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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 Sep 10. 2018

뒤처지면 안된다는 말대신

보행자 주의-속도를 줄이세요

나는 숲길을 걷다가 푯말을 보았다. '30m 앞에 걷는 사람들이 나타나니 속도를 줄이라'는 주의를 받았다.


내가 걷고 있던 길이 자전거도로였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속도를 줄여서 걷는 사람들이 치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지 않았고 자전거도 아니었지만 우뚝 멈춰서 가만히 있었다.


'보행자 주의 - 속도를 줄이세요'. 상당히 의외였던 문구였다.


평소에 나는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사람이다. 마음의 속도나, 손길의 속도나, 거래의 속도나, 생각의 속도, 선택의 속도 모두 그랬다.


이를테면 식사 메뉴를 정할 때 나는 섣불리 선택하지 않는다. 내가 의뭉스럽게 말을 끄는 사이에 먼저 먹고 싶은 것을 말하는 사람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반면 모두가 식사 메뉴를 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다. 기어코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나요'라 묻는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참 불편했다. 내가 말을 줄이고 가만히 기다리는 이유는 이들과 사소한 의견차이로 부딪치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야속했다. 이런 사소한 이유들이 쌓이니 이들을 떠나 다른 이들을 찾게 되기도 했다.


때로는 '손잡고 걷자'고 내민 손을 짧은 '악수'로 끝내기도 했다. 그 방식으로 나름대로 속도를 조절했던 셈이다.


나는 이렇듯 속도를 늦춰왔다.


하지만 모두들 '고삐를 늦추지 말라'고 말했다.


대학교를 마치지 않은 채 덜컥 입사를 결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입사 후 동기들보다 앞서간다는 말에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을 때엔 더욱 더 강한 채찍질만이 주어졌다.


'이제 곧 마주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나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지녔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들이 먼저 비키도록 더욱 속도를 높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혼이 났다. 한심하고 똑부러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속도를 줄일 수도 있지, 나는 안 그렇지만.' 이라며 내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딪치지 않도록 가만히 기다리는 동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이렇게 숲길 한가운데 표지판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운 날씨에 나를 기다리는 친구가 지척에 있었다. 나는 숲길의 끝까지 빠르게 가야 했다. '보행자 주의 - 속도를 줄이세요'라는 문구를 마음에 담고 나는 빠르게 걸어갔다.


숲길 끝에 서 있는 친구뿐 아니라 그 표지판도 친구처럼 친근하게 기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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