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성북동 마을여행 | 글 박미산
한용운, 백석, 조지훈, 김광섭 시인을 중심으로
글 박미산
사진 17717 김선문
성북동 이름의 어원은 한양도성(城)의 북(北)쪽이란 뜻에서 왔다. 조선시대엔 왕이 누에 사육이 잘되도록 빌며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지가 있었으며, 풍경이 좋아서 양반들의 별장이나 저택이 몇 채 있었으나 성북동 대부분이 과수원과 밭이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성북동은 본래 한적한 산골이었다. 성북동은 1960년대 삼청터널과 북악산길이 개통된 뒤 서울 도심과의 교통이 원활하게 되면서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당시 성북동 개발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시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성북동 비둘기』(1969, 범우사)이다. 이 시는 서울의 성북구 성북동이라는 구체적 ‘장소’가 폭력적으로 개발되어 적대적이고 비정한 장소로 변화되는 장소 상실을 노래한 작품이다. 1960년대 도시개발은 사람들로부터 거주할 장소를 빼앗고,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업을 박탈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사랑과 평화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시인은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서 이제 산도 잃고 삶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잃었다고 노래했다.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이란 구체적 장소를 통해 폭력적 도시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원주민의 뿌리 뽑힌 느낌을 노래한 것이다.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은 1961년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에 집을 지어 입주했는데 이곳이 그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의 산실이다. 4호선 한성대입구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에 김광섭 시인이 살던 집이 있다. 지금은 그 자리는 연립주택이 들어서서 김광섭 시인의 집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곳에서 다시 내려와서 성북동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성북동 142-1번지 가로에 조지훈 ‘시인의 방-방우산장(放牛山莊)’ 표지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방우산장 조형물은 파빌리온 형의 대리석 벽과 창호 낙화지 없는 격자문이 시인이 살았던 집 방향으로 열려있고, 그 위로 우리 전통 가옥의 처마와 그 아래에 마루가 있으며 마당같이 조성된 곳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대리석벽 바깥에는 시인의 시 「낙화」가 새겨져 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낙화」(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조지훈(1920~1968)시인은 무엇보다 낙화를 찬미할 줄 아는 시인이다.
시인은 촛불이 켜진 방안에서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돋았던 별이 하나 둘 스러지는 새벽, 먼 산의 소쩍새가 울고, 뜰에는 꽃이 지고 있다. 달빛이 고즈넉해서 꽃 지는 그림자가 미닫이에 비친다. 방 안의 촛불을 꺼야만 지는 꽃이 빛을 발한다.
조지훈은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이다.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한 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시인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시들이다.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석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조지훈은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우면서 민속학과 역사학을 자신의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던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민족운동사』 『시의 원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기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이었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인물이었다.
‘시인의 방-방우산장(放牛山莊)’을 지나 성북구 성북로29길 24번지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이 있다. 조지훈이 열일곱에 일송 김동삼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갔던 심우장(尋牛莊)은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했다.
한국 근대시의 형성에 참여한 시인들은 대부분 근대시의 형성 근거를 유학 활동을 통해 또는 국내에서의 서구 교육을 통해 쌓았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는 다 같은 동경 유학생이며 우리 근대시의 형성 전개가 「창조 創造」「폐허 廢墟」「백조 白潮」「금성 金星」등의 동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운데에도 다수의 유학파 또는 근대적인 학교 교육의 이수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사실상 그들의 지적인 세계의 형성이 서구식 교육을 통해 구축되었음을 뜻하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한용운은 이들과는 다르게 재래식 서당교육을 받았다. 만해는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8세까지 동네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서구 근대시의 형식을 들여온 주요한 김억 등과의 유학파와는 차별되게 만해가 정식으로 배운 것은 한시였고 그가 지은 것은 근대적 자유시보다는 한시가 더 많다. 다시 말해 최남선이나 주요한이 유학 후 신문물을 전파하겠다는 선구자적 이상으로 근대시를 썼다면 한용운은 한시의 학습과정 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깨닫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민중들에게 알리고자 했으나 곤란을 겪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승 불교적 포교 정신으로 한글 자유시 『님의 침묵』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김억이 1924년 번역한 타고르의 『원정』은 만해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타고르의 『원정』과 만해의 『님의 침묵』을 비교해 보면 둘 다 산문적이라는 점과 시집 구성이 『원정』은 85편과 『님의 침묵』은 88편으로 비슷하다.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1925년 8월 29일 백담사에서 탈고되었다. 이때는 만해가 3.1운동으로 인해 투옥된 뒤 3년 만에 출옥하여 새로운 사상적 실천적 모색을 할 때이다. 역사적 사건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볼 때 3.1운동의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나려는 의지가 『님의 침묵』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성북동은 원래 성 밖 마을 북정골로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3년에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라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짓게 된 이유는 한용운 본인이 남향으로 하면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용운은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육당(최남선의 아호)은 죽었으니 돌아가라’며 만나지도 않았다.
일본 형사가 한용운을 일제의 편으로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찾아왔었다. 그 형사는 만해가 문서에 도장만 찍으면 성북동의 토지 20만 평을 그냥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유혹을 제시했지만, 만해는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만해는 겨울철에는 혹한, 여름철이면 혹서에 시달렸지만, 그는 이곳에서 태연하게 지냈다. 그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조국 해방도 못 보고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심우장에서 내려와서 대사관로를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길상사가 나타난다. 길상사는 시인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가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도심의 사찰이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기생 진향(자야)을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동료 교사의 송별회에서였다. 그는 진향을 만난 첫 자리에서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라고 말하였다. 어느 날 책방에서 진향이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사 왔다. 백석은 그 책을 펼쳐 이백의 시를 읽더니 진향에게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시 속의 자야는 중국 동진(東晋)의 여인으로 변방에 병역을 위해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애를 태운다. ‘자야’라는 이름은 진향의 삶에도 비슷한 숙명을 드리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백석과 자야와의 사랑은 백석의 부모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백석은 부모의 강권으로 혼사를 치렀고 진향은 고향인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백석과 진향은 몇 차례 이별과 재회를 반복했는데, 그 사이
백석은 두 번의 혼인을 하고도 진향에게 돌아왔다.
진향이 청진동에 숨어 사는 3개월쯤 뒤에 백석의 친필 메모를 든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그리고 백석이 나타나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함흥 천리 길로 돌아갔다. 백석이 가면서 남긴 누런 미농지 봉투에 친필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가 들어 있었다. 이 시를 읽고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1938.3 여성 3권 3호)
자야는 백석의 사랑을 굳게 가슴에 담고 살아갔다. 자야는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1955년에 대원각을 인수했다. 그녀는 왜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느냐는 류시화 시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영 헤어질 줄 알았다면 따라갔겠지. 잠깐인 줄 알았어요.” 자야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그리운 것이 그 사람이에요.”
요정 대원각을 접고 미국에 가서 살던 자야는 1987년 우연히 법정 스님의 설법을 듣고 대원각을 시주하려고 했지만, 법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법정이 고집을 꺾으면서 2년 동안의 개보수를 거쳐 대원각은 법정이 소속한 전남 송광사의 말사인 길상사로 문을 열었다.
자야가 대원각 터를 법정 스님에게 기탁할 당시 약 2만3,140m2(7,000평)였던 부지의 시가는 금액으로는 약 1,000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거금 1,000억 원이라고 해봐야 휴전선에 가로막혀 만날 수 없는 옛 연인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하면 의미 없는 액수였다. 자야는 “그깟 1,000억 원,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한 뒤 미련 없이 대원각 터를 기증했다.
1999년 11월 자야는 “나 죽으면 눈 많이 오는 날 뼈를 이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유언대로 그녀의 유골은 경내에 뿌려졌고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시가 그녀의 공덕비 곁에 서 있다.
성북동은 한용운, 조지훈, 이태준, 박태원, 염상섭, 김광섭, 김용준, 김환기, 윤이상, 채동선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북동을 ‘문화예술 자원의 보고(寶庫)’ 또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문학인, 미술인, 음악인 등이 많이 살았던 성북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으면서도 물이 풍부했다. 필자는 1977년 결혼해서 지금까지 성북동에서 살고 있는데 그 당시 이곳은 도로가 복개되지 않았다. 도로 대신 커다란 바위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린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상권이 지금처럼 형성되지 않은 아주 조용한 동네였으며 공기는 아주 맑았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서인지 성북동에는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필자는 그들의 예술혼이 살아있는 성북동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
필자는 많은 예술인이 성북동에서 문화예술을 꽃피웠듯이 지금도 성북동 골골이 문학, 미술, 음악 등, 문화 예술의 꽃이 피어나고 있으며, 이를 면면히 이어나갈 것이고 10년 후, 50년 후, 백년 후에도 성북동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계속 불려 질 것이다.
박미산은 시인이자 문학박사이다.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세계일보 “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 코너를 연재중이다. 시집 「루낭의 지도」(2007), 「태양의 혀」(2014) 등을 펴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4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