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ort Case
일을 만들어가는 즐거움 (한일출판사들 간의 협업)
도쿄의 진보초는 책방거리로 유명합니다. 수많은 고서점들이 늘어서 있고 (130여 점포) 대형 체인 서점은 물론 골목골목에 독립서점들도 많습니다. 1층에 있는 고서점들은 매일 아침 테이블을 상점 앞에 내놓고 책을 전시하는데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출판사들도 많습니다. 진보초가 이렇게 된 이유는 1600년대부터 이곳에 여러 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지금도 유명 대학들이 근처에 많습니다. 100년이 넘은 고서점들, 출판사들이 있는 동네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이곳에서 저 역시 책을 만들고 책방을 운영하며 책을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 3 타이틀을 일본의 3 출판사가 동시에 번역 출판하여 마케팅한 프로젝트와 일본의 편집자가 아시아 여러 나라 소설가들에게 작품 의뢰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출판사와 동시 간행한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나는 한국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에 유학을 와서도 문학을 공부하여
지금은 출판사(www.cuon.jp)와 한국어 책을 판매하는 북카페
책거리 (www.chekccori.tokyo)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출판사들을 상대로 양국의 콘텐츠를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출판사도 책방도 도쿄의 진보초에 있어 지역 인프라의 덕을 톡톡히 본다.
어느 날 소학관 출판사 (小学館 SHOGAKUKAN) 대표인 오오가 마사히로 (相賀昌弘)씨가 우리 책방 책거리(chekccori)에 들렀다. 그의 손에는 기시다 나미 (岸田奈美)의 “가족이어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가족이었다 家族だから愛したんじゃなくて、愛したのが家族だった”(소학관, 2020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우리 책방에 들르면 책을 사가는 우량 손님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읽은 책을 내게 읽어보라고 권하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기시다의 책은 휠체어를 타는 어머니와 다운증후군이 있는 남동생과의 일상을 풀어놓은 에세이였다. 장애를 가진 가족, 갑작스러운 가장의 죽음 등 애처롭고 고단한 이야기들이 마냥 불쌍하지만 않게 경쾌하고 발랄한 필치로 그려져 마치 픽션 속의 잘 만들어진 캐릭터를 보는 거 같다. 장애자를 다룬 콘텐츠에 흔히 보이는 계몽적 스토리라던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장애자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의 결여에 대한 울분 등이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재기 발랄한 문장들 속에 이런 문제의식들이 배경으로 들어 있다. 문장 속에 다양한 레이어가 있는, 읽은 후에 감동이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미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테마로 만들어진 책은 없을까. 일본의 편집자들에게 소개할 책으로 이런 비슷한 한국의 콘텐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이가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유니버설 한 이야기.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018년)이 있었다. 지금은 변호사가 된 1급 지체장애자인 김원영이 쓴 책이다. 김원영은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심지어 장애자 자신들도 스스로를 ‘잘못 태어난 존재’, 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사회의 큰 장으로 불러와 세계 각국의 예를 들어가며 ‘실격당한 인생’이라 불리는 이들도 그 존재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임을 증명해 보이는 변론을 시도한다. 그의 글은 앞서 읽은 기시다의 감성 가득한 글과는 달리 대단히 논리적이지만 기시다를 읽고 가슴이 먹먹했던 것과 똑같이 마음이 아팠다. 변호사의 논리 정연한 변론을 읽고 가슴이 막막해지다니. 김원영의 다른 글을 읽고 싶어졌다.
“희망 대신 욕망”(푸른 숲, 2019년)이 있었다. 이 책은 장애인인 김원영 자신의의 이야기이다. 방에서 문을 열어놓고 학교 가는 친구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밭에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김원영이 집을 나와 장애인 기숙학교를 다니다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일반 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 에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한 유약한 소년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를 다룬 한 편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2010년 저자가 28세 때 쓴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라는 타이틀로 낸 책을 2019년에 “희망 대신 욕망”으로 개정판을 낸 것이다. 개정판에는 서문과 후문 페이지를 만들어 10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는 물론 김원영의 변화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다. 개정판의 묘미를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사이보그가 되다”(사계절, 2021년). 이 책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변호사 김원영과 보청기를 사용하는 SF 소설가 김 초엽이 인간의 몸과 과학기술이 결합하는 지점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치열하게 개진한다. 두 사람은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테크놀로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테크놀로지와 사회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김원영을 이렇게 다 찾아 읽고 나서 가능하면 시간차 없이 이 세 권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할 수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한 권 한 권 결이 전혀 다른 책으로 세 권을 읽고 나면 김원영이라는 사람을 360도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으로 한국사회,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술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등 확장된 사유를 동시에 하게 하는 힘이 있는 저작물이기 때문이다. 김원영을 처음 읽은 독자는 나와 똑같이 그의 다른 저작물을 찾아볼 것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세 권을 동시에 계약하여 동시에 출판을 해 볼까? 쿠온은 그러나 아쉽게도 의지는 있으나 재력이 없는 단점이 있다. 한 권 정도는 쿠온이 낼 수 있으니 다른 두 권을 낼 출판사를 찾아보자. 이렇게 좋은 책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우선 인문서에 강한 이와나미서점 (iwanami syoten) 호리 유키코(堀由貴子)씨에게 말해 보았다. 그녀는 책거리에 종종 오는 손님으로 다른 편집자와 달리 논픽션에 관심이 많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 일테면 수학자가 수학에 대해 쓴 책이 있나요? 라던가, 역사 속 사건을 해석한 책을 찾고 있어요. 등 그래서 나의 뇌 속 서랍에는 호리 유키코 씨에게 제안할 리스트들이 가득하다. 장애를 가진 두 명의 아티스트가 각자의 신체를 보완해주는 기기를 빌미로 지상토론을 하는 책이 있다고 운을 떼자마자 관심을 보였다. 또한 같은 저자의 책을 동시에 내서 함께 마케팅해보자는 제안에도 크게 호응을 해 주었다. 나머지 한 권은 기시다 나미를 낸 소학관의 사카이 아야코(酒井綾子)씨. 기시다 나미의 책을 내게 소개해준 소학관의 오 가 씨를 통해 사카이 씨와 접속을 하였다. 베테랑 편집자인 사카이 씨는 베스터셀러 제조기라고 할 정도로 그녀가 편집한 책들은 어떤 책이든 잘 팔린다고 한다. 한국의 논픽션이 마이더스의 손을 거쳐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꿈을 꿀 정도였다. 사카이 씨에게 이 꿈 이야기를 하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추천하였다. 세 명의 편집자가 모두 김원영이라는 배에 올라탔다. 2021년 여름이었다. 한국의 출판사 푸른 숲과 사계절의 빠르고도 친절한 대응으로 계약과 번역 작업, 편집 작업이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사이보그가 되다” 와 “희망보다 욕망”은 부산에 거주하는 번역가 마키노 미카 씨가 맡았고 “실격당한 자를 위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이가라시 마키 씨가 담당하였다. 두 번역가 모두 내가 직접 추천을 하였다. 책의 성격을 알고 번역자의 스타일을 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마키노 씨는 번역을 하면서 김원영 씨의 강연회와 그의 무용발표회(참, 김원영 씨는 휠체어를 타는 무용가이기도 하다) 에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마키노 씨 역시 좋아하면 어디까지고 함께 하는 동지 같은 사람이다.
소학관은 창립 100년이 넘는, 규모에서도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로 시각, 청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책 만들기에 가장 열심인 곳이다. 독서를 하려는 이에게 장벽이 없게 하는 최선단의 억세스비리티화 (accessibility) 부서가 있다고 한다.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전자북, 오디오 북에 이어 점자책까지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3사가 2022년 11월에 동시 간행을 위해 달려오다가 소학관만 한 달 늦어지게 되었다.
간행을 앞두고 세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대면미팅은 물론 ZOOM을 통해 김원영을 일본어권 독자들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지 몇 번에 거쳐 미팅을 하였다. 책이 간행되기 전 4개월 전부터 전국 서점원들에게 파일럿 버전을 읽게 하였고,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도 미리 읽혔다. 또한 파일럿 버전을 읽은 독자들과 독서회를 열기도 하였다.
진보초에 있는 동경당 서점 (東京堂 TOKYODO)에서는 아래와 같이 세 권의 책을 책이 나오기 전부터 포스터 화하여 전시를 해 주었다. 한 작가의 책을 세 출판사가 동시에 간행하여 같이 마케팅하는 시도에 출판계가 주목을 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20일에는 아직 책이 나오지 않았지만 책이 나오고 나면 더 다양한 김원영호(号)의 활약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도 진보초의 한 골목에서 시작된다.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다가 편집자인 카시와바라 고우스케(柏原 航輔)씨를 만났다. 주간지를 만들던 사람으로 그래서인지 한국의 정세에도 아주 밝은 편집자이다. 현재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며 한국영화는 거의 다 챙겨보는 수준. 그가 책거리에 손님을 모시고 왔다. 마이니치신문 기자인데 이중섭과 그의 아내에 대해 원고를 쓴다고 하였다. 카시와바라 씨는 담당 편집자이고 이중섭에 관한 서적을 찾기 위해 저자와 함께 온 것이다. 내 뇌 속에 이중섭이라는 서랍이 하나 더 생겼다. 이중섭은 물론 일제 식민지 시절의 예술에 관한 책이 나오면 카시와바라씨에게 알려주곤 하였다. 2년 정도 지나 마이니치신문 오누키 기자가 드디어 책을 내게 되었다. 책이 나오기도 전에 한국의 조선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크게 날 정도로 한국에서 반응이 컸다. 신문 속 사진에 찍힌 이중섭 관련 도서들 중 일부는 책거리에서 판매한 것들이다. 여러 인연들로 이 책에 대해서는 쿠온이 단독으로 판권 중개를 하는 영광도 있었다.
카시와바라 씨 함께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에 그가 한국 작가와 일본 작가가 어떤 한 테마에 대해 소설을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정세랑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의 작가는?” 하고 물었더니 “아직”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정세랑 작가에게 먼저 제안을 한 뒤 정세랑 작가가 함께 하고 싶은 작가가 있는지를 물어보자고 하였다. 둘이서 어찌나 이야기에 몰두했는지 진보초를 벗어나 황거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한 시간 이상을 걸으면서 기획을 가다듬은 셈이다. 정세랑 작가에게 타진을 하자 한층 업그레이드된 제안이 왔다. “절연”이라는 테마로 한, 중, 일 + 동남아시아의 밀레니얼 세대 작가들 7~9명이 똑같은 제목으로 각기 다른 단편소설을 써서 묶는 앤솔러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었다. 편집자 경험이 있는 작가다운 착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제안은 진보초 산책을 한 2020년 10월 이후부터 착착 진행이 되어 2022년 11월 현재
정세랑 한국
무라타 사야카 村田沙耶香 Murata Sayaka 일본
알피안 사아트 Alfian Sa’at싱가폴
하오징팡 郝景芳 중국
위왓 럿위왓웡사 Wiwat Lertwiwatwongsa 태국
홍라이추 韓麗珠 홍콩
라샴자 LhachamGyal 티벳
응우옌 응옥 뚜 Nguyen Ngoc Tu 베트남
롄밍웨이 連明偉 대만
9명의 작가들로부터 원고를 받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을 하게 되었다.
카시와바라 씨가 이 책에 쏟아부은 열정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대단하다. 각국 문학에 정통한 전문가들을 찾아 작가 추천을 받아 원고를 청탁하고 원고가 들어오는 대로 번역가를 찾아 일본어로 번역을 하였다. 또한 각 작가별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편집 이외의 일까지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과정을 자사 사이트에 자세하게 연재를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이 책을 한국에서도 낼 수 있었으면 하였다. 가능하면 동시 출판을 하고 싶어 했다. 문학동네의 김영수 씨가 선뜻 손을 들어주었다. 2021년 8월부터 김영수 씨와 카시와바라 씨가 메일을 주고받으며 책 만들기에 돌입하였다. 원고만 가지고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어 가는 두 사람. 한국어판은 일본어에서 중역을 한 셈이 된다.
한국과 일본의 남성 편집자 둘이서 오순도순 책 만드는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각자 본 영화, 드라마에서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에 대한 촌평까지 메일로 소통하는 것을 참조(CC)에 있으면서 엿보았다.
책의 모양새가 나올 즈음에 “절연”프로젝트에 참가한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 씨가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작가 축제(2022년 9월 23일-9월 30일)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카시와바라 씨가 또 일을 벌였다. 서울에 가 있는 무라타 작가의 시간을 빌려 별도로 정세랑 작가와 대담을 기획한 것이다. 이 대담은 한국과 일본의 문예지에 싣게 되며 자연스럽게 “절연” 프로모션이 된다. 김영수 씨 정세랑 작가 역시 이 제안에 찬동을 하여 두 작가의 대담이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드디어 두 편집자도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도 이 자리에 참석을 하였는데 작가들의 대담도 깊었지만 편집자들이 1년 이상 메일을 주고받아 서로를 잘 아는 듯한 친밀한 대화들이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 준 또 다른 성과물로 여겨졌다.
문화권이 다른 나라의 동시대의 젊은 편집자들이 만나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경험은 또 다른 프로젝트들로 이어질 것이며 세상은 그래서 깊어지고 따뜻해질 것이다. 내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펴 내고 한국과 일본의 책들을 지치지 않고 신나게 중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따뜻한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카시와바라 씨는 종이책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유명 배우들과 함께 이 책의 오디오 북 (영상은 홍보용 버전)을 만들었고 작가들에게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소감을 동영상으로 받았다. 이 파트들은 나중에 책이 발행되면 다양한 매체에 소개가 되도록 또 편집자의 손이 갈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널리 알리기 위한 편집자의 노력. 물론 회사의 서포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복잡하고 성가신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성큼성큼 해내는 그를 보면 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응원을 하게 된다. 가치 있는 일을 재미있게 열심히 하는 친구에게는 동지들이 많이 생기는 법이다.
위에 쓴 두 에피소드 모두 현재 책이 발행되지 않아 독자들의 반응을 전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다음번 기회가 되면 각 회사들이 어떤 식으로 마케팅을 하였는지, 일본 열도가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