자일지도 모른다. 결국 타인이 주는 ‘불편한 시선’ 은 이들의 외출을 막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이들의 비밀이 숨어있다.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정의해본다.
북유럽 사람들은 이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거리에 사람도 많은데 저렇게 휠체어를 타고 나오다니, 다니기 불편하네.” “버스에 사람도 많은데 큰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면 어떡해.”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이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 같다. 나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내 자리를 비켜주는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자리를 비켜준다. 처음엔 나도 그저 ‘친절한 사람이 많은 나라네’ 정도로 생각했지만,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이들의 기본적인 마인드가 아주 “여유롭고 관대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시민의식과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착되어 온 듯하다.
이쯤에서 이들의 ‘직업’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직업이 있고, 그것엔 귀천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논리가 (현실에서는) 실효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예를 들어, 고급 세단을 타고 다니는 어느 회사의 CEO와, 공사현장에서 먼지투성이의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인부를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가 같지 않은 것을 우린 암묵적으로 느끼고 본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 -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어리석은 시선들이 이곳에서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수차례 목격한다.
이곳에선 공사 현장에서 20대의 젊은 여성들이 작업복을 입고 큰 덤프트럭을 몰고, 포크레인을 운전하는 것을 종종 본다. 대형버스를 운전하는 젊은 여성 혹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드라이버도 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하시는 할아버지도 있다. 지인을 통해 대화해 본 그들에게서는 ‘내가 이런 일을 한다면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소비적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를 북유럽 사회현상으로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배경에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배어 있다. 그저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선입견이나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이들의 문화를 경험하며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또 다른 건강한 삶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 결코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선이 자연스레 몸에 배여 행하는 이들의 ‘유니버설 디자인’ 에는 당연히 진정성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디자인을 하는 것. 물론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단점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이들의 문화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삶에 대한 만족도가 기본적으로 높다 보니 타인에 대한 시선과 배려도 조금 더 여유로운 것일까? 나도 아직 그 확실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삶에 대한 여유로운 태도가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앞서 언급한 공공시설에 적용된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우리 아파트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위해 이런 친절한 기능도 있어!’ , ‘우리 회사는 장애인을 위하는 버스도 운영하지’ 이런 식의 광고나 표현 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그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므로 필요한 부분을 위해 사려 깊은 디자인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려깊은 디자인이 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스며든다 (permeate)’ 는 것이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있는 것. 바로 이것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사회적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어주는 ‘문화의 힘 (culture power)’에 기반한다.
세심한 디자인의 배려는 반드시 발견되어 지기 마련이고, 이렇게 발견된 것은 더 가치를 발하게 된다.
북유럽의 ‘스며드는 디자인’ 은 지금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똑똑하게 진화 중이다.
ㅣ END ㅣ
글 / 사진 - 조상우
현재 북유럽 스웨덴에서 산업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사진을 기록하는 포토그래퍼로, 그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북유럽으로 향한 한국인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은 책, <디자인 천국에 간 디자이너 / 시공사>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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