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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Sep 05. 2023

라흐헤스트

그들은 모두 갔지만, 인생과 예술은 여전히 남아!

 이상, 날개, 금홍, 제비다방, 오감도, 구본웅, 변동림, 폐결핵, 죽음!


 일주일 내내 이상(李箱-본명 김해경)을 중심으로 그동안 알고 있었던 배경지식들이 들썩이며 살아났다. 여기에 뮤지컬을 본 후 알게 된 이야기들이 더해져, 변동림으로 시작된 궁금증이 연결고리로 이어져 머릿속에 맴돌았다. 검색에 검색을 더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이야기들!


 변동림, 이상, 멜론, 김환기, 향안, 프랑스, 김동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뮤지컬에 빠진 막내딸 덕분에 덩달아 관람한 공연이 꽤 있지만, 소극장 공연으로 대학로를 찾은 것은 올해 두 번 째다. 공연 관람을 위해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혜화역까지 가는 길은 멀고 복잡하나, 수많은 소극장들 속에서 피어오르는 예술의 아름다움, 선율에 실리는 배우들의 노랫소리만으로도 설레는 발걸음이었다.

 라흐헤스트,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아!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레 졍 빡뜨 메 라흐 헤스트 ),

 공연 후반부에서 향안과 동림이 드디어 마주하며 조그맣게 읊조리는 프랑스어 문장에서 뮤지컬 제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작가 이상의 연인으로 금홍이만 떠올리던 나에게 변동림은 낯선 이였다. 동림이를 연기한 배우(김이후)는 책벌레 소리를 들을 만큼 지적이고 똑똑한 1930년대 이화여대생, 동림을 찰떡처럼 표현한다. '각설탕만 만지작, 만지작' 거리며 첫 만남의 설렘을 드러낸 두 배우(김이후, 진태화)는 방풍림을 걸으며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로 열정적인, 또는 절망적인 고백으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연인이 되어 간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와, 이상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동림, 사랑에 빠진 동림에게 폐결핵 같은 연인의 위중한 병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이상의 집에서 함께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상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주저 없이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리라.

 겨우 22살이었던 동림의 사랑이 무탈하게 아름답게 해피엔딩으로 끝나기에는 그들의 시대(1930년대)가 너무 암울하고 불안했기 때문일까? 겨우 3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동경으로 떠난 남편 그리고 동경에서의 불령선인, 체포, 기침, 좌절이라는 단어 앞에 무너진 이상!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던 멜론까지. 사랑 앞에 용기 내었던 동림의 마음에 상처투성이로 남아 결국 유골함으로 안긴 남편, 이상(李箱)!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다시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라는 가사에 남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동경으로 향하는 동림의 애절한 마음을 구구절절이 담아낸 배우(김이후)의 노랫소리! 너무나 애절하고 안타까운 이 마음을 어찌 달랠 수 있을까? 무대를 가로지르며 동림의 고단한 여정을 온몸으로 연기할 때 눈물이 저절로 맺혔다.


 라흐헤스트에서 변동림과 이상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김향안과 김환기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가며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그래서 결국 과거의 '나' 동림과  미래의 '나' 향안은 마주한다.

 결국 가장 '나'를 잘 알고, 진심으로 '나'를 받아들이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인가? 절망 속에 갇힌 동림을 따스하게 안아주고 삶의 용기를 준 이는 역시 '향안'이었다.


 2004년 향안은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는다. 수화가 떠나고 나서야 붓을 들기 시작한 향안, 그 이유를 묻는 환기에게 붓을 들 때마다 그(환기)가 느껴진다며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고백하는 향안!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며 고개 숙인 환기는 향안의 개인전(1988년)을 축하한다.

 뉴욕 거주 중(1970년)인 향안은 미술평론가로 활약 중이고, 환기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대작을 완성한다. 친구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모티브로 한 아름다운 색채, 무대 가득 그림이 뿌려질 때 환기의 간절한 예술적 갈망이 배우(윤석원)의 목소리를 타고 가득 채워져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커튼콜 데이를 맞아 찰칵할 수 있었던 무대

 우리 (7080 세대)에겐 유심초의 노래로도 잘 알려진 귀에 익은 시구,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부암동 환기미술관을 꼭 방문해 점점이 뿌려진 그림, 점화를 꼭 감상해 보리라 약속해 본다.

이미지 출처-다음 이미지

 파리에서의 행복한 생활(1957년)은 아름다운 춤으로 드러난다. 향안과 환기의 사랑과 기쁨을 표현한 두 배우(이지숙, 윤석원)의 춤은 실루엣만으로도 감미롭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하는 부분이다.

 환기의 그림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먼저 프랑스로 가 파리의 아틀리에 대여(1952년)를 성사시킨 향안! 이상의 문학적 고민의 동반자, 변동림이 그랬듯이, 수화 환기의 그림에 날개를 달아 준 향안! 대단하다.

 드디어 환기와 향안이 처음 만난다, (1943년) 젊은 화가와 수필가로! 향안을 연기한 배우(이지숙)는 '이래도 될까?'를 부르며 또다시 예술가의 사랑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그 망설임을 애절하게 드러낸다. 이미 딸이 셋이나 있는 키다리 화가와의 사랑을 '당신의 아호, 향안을 내게 주오'라며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환기는 호, 수화로 향안에게 불리고, 시골의 작은 언덕이라는 뜻의 환기의 아호인 향안은 동림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시간이 흐른 동림과 시간을 거스른 향안이 드디어 만나 서로를 굳건히 지지하며 위로한다. 22살이 된 동림에게, 22살로 되돌아온 향안이 '너는 내 기억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라고 인생길을 응원하자, 동림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며 향안의 사랑에 용기를 준다.

 동림과 이상, 향안과 환기가 모두 나와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며 운명적 사랑의 서사를 마무리한다. 수화로 불리기 전 환기와 향안으로 불리기 전 동림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이라니, 처음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기도 한 우리의 인생길, 뮤지컬을 다시 처음부터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었다.

명 배우들의 빛나는 애절한 연기(커튼콜 데이)

 이상의 연결고리 끝에 알게 된 변동림이지만, 이상과 환기의 사랑과 예술, 인생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 변동림, 김향안이었다.

 1930년대, 독서광으로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논하며 천재 이상을 만나고, 1940년대 또 다른 천재 화가를 만나 사랑과 꿈을 찾아 자아를 실현하고 예술을 완성한 멋진 여자, 변동림!

 열렬히 사랑하고 온몸을 다해 연인을 키운 사람!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의 무대를 유럽으로, 미국으로 넓혀 한국을 빛낸 사람! 그리고 환기미술관을 세워 그림을, 인생을, 예술을 모아 끝까지 삶을 빛낸 사람! 자체발광 향안! 라흐헤스트 동림!


 뜨거운 삶의 열정이 나를 달뜨게 한 멋진 뮤지컬이었다. 그들의 삶을 온전히 내면화하여 전한 대단한 배우(이지숙, 김이후, 윤석원, 진태화)들! 진심의 갈채를 보낸다. 멋진 이들의 이야기!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라흐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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