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바꿔놓은 오늘의 일상
작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어 그만두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계속 있었고 그럴 때면 잡코리아의 구인 공고를 뒤적이며
저 회사 중에 내가 갈 곳 한 자리 없을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하기도 했다.
경력직으로의 이직은 처음인지라, 내심 불안했지만 그래도 멘땅에 헤딩하는 신입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결혼을 하거나 더 나아가 아기가 생긴다면
더 도전하기 어려울 것 같아 생각만 하고 있던 이직의 꿈을 올해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작년 11월 회사에서 큰 사건이 터지는 것을 계기로,
결국 스스로의 한계치에 이르러 폭발하고 말았는데
더 이상은 이대로 근무를 연장하는 게 맞는가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만 곧 연말이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연말정산은 마무리하고
2월경 한 번의 연봉협상(이라 부르지만 통보라 읽는다.)도 마치고
꽃이 피는 3월쯤부터 슬슬 이력서를 작성해서 구직활동을 하다 보면
이직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푼 꿈을 꾸었다.
아차, 회사생활을 이곳에서만 4년 내리 했으니
이직하기 전 못해도 2주 정도는 회사 다닐 때 못 가는 유럽이라도 다녀와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에 설레었던 밤이었다.
1월이 되었다
그리고 금방 2020년이 되었고 이천이십이라는 숫자는 마치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도 될 것처럼만 느껴졌다.
1월 초 평가 등급을 받기 위해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적어 보았다.
사실 지난 한 해는 격변의 한 해였다.
크게 말하자면 이직을 고민하는 계기가 여기 있는데,
1. 후임이 바뀌었고 - 일을 같이하는 입장에서 업무스타일이 맞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2. 직무를 추가로 받았으며 - 기존에 하고 있던 업무 외에, 새로운 서비스가 론칭되며 일을 추가로 받았고
거절을 못하는 성격상 꾸역꾸역 다 해내려다 보니 탈이 나고 말았다.
3. 경력 3년이 지나면서 오는 슬럼프 - 직장인의 고비 3,6,9 시즌. 그중 3년 차가 찾아왔고 이 일들과 맞물려 이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작년 한 해 동안 해온 직무를 쓰다 보니,
"내가 뭐하는 사람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왜 주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고
"내가 거절을 했다면 받아들여졌을까?" 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한 해의 이력을 작성하는 동시에 경력 이력서도 업데이트하였다.
너무 이것저것 손을 대서 좋게 봐주면 '경력이 참 다양하구나! 모든 다 시킬 수 있겠다'였지만
경력을 쌓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다 전문성이 없어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문득 불청객인 코로나 19가 찾아왔다.
원래 계획은 회사를 그만두고 2주 정도 여행 다녀온 후 다른 회사를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계획대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바이러스 앞에서 내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바꾼 오늘의 일상
불과 한 달 전까지는 중국 상해에 살고 있는 친구의 일상을 걱정했다.
친구는 고향이 중국 우한이었다.
설 연휴에 중국도 마찬가지로 최대 명절인 춘절 기간이었는데
우한이 봉쇄되어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부모님과 동생이 너무 걱정된다는 얘기를 하길래 위로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걱정이 내 일이 되었다.
대구에 살았다면 늘어나는 확진 환자의 숫자 속에 더 불안했을 테지만
경기도민인 나조차 문득 핸드폰 알람으로 울리는 삐-소리에 얼마나 긴장하는지
이번엔 누가, 어디에서 확진자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깊숙한 불안감이 솟구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주변에 누가 신천지 신자이고
어떤 경로를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이런 몹쓸 상상들이
하기 싫어도 문득 드는 게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남의 일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내 가족의 일로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내가 사는 반경 거리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들어오는다는 것이
너무 무섭다.
당분간은 이직 생각을 접었다
이직이고 뭐고, 일단은 그냥 살아가기로 했다.
집, 회사, 집을 평일에는 반복하고 주말에는 웬만하면 집에만 있으려고 한다.
본래 집순이였던 나는 사실 집에만 있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런 단순한 생활을 반복해야 해야 되나 하는 의문도 든다.
중국 우한의 코로나 확진자가 443명이 되었을 때, 1월 23일을 기점으로 우한이 폐쇄되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그때부터 코로나에 대해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고
연일 마스크 매진이라는 기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확진자 수를 모니터링하며 상황이 실시간으로 뉴스에 나왔다. 몇 번째 확진자, 그 사람이 갔던 경로까지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는 그래도 CCTV도 많고 방역 관리가 어떻게 잘 되고 있구나, 정부에서 관리는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얼핏 했던 적이 있다.
비록 그때도 중국 입국자를 왜 막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었지만,
이렇게 확진자가 급등하기 전까지는 걱정은 해도 내 일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으로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다. 2월 19일 51명을 기점으로, 다음날 2배가 되었고. 그 다음 날은 전날의 두 배가 되어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확진자 그래프가 1월의 중국 그래프를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지금이 최절정에 다다른 고비 같지만,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중국이 한 달간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한 달 이후까지도 이 암울한 상황에 계속 놓여있어야 하는 걸까. 국가시험이 취소되었고, 오래전부터 예약했던 해외여행도 눈물의 수수료를 머금고 취소하고 있다.
작년부터 오랫동안 준비해서 올해 상반기 결혼하는 신혼부부들도 있고,
그 결혼식에 참여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구 결혼식에 참여했다 일가족이 확진 판정받은 김포 일가족의 뉴스를 보며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우연이라는 순간으로
닥칠지 모르는 불행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이 상황이 잠식되기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회사 근무 시간이 바뀌면서 10시에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게 되었다.
임산부들은 재택근무를 시행한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일하고, 미팅과 회의와 회식 문화가 사라졌다.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눈만 보이게끔 마스크를 밀착해서 쓰고,
기침 소리라도 들리면 한껏 예민해진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희망을 잃은듯한 불안감이 서려있다.
그렇게 최소한의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무언가 계획하고, 바꾸고, 배우는 생산적인 일은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냥 당분간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조심스레 이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20년의 시작을 뜨겁게 달구었던 악몽의 코로나 시간으로부터
언젠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기간이 제발, 빨리 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봄바람이 부는 그 시간부터는 마스크 벗고 나들이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