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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Dec 29. 2020

역사가 숨 쉬는 조선의 궁궐, 창경궁을 찾아서 ②

[14호]이웃 동네 문화재 탐방 | 글 박진하

글 박진하

사진 17717 김선문



왕의 사무 공간, 문정전 그리고 숭문당


드디어 지금부터 본격적인 궁전 답사를 시작해보려 한다. 첫 번째 답사지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문정전이다. 여긴 왕의 집무실로 즉 편전으로 만들어졌다. 동쪽의 행각은 옛 모습을 되찾아 서가래 끝에 새겨진 꽃무늬 단청 장식까지도 아름답다. 지대가 높아 장방형의 석대를 4단으로 쌓아 굳게 다진 터전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행각 사이로 문정문을 중심으로 좌우의 문을 추가하여 3개의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그 가운데 문을 향해 만들어진 계단은 태극과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니 왕이 출입하던 궁문이었으며 신하들은 좌우에 있는 문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중문 위로 높은 솟을 대문을 설치하고 다른 문보다 높이 더한 것도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한 까닭일 것이다. 이 궁문에 오르면 왼쪽으로 붉은 벽돌 담장이 보이고 오른 쪽에 보이는 남향집으로 건축되어진 건물이 문정전이다. 궁문과 건물의 좌향이 서로 다르다. 전체적으로 창경궁은 동향으로 배치하고 있으나 이 건물은 남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남면지위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제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해 앉아 있는 게 궁중의 예법이다. 그래서 이 건물은 남향이다.

허나 이 궁전이 다른 편전에 비해 그리 화려하거나 웅장해 보이지 않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이 건물의 크기를 확대하고 기둥은 붉은 주칠은 한대형 원주로 바꾸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정전이 2개가 되므로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에 밀려 이만큼으로 족해야 했다. 겹치마와 2개의 공포, 양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팔작지붕 밑에 3칸 크기의 편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용상과 후면에 있는 일월오봉도가 이곳이 왕의 사무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여기가 사도 세자의 죽음을 결정하는 그런 장소이기도 했다. 이 문정전은 편전으로보다 혼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그 시기에도 여긴 휘령전이라 하여 영조의 첫째 부인인 정성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이 왕후는 사도 세자의 법적인 어머니였다. 세자를 불러 이 정전의 뜰 앞에 무릎을 꿇리고 이상한 말을 한다. 여기에 죽은 왕후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녀가 말하기를 세자가 모반을 해서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고 고하고 있단다. 이런 다소 황당한 상황 속에서 사도의 죽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죽은 왕후의 혼령 고변을 근거로 세자에게 죽을 것을 명하며 칼을 던져 준다. 결국에는 쌀뒤주를 가져오라 명하고 그곳으로 들어가게 하여 굶어 죽게 한 것이다.

이 정성 왕후란 분은 달성 서씨로 첫날 밤 영조로부터 소박을 맞은 여인이었다. 신방에 들인 왕후를 보고 영조가 “손이 참으로 예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왕후의 답변이 “저는 좋은 부모님은 만나 어려서부터 궂은일을 하지 않아 그런 가 봅니다.”라고 했단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온갖 잡일을 도맡아하던 어머니의 과거를 비대어 자기를 비하하려는 말로 오인하게 되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이 왕후를 찾아가는 일이 없었다하는 그 여인의 혼령이 나타나 세자가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주 위에 잔디를 깔아 덮어 두도록 했다. 이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떠돌아다니며 해코지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처방이었다 한다.


창경궁 돌담길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


동향으로 좌향을 선택하여 만들어진 명정전은 가장 오래된 정전이다. 앞으로 탁 튀인 마당 위로는 왕이 다니는 어로가 보이고 좌우로는 품계에 따라 신료들이 정렬해 있던 품계석이 아직도 그들의 품계에 따라 나란히 두 줄로 서있다. 그 바닥은 돌을 거칠게 깨서 만든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 넓은 궁전 뜰에서 첫 번째 계단을 이용하여 밑에 있는 월대로 올라선 후 다시 한 번 두 번째 계단을 활용, 걸어 올라가면 드디어 명전 전에 이르게 된다. 이 디딤돌의 중앙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으며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삼도가 되게 하였다. 이 중 가운데 있는 어도는 가마를 타고 거동하는 왕의 이동을 고려하여 폭을 정한 것이다.

이 명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한 건물이다. 당시 최고의 장인들이 자기가 가진 최고의 솜씨를 뽐내 지은 건축물이기에 하나같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정전을 살피는 필자를 보고는 옆에 계시던 여자 분이 말씀하신다. 이 문지방에 심어둔 넓게 마름모꼴로 퍼진 쇠판을 가르치며 ‘이것이 문짝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인데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씀 하신다. 또 문지방 끝에 달린 조그마한 나무 조각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건 문을 닫아 고정시킬 때 이걸 세로로 돌리면 잠금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열 때는 가로로 풀어 열 수 있다 하신다. 이처럼 작은 지혜가 모여서 만들어진 공간이라 하신다.

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물어 본다. 저 어탑 앞 천정에 떠있는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무늬 조각은 단단한 실로 매달아 둔 것인가요? 그렇단다. 요즘의 모빌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란다.

선생님의 수업은 계속된다. 저 큰 원주 밑과 초석 사이로 조그만 홈이 보이지요. 그건 여러 용도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저처럼 큰 소나무는 3백년이상 자란 나무랍니다. 저걸 세울 땐 기둥 위에서 추를 내리고 이 홈과 일치되도록 해서 수직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둥 밑의 초석은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돌 다듬기를 하고 나무기둥 밑은 오목하게 다듬어 凹凸식으로 서로를 꽉 물고 서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LA 지진 때에도 한옥 건축만은 무너지지 않았는데 이런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나무가 썩지 않도록 그 사이에 백반과 소금을 넣어두는데 그것의 흔적이 저 홈입니다.

이 커다란 원주는 아직까지 단청을 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습니다만 언젠가는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단청을 해야 할 겁니다. 이 나무는 살아서 3백년, 이곳으로 옮겨져 4백년이 되었으니 도합 7백년이 된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오셔서 이 나무 가까이 얼굴을 대고 향기를 맡아 보십시오. 그럼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맑은 향기가 느껴집니다.

또 묻는다. 저 용상에 오르는 좌우 옥계의 측면, 즉 계단 면석에 새겨진 꽃은 목련인가요? 아니요, 그건 연꽃입니다. 다산의 상징이지요. 그 까닭은 보통 대부분의 식물이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는데 반하여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 때문에 ‘연이어 귀한 자식을 낳으라.’는 상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어좌 대를 감싸고 있는 난간의 귀퉁이에 세워진 어미기둥의 상부에 있는 연꽃 봉오리 장식을 가르치며 저 봉오리 모양이 다 다릅니다.


정말 이런 것들은 디테일의 묘미이다. 이처럼 세밀하게 관찰하고 살펴보는 것이 문화재 답사를 재미있고 뜻깊게 하는 방법이다. 나머지 수수께끼를 찾아보는 건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 정전의 역사적 의미만 조금 더 살펴보아야겠다. 이 정전은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즉위식이나 국혼과 같은 가례식이 있을 때 사용되어진다.

이 명정전은 영조가 정순왕후와 결혼을 할 때 그 의식이 행해진 곳이다. 영조가 66세 때 15세의 어린 소녀와 정혼한 것이다. 이 소녀는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적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결혼으로 당시의 정치 지평이 달라진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이 되면서 풍산 홍씨 집안이 노론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홍 씨의 아버지인 홍 봉안은 세자빈이 되기 이전에는 과거 시험에서 늘 낙방만 하는 그런 선비이었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어 급제도 하고 고속 성장을 하면서 영의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발생했다. 정순왕후의 집안인 경주 김씨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아무리 아끼고 좋아한다 해도 며느리는 며느리일 뿐 마누라에 비할 수 있겠는가. 어린 왕후를 아끼고 사랑하는 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정순왕후와 영조가 결혼을 한 시점은 사도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지 10년이 되는 시기이었다. 말이 대리청정이지 무엇 하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독단으로 결정하면 니가 왜 맘대로 결정하느냐고 야단을 치고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게 되면 ‘그거 하나 혼자 처리하지 못 하느냐!’라고 타박을 한다. 이러니 문제이다.

또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영조는 문치를 우선하지만 사도세자는 문치 못지않게 북벌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무술에 대한 깊은 연구도 있었다. 즉 사도세자가 모든 정사를 대리하던 기묘년에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편찬한 무예신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의 특징은 전쟁을 대비하고 나름대로 우리의 무예를 발전시킨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것뿐이랴 화약이나 신무기에 대한 관심도 컸다 한다. 당시 이런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지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비밀스럽게 땅을 파고 그 속에서 이런 연구를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자는 북벌을 가장 큰 정책 이슈로 내세운 효종을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조부이신 효종이 만든 청룡 연월 도를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한다.


또한 노론과 영조의 이해가 딱 맞아떨어진 소론의 제거에 대해 다소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게 문제이다. 당시 영조는 경종의 독살설을 내세워 왕권의 정통성을 흔들어대는 소론 세력들까지도 아우르는 정치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를 왕이 아닌 나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한없는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영조의 증오심을 부추긴 것이 노론이었다. 그러한 가혹한 처벌을 완화하려는 세자의 시도는 영조와 노론에게 있어서 위협적이었던 것이었다.

또 영조는 검약한 선비 스타일로 금주를 명하게 되나 사도 세자는 호방한 성격이어서 술을 좋아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로 인해 영조로부터 세자는 멀어지게 된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이 된 것을 계기로 노론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풍산 홍씨들은 오히려 세자로 인해 온 집안이 풍지박살이 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점차 정순왕후의 등장으로 경주 김씨의 파워가 크게 되는 일이 발생하자 위기감은 더욱 더 커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앞장서서 추진하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참극이 영조와 정순왕후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발생하였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바라본 창경궁


함인정과 외전의 나머지 공간들


이 정전의 오른쪽 후면에 있는 정자가 함인정이다. 그래도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의젓한 건물이다. 여기에서 가까이 있는 성균관의 학생을 초빙하여 접견하거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인물들을 만나기도 했다한다. 지금은 남쪽으로 계단과 현판이 설치되어 있어 정면으로 보이나 기록에 의하면 동쪽으로 출입한 듯하다.

대부분의 창경궁의 외전들이 동향으로 지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다른 궁궐은 남향으로 지어졌으나 이 창경궁만 유일하게 동향이다.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해야하기 때문에 궁궐의 좌향(坐向)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선 초기 궁궐 신축을 담당했던 정도전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궁궐만은 동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고려 말 공민왕이 천도를 할 계획으로 지금의 서울인 남경에 궁궐을 신축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다. 그 궁전이 바로 창경궁의 전신인 수강궁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고 있기 때문에 주례와 같은 예법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산임수라는 풍수지리를 중시하였다.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그 땅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응봉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줄기를 후면에 두고 앞으로는 옥천교가 흐르도록 배치하기 위해서는 동향으로 궁궐을 배치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궁궐의 위치를 정하는 논의 과정에서 펼친 무학 대사의 의견도 이와 유사하다. 즉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기 위해 궁궐을 동향(東向)으로 하는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을 주장하였다. 이는 지금의 창경궁을 일러 말한 것은 아니나 풍수지리를 중시한 까닭에 그 지형을 고려하면 때론 동향으로 궁궐을 건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 초기에 창경궁을 건축할 때 기존에 있던 건물의 배치나 좌향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정자의 마루를 살펴보면 그 안쪽에 위치한 중앙의 마루높이가 그를 둘러싼 사방의 마루보다 단이 높다. 천정도 이와 같이 왕이 거처하던 가운데 공간은 다른 곳에 비해 높게 하여 격을 달리함으로써 위계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 천정의 단청도 한결 더 분명하고 화려하다. 이 함인정의 전후좌우에는 고개지의 한시 ‘사시(四時)’를 새겨 걸어 두었다. 그 좌향에 따라 동쪽에는 봄을 노래한 구절을, 서향에는 가을을, 남쪽에는 여름을, 마지막으로 겨울을 주제로 한 시구는 북쪽에 배치하고 있다.


春水滿四澤 (봄에 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해라)

秋月楊明輝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추고)

冬嶺秀孤松 (겨울 언덕 소나무의 외로움이 아름답구나)


이 함인정의 북쪽에 앉아 앞을 향해 보면 내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전면에 놓인 궁전이 환경전이다. 즉 왕이나 세자의 침실이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형적인 이익공 구조의 팔작지붕 집으로 품위가 한층 돋보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앞에 두고 뒤로는 분합문으로 되어 있어 활짝 열어서 뒤쪽의 툇마루까지 개방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여름철에는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 놓으면 대청은 열린 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뒷면에 있는 툇마루에는 언제나 가보면 지친 다리를 풀어놓고 쉬어가는 관람객으로 가득하다. 또 이 건물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라면 전면에서 다가갈 때는 그 높이가 꽤나 높아 7개의 계단을 다 딛고서야 올라갈 수 있으나 뒤쪽에서는 기단석 1개만 넘으면 바로 건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건물 뒷면은 높고 앞면이 낮은 지형을 그대로 두고 그걸 잘 활용한 것이다. 이 환경전에서도 또 하나의 비극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다. 이 세자는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와 3개월 만에 학질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죽고만 것이다. 그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 사람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임금도 알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인 인조는 만약 세자가 귀국하면 청나라로부터 왕위를 물려주라는 요구가 있을까 두려워하며 의심했다. 또한 세자는 청국에 있을 때 서구의 과학 문명을 깊게 연구하여 선진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 돌아와 청나라의 정황과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며 서양 문물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때 인조가 소현세자의 얼굴로 벼루를 던져 다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세자는 아버지인 인조의 지시나 아니면 묵시적인 동의를 얻어 독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소현세자의 세자빈도 다음 해에 사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로 모두 추방해 버렸던 것으로 보아 이런 독살설의 확증을 더해주고 있다. 이처럼 정적으로 판단되며 아들이라도 제거하는 것이 냉혹한 조선 왕조사였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박진하는 동소문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본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4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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