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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08. 2016

항상 이 자리에 서있을

스위스가 그리워 질 때

 어렸을 때 자주 이사를 다니곤 했던 나는 곳곳에 참 추억이 많이 새겨져 있다.

약해질 때마다 그리워지는 곳들.

학교 앞 문방구, 작고 하얀 또 꼬질꼬질한 실내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곳,

가끔 다람쥐가 푸르르르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던 뒷산.

앞만 보며 달려갈 때는 잊고 있지만 지치고 힘들 때면 생각나는 곳들.

그렇지만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가는 것들은 대개 실망을 가져왔다.

수년만에 몰라보게 변한 장소, 사라진 곳..

오래도록 연락이 끊겨버린 어린 시절 친구들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 역시 같은 이유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모든 것이 변할 때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스위스는 나에게는 너무나 조용하고 고요한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항상 이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는 자연이 있었다.


스위스 바젤의 라인강


 파리에서 넘어와 처음으로 바젤에 도착했을 때, 5일로 계획되어있는 스위스 여행이 너무 길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허름한 소도시 느낌의 바젤은 전혀 내가 상상한 스위스가 아니었다. 비싼 물가에 당장 밥을 먹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처럼 유명한 문화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무치게 적막한 공기가 자꾸만 내면으로 파고들게 만들었다. 우울함을 밀어내려 터덜터덜 거리로 나가 만난 라인강은 우아하게 넘실대고 있었다. 서늘한 저녁 날씨에도 옷을 집어던지고 강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같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오랜 시간 녹아 흘러내려왔을 빙하의 물들과 사람들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스치듯 지나간 베른을 지나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길, 경유지로 들렀던 스피츠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변하고 싶다. 하루하루 새롭게 살고 싶고, 이 자리를 박차고 저 자리로 또 제자리에서 계속 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도 이 곳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심이 생기는 곳. 아담한 집들은 정겹게 모여있었고 호수를 끼고 내 곱절은 살았을 법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곳들.


20년 후에 다시 오게 된다면 꼭 같은 모습으로 찍어봐야지!


스피츠에서부터 인터라켄으로 유람선을 타고 가는 길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파리에서는 1분 1초가 아까워 눈을 부릅뜨고 하루 종일 빨빨거리며 다닌 무거운 몸을 끙하고 일으켜 끌고 다녔었다. 그런데 왠지, 스위스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침 날씨도 나에게 서두름을 허락하지 않았고, 여유를 즐기게 도왔다.



 인터라켄은 다양한 액티비티로 유명하다. 스위스 여행의 끝자락 오랜 여유에 약간은 지겨움을 느끼던 중에 난생처음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픽업차량을 타고 융프라우와 마주 보고 있는 산을 뱅글뱅글 올라가며, 처음 보는 옆자리 한국인과 서로 포옹에, 응원에 난리법석을 떨다 도착한 산은 너무 높았다. 파일럿을 뽑기로 배정받은 후에 옷을 입었다. 오금이 저려오는데 파일럿이 이제 연결시키잔다. 그래서 파일럿과 연결을 했더니, "자 이제 뜁시다!"하는 말과 함께 거침없이 뛰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날았다. 막상 어안이 벙벙하게 날고 있으니 무서운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인터라켄 동역과 서역사이에서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


 마주 보이는 융프라우와 나를 스쳐 지나는 바람,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내 귓가를 스친다. 파일럿은 비행 후에 추억으로 남겨줄 사진과 동영상을 5만 원에 팔기 위해 성가실 정도로 찍어댔다. 대충 브이를 그려주며 눈을 감고 냄새, 소리, 느낌 모든 감각을 활짝 열었다. 사진은 결국 사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을 할 때 거침없이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알게 됐다. 어안이 벙벙할 만큼 순식간에.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이별을 거친다. 모든 인연의 이별에 대해서 좋아하는 시 중에 양애경 시인의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라는 시가 있다.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우리가 사랑하면
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믿었지
한 차에 타고 나란히
같은 전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너는 네 길을 따라 흐르고
나는 내 길을 따라 흐르다
우연히 한 교차로에서 멈춰 서면


서로 차창을 내리고
- 안녕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인가 봐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끈도 아니고


이걸 알게 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오래 고통스러웠지


아, 신호가 바뀌었군
다음 만날 지점이 이 生이 아닐지라도
잘 가, 내 사랑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각자의 길을 가다, 어떤 교차점에서 만난다는..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도 정말 유사하게 분석한 내용이 있다.


"앨리스가 사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변천해온, 그녀 안에 없는 퍼즐 조각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길이 교차한 경우와 같은 운명이었다. 두 길은 교차점에서 짧게 만났다. 고통은 성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함께할 수 있는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한동안 합치되었던 것은 넓고 갈림길이 많은 길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길을 위해 나아가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맞이한다. '그때'의 인연을, 서로 때가 맞아서 인연이 된 사람들이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었고, 아파해왔던가. 어린 시절에는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게 참 싫었다. 친해진 친구들과 헤어질 때면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던지. 키우던 강아지와 고양이, 토끼, 병아리들과 이별하고 그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다시 겪어도 또다시 아픈 일들이었다. 이별만큼 사람을 흔들어대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흔들거릴 때면 스위스가 그리워진다. 지루할 정도로 고요하고 변함없던 그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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