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에 몽땅 쓸어 넣는 바람에 보여 줄 게 없는 음식‘들에 대한 단상
내 기억으론 90년대 초에 설립되면서, 한류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건실 중소기업이기도 했던 ‘신선 설렁탕 신촌 본점‘이 한산해진 것을 지나가다가 문득 보았다. 30여 년을 버텨온 한국 토종 음식의 큰 기둥인데, 그러고 보니 전국적으로도 신선 설렁탕을 요즘은 많이 볼 수가 없다. 아니, 그러고 보니 설렁탕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곰탕집도, 국밥집도, 순댓국 집도 모두 전성기는 지난 모양새다. 이런 ‘탕류‘를 소울 푸드로 여기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소상공들의 ‘되는 아이템, 망하는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사람으로서 ‘뭐지, 왜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깐 잊고 있었는데 이 유서 깊은 서민 음식들의 쇠망을 ‘필연‘으로 느끼게 하는 일이 있었다.
직원들과 국밥집에 갔다. 식당의 풍모는 전통의 맛집이다. 사람은 두 테이블이 전부였다. ‘음... 과연 맛은?’ 하며 국밥을 시켰는데 한 술 뜨니, 역시 진국이었다. 맛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하는 순간. 난 깨닫고 말았다. 같이 간 젊은 직원이 평소답지 않게 음식이 ‘나오자마자’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럼 뭘 하고 먹어냐 하는 거냐고? 감사 기도? 아니, 우리 시대 젊은이의 종교와도 같은 필수 의식인 ‘사진 찍어 인스타 올리기’ 가 생략된 것이다. ‘왜 안 찍어?’ 그랬더니. ‘다 국물 속에 있어서 보여 줄 게 없잖아요?’ 한다. 그거였다. ‘물 속에 몽땅 쓸어 넣는 바람에 보여 줄 게 없는 음식‘들의 멸종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인스타그램어블(instagramable) 이 마케터블 (marketable)?!
귀뚜라미도 지루해 할 한적한 뒷골목에서, 그 흔한 광고 한번 내지 않고도 손님을 줄 세우는 신공을 가진 무수한 ‘맛집‘들. 막상 맛을 보면 ‘음....‘, 서비스가 좋냐 하면 또 ‘흠....’ . 그래도 바글바글한 게 의아한 집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휴대폰을 들어 찍게 하고, 그 아래 설명을 구구절절 쓰게 한다‘는 것. 인스타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사진이 수백, 수천이면 일단 그런 곳에 일부러 안 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를 어쩌나. 재료가 몽땅 수중에 잠겨 있거나, 존재감을 나타낼 것이라곤 실오라기 같은 고명 몇 개인 우리 전통음식들은 이제 평생 그것을 사랑해 온 아재, 아지매들이나, 맛집이 아니라 튼실한 식사를 갈구하는 기사님들 이외에는 (정확히 말하면 10-30대 젊은이들 사이에는) 더 이상은 조명을 잃어 어둠 속에서 윙크하는 참(하지만 인기 없는) 한 색시가 되어 버린 것을
탕, 그리고 비빔밥이 사라지는 것의 함의
일본인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이 있다. ‘왜, 한 국인들은 빙수를 다 섞은 다음에 먹냐’ 는 것. 원래 빙수의 원류인 일본인들은 (뭐 설빙같이 재료의 변주가 다양한 빙수는 없지만) 얼음 말고 올려져 있는 토핑을 조금씩 잘라먹을 뿐, 아무도 그걸 다 부셔 먹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덮밥도 우리 비빔밥과는 먹는 법이 판이하다. 비빔밥으로 말하자면 ‘그 시작은 화려했으나 그 나중은 개밥(?)이니라’랄까, 비비고 치대서 처음 모양도, 처음의 맛도(개별적으로 조금씩 먹었을 때의) 아닌 제3의 맛으로 승화가 일어나는데, 빙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처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박살 내면서도 다가올 새로운 승화된 맛을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 맛이요, 문화였다면 뇌피셜일까. ‘비비고 치댐‘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전통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바로 그거였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다고. 그 ‘정’의 오묘한 발효 미가 바로 ‘인간적으로 비비고 치댐‘에서 오는 것이고, 한국 대표의 맛 김치는 그 ‘비빔과 치댐‘을 디엔에이로 삼고 발효라는 세월을 통로로 삼아 태어난 ‘원형을 벗어난 승화의 상징이다. 그런데, 아뿔싸, 코로나가 오고 말았다.
비비지도, 치대지도, 가까이 가지도 않고 살아가는 세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는걸. 절벽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던 우리를 코로나가 갑자기 밀어 버렸다는 것을. 하지만 이 절벽은 ‘죽음의 절벽‘이 아니다. 절벽에서 밀려 떨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되겠지. 갑자기 무슨 개똥 문학하는 소리냐 하면, 통째로 싸잡아 한 개의 국물로 퉁치는 문화(치수 irrigation를 근간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우리의 아시아 선조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성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눈이었다) 가, 개개인의 개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알맹이가 훤히 보이는’ 문화로 이미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요즘 젊은 직원 회식에 ‘짜장으로 통일이요‘하는 간 큰 부장님은 이미 멸종했다는 것도 사실상 같은 현상) . 서구도 아닌 아시아에서, 우리보다 앞서 나가던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이런 현상이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건, 오롯이 Digital Transformation(포인트는 디지털 기술로 개개인의 개성에 환경이 맞추어 조성되고 있다는 것, 가장 가까운 예가 바로 스마트폰) 흔히 미국 문화를 ‘멜팅 팟(용광로)’라고 지칭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Salad Bowl(재료가 다 훤히 보이는 샐러드)‘라고 바꿔 부르던 것과 유사하달까. ‘단순히 인스타에 올리기 예쁜’ 것만 히트하고 진정 좋은 음식은 외면받는다고 울분을 토하기에는 너무나 큰 저류가 그 아래 흐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지금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 음식은 하나같이 재료 하나하나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래서 전체로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음식이며 그런 현상은 그 아래 거대한 문화 변혁이라는 빙산의 9할을 숨기고 있다.
발효와 개성의 보완 승화
불교는 무교의 지층 위에 서 있고, 이 땅의 기독교 역시 유, 불, 선, 무 내의를 입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아무리 개별 재료 중심의 식문화가 온다 해도, ‘비비고 치대 발효 시키는‘우리 본연의 DNA는 버리려야 버릴 수 없다면,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설렁탕, 곰탕은 어디로 가야 할까. 재료 그릇과 국물 그릇을 분리해, 손님이 재료를 보고 탄복해 사진을 찍고 스스로 국물을 부어 먹게 만든다던가, 아니면 마라탕처럼 있는 국물에 손님이 재료를 골라 넣어 다시 한번 끓인다던가. 재료의 개성을 살리되 손님이 결과로서의 맛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혼이 들어 있는 음식을 살리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사다리필름 대표이사는 오늘도 공상에 잠기어 본다. (ㅋㅋㅋㅋ 설렁탕 땡기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