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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동 나나 Sep 21. 2024

바른 정신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암 진단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해서 위내시경을 시작하였고 식도에 암으로 보이는 흉한 모습을 한 큰 돌기가 보였다. 다시 복부 CT 촬영을 하고 간에 8cm 악성 종양으로 보이는 혹이 보인다. 정확한 진단은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일주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진단명은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단어 ‘암’이다. 


 큰 병원을 예약하고 많은 검사를 하고 시술을 위한 준비를 위해 입원을 하고, 시술하기 위해 다시 입원을 한다. 세분되어있는 박사님이라 간 치료 준비를 마치고, 다시 식도 전문의를 만난다. 알지 못했던 치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 암 정복을 위한 단어를 알아간다.  


 암 환자 등록도 하고 보험도 들어있지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언제까지 몇 번이나 할지 모르는 시술 비용이 800만 원이라고 한다. 의사 앞에 가면 기가 죽어 제대로 질문도 못하고, 옆에 있는 환자 눈치 보느라 돈 이야기는 못 한다. 일회 시술 비용이 800만 원인지 몇 회나 해야 하는지. 그다음은 무엇을 하게 되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다. 의사도 예후를 보며 판단을 해야 하니까 말하기 어렵겠지만 일반적인 과정이나 비용을 알려주면 마음 준비, 돈 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그저 한숨만 쉬며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주인공은 유명한 ‘뉴요커’라는 잡지사를 다니다 26세 형의 죽음을 맞는다. 형의 병명은 ‘연부 조직 육종’이라는 암이었다. 생물 수학자로서 어려서부터 작가 브링리의 우상이었다. 이길 수 없는 병과 화합하는 형의 고귀한 모습, 가족의 슬픔과 사랑을 경험한다. 형의 죽음 이후 자신의 배경과 전혀 다른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미술관에 근무하며 많은 작품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위안을 받는 과정을 쓴 글이다.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돈을 걱정하고 병과 의사에 대한 불안, 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선다. 그들도 현실적인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평소에 미술관을 다니던  작가와 그 가족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그림을 보며 오랜 옛날부터 탄생의 기쁨이 있으며 죽음의 슬픔도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탄생이 있듯이 죽음도 당연하다. 그 생각이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다. 


 말의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할 정도로 병 진행이 악화된 상황에서 형은 치킨너겟을 원한다. 그것을 사기 위해 기뻐하며 뛰어가는 작가의 모습은 눈물과 행복이 합쳐지는 장면이다. 침대에 둘러앉아 너겟을 먹는 가족의 모습은 최선을 다한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8월의 어느 날을 달력에서 지우고 싶다. 그날이 없었다면 암 진단도 없었을 것이고 그날만 빼면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 날 이후 바른 정신을 가질 수 없다. 아니 어느 것이 바른 정신인지 알 수 없다. 살려고 하는 것이 바른 정신인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바른 정신인지 알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죽어가고 있는 나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들과 공유해야 하는 삶의 한 조각은 무엇일까? 어제 그는 72세 생일을 맞았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 전 한마디 하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다.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분만실 뒤 건물이 장례식장이다. 신생아를 돌보다 돌아보면 상주들의 검은 옷이 보인다. 죽은 사람의 탄생이 생각나고 내가 안은 아기의 죽음을 생각한다. 내 가족과 나의 삶을 생각한다. 죽은 예수를 부축하듯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앞에서 작가 브링리의 어머니가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을 그대로 보아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 <무덤의 예수와 성모>



작가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많은 작품을 보며 3000년 전의 기쁨과 2000년 전의 슬픔이 오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남길 수 있을까? 내 삶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그림 중 어느 그림과 같을까.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 패트릭 브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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