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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의 서재 Jun 23. 2024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고래 그리고 노인과 바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다 쓰러져가는 공장. 들판에 흐드러지듯 핀 개망초. 적막만이 감도는 폐허에 거구의 여인이 서있다. 푸른 수의를 걸친 여인의 눈길이 폐허가 된 공장에 머물지만 눈빛은 과거 어딘가를 보고 있는 듯 아련하기만 하다.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고래>는 노파, 금복, 춘희 세 여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소설이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해 세상을 향한 증오만 품다가 세상을 떠난 노파. 평생을 죽음을 벗어던지려 발버둥 쳤지만 오히려 사로잡힌 금복. 남들과 다른 신체와 벙어리로 태어나 기구한 운명을 살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춘희. 각자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는 인물들이다. <고래>의 매력은 이 세 인물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로 소설을 이끌어간다는 점에 있다. 금복이 세상을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생선장수나 춘희와 금복을 도와주는 쌍둥이 자매 등 개성 있는 인물들이 소설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든다.


소설의 모든 부분을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오늘은 춘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춘희는 소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주된 인물이다. 금복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죽을 때까지 받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양아버지 문 씨와 코끼리 점보, 쌍둥이 자매와 같이 그녀를 지지하고 사랑해 주는 가족 같은 인물들 또한 존재한다.


남다른 사업 감각으로 허허벌판이었던 평대를 거대한 벽돌공장으로 부흥시킨 것은 춘희의 어머니 금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업이 성공할수록 춘희에 대한 관심은 멀어져 가고, 그 둘의 관계는 남과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몇 차례 화재와 비극으로 평대는 폐허가 된다.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 춘희는 간신히 평대로 돌아오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폐허가 된 평대에서 춘희는 과거의 추억을 붙잡으며 벽돌을 굽기 시작한다. 춘희는 벽돌을 구우면 벽돌을 실을 차가 올 것이고 차가 오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춘희가 좋아했던 사내가 돌아오긴 하지만 그 역시도 남들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 사내와의 인연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지만 열악한 환경덕에 아이까지 잃게 된다. 가지고 있던 것도 없었지만 유일한 아이마저 잃게 된 그녀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혼자가 된 춘희는 또 벽돌을 굽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다는 듯이. 태어나서 벽돌만 구워왔던 듯이 공장을 채우고 밖을 넘어 언덕을 이 룰정도로 벽돌을 굽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녀는 벽돌을 굽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그녀는 왜 벽돌을 구웠을까. 그저 과거를 붙잡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만큼 춘희의 마지막 생은 나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되었다.




멕시코의 작은 어촌 마을에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살고 있다. 노인은 80여 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다. 오랜 기간 고기를 잡지 못해도, 마을 사람들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짐짓 놀려도 노인은 괘념치 않는다. 잡는 날이 있으면 잡지 못하는 날도 있을 거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노인은 여전히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향한다.


산티아고는 힘든 사투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된다. 하지만 상어의 습격 때문에 청새치는 뼈만 남게 되고, 뼈만 남은 청새치만 이끌고 마을로 복귀한다. 산티아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잠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어촌에 사는 노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노인과 바다>는 이야기 길이에 비해  묵직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산티아고는 어떻게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산티아고와 마놀린은 어떤 관계일까. 큰 성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실패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라면 내일도, 내일도, 다시 바다로 향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인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이다. 달리말하면 살면서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인간은 질병, 가난, 죽음, 실패, 좌절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가진 지위, 돈에 따라 고통의 크기가 달라 보일 수 있겠으나 결국 고통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한다. 큰 방이든 작은 방이든 연기가 퍼지면 방을 가득 매우듯이, 고통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결국 사람이라는 방을 가득 채우게 되어있다.


인생이 고통일지라도(고통이 있을지라도) 인생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극의는 죽음이고, 죽음을 긍정할 수 있어야 최고의 긍정이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나는 니체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삶을 최고로 긍정(사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가

앞서 삶이 고통이라고 말했지만 삶에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는 고통도 있고 행복도 있다. 산티아고가 다시 바다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에는 과거의 영광도 있을 것이고 소년 마놀린과의 유대감도 있을 것이다. 그 행복이 작고 미약해 보여도 그것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충분하다. 고통이 인생이라는 방을 채운 연기라면, 행복은 작은 불빛과 같다. 작은 불빛이기에 연기에 가려 그 존재를 잊고 살 때도 있다. 그러나 이따금 불빛을 볼 수 있으므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방향을 잡아준다. 마치 등대처럼 말이다.


<고래>의 춘희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의 인생을 살펴보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물 흐르듯 우연히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춘희에게는 코끼리와 벽돌, 그리고 문 씨가 그녀를 찾아왔다. 산티아고에게는 마놀린이라는 소년과의 유대가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내가 인생을 염세적으로 보는 것은 인생을 끝까지 살고자 하는 집착이 깔려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으니 인생은 고통이라는 '정의'로 매를 먼저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사랑)도 급하게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어떤 일이 있어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끝까지 살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지금의 집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집착을 내려놓으려 한다. 사랑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건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얻고자 책을 읽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면 막상 사는 것 자체의 재미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재미없는 책도, 재미있는 책도 마주치기 마련인 것처럼 인생도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도 있다. 책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얻지 못할지라도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책을 읽듯이 그렇게 천천히 하루를 읽다 보면, 인생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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