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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산 Sep 06. 2020

장비들에 둘러싸인 채

뭐든 써야겠다는 생각에


2020년 8월 18일 화요일 저녁 7시,


학원에서 다음 날인 8월 19일 수업 휴강 공지를 수강생들에게 보냈다. 그걸 받은 내 수업의 한 수강생이 카카오톡 채널로 "선생님, 내일 수업 없어요?"라고 하며 받은 문자의 캡처 이미지를 보내왔다. 학원으로부터 아무 내용도 전해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확인을 하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재확산으로 대형학원과 같은 집단 시설에서 대면 활동이 전면 중단되었다. 강사인 내가 당황한 만큼 학원 행정실에서 근무하시는 모든 분들도 당황하셨을 터. 결국 8월의 마지막 2주 수업은 비대면 강의로 전환되었고 강사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오후 1시,


종로에서 토익강사를 시작 한지 10년이 넘은 나는 사실 유튜버라는 직업도 5년 동안이나 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학원 선생님들에 비해 비교적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에 능숙하다. 8월의 모든 수업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최종 시연을 하는데 까지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동료 선생님들은 어두운 인터넷의 심해에서 오랜 시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수업이 휴강이었지만 회의도 할 겸 도움도 드릴 겸 학원에서 친한 선생님들과 만나기로 했다. 모두가 나를 평소보다 10배 정도 격하게 반겼다.

한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선생님의 시대가 오는 거 아니에요?"



2020년 8월 24일 오전 9시,


비어있는 학원 강의실에서 이틀 동안 실시간 비대면 강의를 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굳이 학원에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집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몇 번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세팅으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집에는 책상 용도로 산 이케아 4인용 나무 식탁이 있다. 그 식탁 겸 책상은 창문을 향하고 있다. 한눈에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좋아 그 방향으로 배치를 시켰었다. 집에서 라이브 방송을 할 땐 책상을 향해 정면으로 앉는 것이 아닌 측면으로 앉아서 진행했다. 책상에 놓여있는 나의 반려 조목(역시 이케아에서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산 약 50cm 정도의 인조 식물)과 무드등과 같은 것들이 화면에 나올 수 있도록 카메라의 구도를 맞춰놓고 내 채널의 구독자들에게 반려 조목을 소개하곤 했었다. 하지만 유튜버로서의 라이브 방송과 강사로서의 비대면 실시간 강의는 많이 달랐다. 구독자들과의 소통이 아닌 수강생들에게 강의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했지만, 방송을 진행하는 나의 자세도 많이 달랐다. 측면을 보며 아이패드에 필기를 계속하다 보니 바른 자세로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실시간 비대면 홈 강의 하루 만에 허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자세로 계속 수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날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난 후, 반려 조목을 포한한 책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쪽에 옮겨놓고 4인용 책상의 방향을 왼쪽 90도 각도로 돌렸다. 이제 책상에 앉으면 등 뒤에는 벽이 있고 오른쪽에 창문이 있다. 비대면 강의를 위한 세팅이 완성되었다.



2020년 8월 29일 오후 1시,


8월 수업이 종강하는 순간이었다. 집에서 수업을 한 지 일주일, 꽤 적응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9월 강의가 걱정이었다.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들로 미루어보아, 코로나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이 수그러들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강사들에게 9월 강의가 대면이 될지, 비대면이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둘 다 준비를 해야 한다고 공지했다. 그 문자를 본 순간에는 강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지금의 이 상황을 어느 누가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이 순간들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9월 개강이 9월 2일에서 9월 7일로 미루어졌다. 예정에 없던 1주일의 휴식기간이 생겼다. 서울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쉬고 올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9월 강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만약 휴양지를 간다고 해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이왕 수업을 준비하는 김에 비대면과 좀 더 친해져 보자 하는 마음에 5일간 실시간 온라인 무료 특강을 하기로 결정했다.



2020년 8월 31일 밤 11시,


첫 번째 실시간 온라인 무료 특강을 막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특강을 들으러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현장 강의 수강생들, 내 유튜브 채널 구독자들,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이 고맙게도 들어와 주었다. 추천 영상에 떠서 한번 들어와 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맥북프로와 아이패드였지만 채팅창의 텍스트를 통해 열심히 토익공부를 하는 분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학원에서 진행하는 현장 강의에서 나는 수업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예시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는 편인데, 이번 무료 특강에서는 온라인이기도 하고 밤이기도 해서 그런지 예시를 들 때 자꾸 재미를 첨가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특강을 들으시는 분들도 크게 반응해주셔서 더욱 유튜버스러운 특강을 했던 것 같다.



2020년 9월 5일 오후 1시,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일주일 연장 지침에 따라 9월 강의도 결국 비대면이 되었다. 수강생들에게 9월 강의교재를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오랜만에 종로로 향했다. 매일 가던 종로를 2주 만에 가려고 하니 무언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교재를 모두 보내고 난 후, 강의실에 잠깐 들렀다. 8월에 강의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강의실 앞에 서서 깨끗한 책상들을 쭉 둘러보았다. 보통 때의 책상에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남기고 간 지우개 가루나 미니쉘 포장지 같은 것들이 한두 개 정도 남아있는데, 모든 책상이 윤기가 날 정도로 깨끗했다. 학원 강의를 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 들었다. 어떤 감정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아쉬움, 그리움, 안타까움과 같은 게 아닐까 한다.



2020년 9월 6일 새벽 1시,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장비들에 둘러싸여 있다. 손가락으로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맥북프로 2019(... 나도 안다. 좀 만 참고 2020으로 살 걸 그랬다...), 아이패드 미니 5세대, 애플 펜슬 1세대, 로지텍 아이패드 키보드, 썬웨이 포토 조명과 삼각대, 보야 유선 핀 마이크 등...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장비들 속에서 무언가를 괜히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와 장비를 그토록 좋아하는 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뭔가 인간적인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에 몇 개월 만에 글을 쓰고 있는데 사실 이마저도 따지고 보면 매우 기계적인 것이 아닌가.


자고 일어나면 레티나 디스플레이보다 창밖을 조금 더 많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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