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책상 모니터 옆에 분홍 봉투가 오랫동안 놓여 있다. 올해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첫 발령을 받은 서른 살 딸이 임용 100일째 되는 날, 소소한 선물과 함께 보낸 편지인데, 바쁜 업무 중에 슬쩍 눈길이라도 닿으면 금세 마음이 촉촉해지는 마법을 부린다. 언제 이런 날이 올까? 감개무량하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20대 후반의 청춘을 오롯이 도서관에서 보낸 후, 5년 만에 얻은 귀한 합격이기에 충분히 그날을 기념할 만한 내용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편지이다.
딸의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 나는 아이의 넉넉한 품이 되어 주지 못했다. 나와의 관계가 어그러져 상처투성이로 가득하던 때, 나는 한 발 물러서서 기다려 주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여 꿈을 향해 달릴 때도 나는 완전한 지지자가 되어 주지 못했다. 겉모습만으로 아이를 해석하여 평가하고, 돌아서서 금방 후회하고 자책하면서도 진심을 전달하는 데 서툴렀다. 아이와의 거리를 좁히겠다며 한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이와 멀어지는 불씨가 되기 일쑤였다. 그 시절, 우리 마음은 불바다로 들끓어 늘 불안했다.
그렇게 멀리 서 있던 딸에게서 이런 곰살맞은 편지를 받게 될 줄이야! 잃어버린 딸을 다시 찾은 듯 안도감과 행복감에 젖어 이 편지를 눈앞에 계속 두고 싶었다. 읽고 또 읽으며 내 품에 쏙 안긴 딸의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사랑과 존경과 감사를 담은 딸아이의 웃는 얼굴이 자주 그려지다니,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맙다.
우리의 관계가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이가 훌쩍 성인이 되고 서른이 될 무렵이니 정말 지난한 시간을 건너온 것이다. 3년 전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할 때, 아이는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받았다. 수업과 업무를 떠나 다른 어떤 이의 반말, 무시, 모욕적 발언으로 퇴근 후에도 힘들어하더니 급기야 '죽고 싶다'는 말을 울면서 하게 될 정도로 심각했다.
같은 교직에 있는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이가 처한 위기에서 절대적 뒷배가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한 이때부터 딸아이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를 헤아리고, 아이는 나를 전적으로 믿고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자 엄청난 오해들이 술술 풀리는 마법 같은 일이 시작된 것이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히 한 편이 되고 그것이 믿음과 사랑이라 여기니 서로를 헤아리는 여유가 생겨 말이 고와진 것이다.
10대, 20대를 돌아보며 아쉬움, 죄송, 감사, 존경을 담아 쓴 딸의 편지! 6월에 받은 이 편지 말미에 있는 전시회에 함께 가자는 딸의 제안에 따라 지난 7월 21일, 뜨거운 햇빛 아래 전시회에 다녀왔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딸의 편지를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전시회는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제목의 이효리 사진전이었다. 자그마한 한옥 카페에서 열렸는데 사진과 그림과 영상으로 채워진 소박하지만 뭉클한 전시회였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의 처지와 심정은 어쩜 그리 닮았을까? 뜨겁고 아프고 묵직한 서사는 어쩜 이리 비슷할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이든, 아주 오래전 세대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의 딸이고 엄마이고 또 딸들이었다. 가수 이효리와 엄마, 엄마인 나와 나의 딸, 그리고 딸인 나와 우리 엄마처럼!
이효리 모녀와의 갈등과 오해, 사랑 그리고 이해와 대화의 과정을 사진을 통해서, 그림을 통해서 지켜보니 세상의 모든 모녀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을 카페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는데, 뭉클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금쪽같은 내 딸!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자주 되뇌던, 나를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고, 오빠를 잃은 후에는 유일한 자식이었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엄마의 기쁨이 되고 싶었기에, 생기 없는 엄마를 웃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하게 생활했다. 엄마가 나에게 거는 기대나 행동이 특별하게 다가와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튼튼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살림에서 육아까지 모든 것을 챙기던 엄마의 사랑과 희생! 그저 감사하기만 한 이것이 굴레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우리의 관계를 어그러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활력이 왕성하던 엄마가 갑자기 몸져누우며 모든 게 바뀌었다.
육아와 살림, 출근으로 허덕이던 나는 엄마의 관심을 집착이라 여기며 벗어나기를 원했다. 딸과 사위의 병시중이 미안해서 감당하지 못해 내는 큰소리에 제발 나를 믿고 그만 억지를 부리라며 같이 소리를 높였다. 딸 집에서의 생활(사위와의 동거)을 아들집에서처럼 차이 없이 받아들이기 힘든 엄마 세대의 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루하다며 그만하라며 귀를 막았었다.
엄마도 사실 투정 부리고 싶은 상대가 필요했을 뿐인데, 아픈 몸과 병들어가는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따뜻한 마음, 하나면 충분했을 텐데, 난 그런 딸이 되지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엄마를 봉양하면서도 다 까먹어버린 듯 말로는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효도의 출발은 '혀(舌)도'에서부터 라는데, 부드러운 말투를 쓰지 못했다.
엄마의 진심은 '예전처럼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몸이 아파 그러지 못하니 엄마가 참 속상하다'인데 "내가 귀찮을 거야. 사위는 얼마나 내가 싫겠니? 이제 내가 쓸모가 없으니 어서 나를 요양원으로 보내라. 아마 곧 그러겠지만!"이라며 나를 아프게 했다. 나의 진심 또한 '엄마 걱정하지 마요.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제가 끝까지 엄마를 보살필 거예요. 저를 믿어요.'인데 나는 "정말 그 소리 듣기 싫어요. 이제 제발 그만하고 나를 좀 믿어. 내가 그렇게 못된 딸로 보여요?"라며 진심을 덮어 버렸다.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엄마를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만 하면 되었을 일을!
다행히 2013년에 나는 연수의 기회를 얻어 1년 동안 쉴 수 있었는데, 이때 엄마와 화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몸이 덜 피곤하니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는 엄마를 이해하는 고운 말씨가 되어 우리의 상처와 오해를 보듬어 주었다. "엄마,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드려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미안해요."를 되뇌면 엄마는 " 너를 사랑한다. 미안하구나. 고맙다." 로 응답하셨다. 부드러워진 나의 말씨가 가져온 선물이었다.
딸에 대한 나의 진심 또한 '네가 혹시라도 시험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인데, 나는 딸에게 "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약속도 줄이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되겠니?"라며 아이 마음을 긁어 버렸던 것이다.
다정한 눈빛으로 "많이 힘들지? 곧 좋은 날이 올 거야! 오늘도 힘내 보자!" 하면 되었을 텐데!
진심은 진심으로만 전달하면 되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2014년에 엄마를 보내드렸다면 얼마나 가슴을 때리며 후회했을까? 서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고치고, 풀어낼 시간을 만들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엄마를, 딸아이를 끝내 놓칠 뻔한 그 시간을 생각하면 오싹한 느낌마저 들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마음이 다시 어지러워지는 날이나, 복에 겨워 방심하는 날에는 책상 위 딸아이의 분홍 편지를 다시 읽어 본다. 매일 연습하며 진심을 진심으로만 전하는 방법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써본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12/3일자 기사로 실렸습니다.
https://omn.kr/2b69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