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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의 서재 Jun 11. 2024

나는 우리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가

정직한 사기꾼, 토베 얀손

외부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작은 마을에 두 남매가 살고 있다. 의지할 곳 이라곤 남의 집 단칸방 한편 뿐. 그들의 인생은 북유럽의 겨울처럼 쌀쌀하게만 느껴진다.


작은 사회일수록 구성원과의 유대관계는 더욱 친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매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 겨울 얼어버린 호수만큼이나 차갑다. 카트리 남매는 생필품 구입 이외에는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를 하지 않는다. 남매를 좋아하지 않는 마을사람들은 굳이 남매를 찾아가지 않지만, 그들을 찾을 일이 있다면 돈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과도 같은 사이이기에 계약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에 문제가 생기면 어영부영했던 말이 분쟁이 되고, 그들은 카트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카트리는 어설픈 계약이 왜 손해가 되는지 철저히 파헤친다. 마을 사람들은 카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어설픈 약속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자 카트리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믿기 시작한다.


카트리는 이 ‘정직하다’는 평판으로 안나의 돈을 편취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동화책을 출판한 인세로 혼자서 넉넉한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세상을 긍정하고, 타인을 무한하게 믿는 그녀의 성격을 카트리는 서서히 바꿔놓는다. 출판사와의 계약은 호의 없는 착취가 되었으며, 식료품점의 물품 배달은 사기가 되었다. 안나가 마을 사람들을 불신하기 시작하면서 카트리를 믿기 시작하고, 안나의 돈은 점점 카트리의 돈이 되기 시작한다. 안나가 바라보는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한국에서 길을 돌아다니면 마주치는 사람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든든한 경찰관 들과 촘촘한 CCTV 덕분에 가능한 일일까. 물론, 든든한 사회 인프라 덕분인 것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것은 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법보다 그 사회를 더욱 ‘인간적’이게 만드는 건 문화에 있다. 미국과 기타 남미국가들의 총기 사망률이 높은 건 법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말이다. 우리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건 ‘상호 호혜성’이다.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고 있다. 술래는 술래 이외의 사람들이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 살펴보고 잡는다. 술래가 벽을 볼 때 움직이고, 뒤를 돌아볼 때 움직이지 않는 ‘룰’이 있다. 이 ‘룰’은 게임이 유지될 때만 존재한다. 게임이 끝나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룰이다. 룰은 상호가 약속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가 사회답게 만들어지는 것에는 어떤 ‘룰’ 이 있는지가 달려있다. 이 룰에 강제성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될 것이고, 강제성이 없다면 문화, 도덕이 될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카페에서 놀라워하는 것이 있다. 한국인들은 카페 테이블에 지갑이나 노트북 같은 값진 물건들을 올려놓아도 훔쳐가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카페의 자리 값어치가 노트북보다 높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여하튼 대부분의 한국 카페에서는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내 물건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엄복동의 후예답게 자전거는 예외이다.)


우리가 공기처럼 느끼는 것이지만,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것에는 이런 룰, 상호 호혜성에 기대는 것이 많다. 카트리는 이런 룰을 파고들어 돈이라는 물성으로 치환한다. 룰은 사람들이 계약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기반이 미약하다. 카트리는 이런 약점을 파고들어 사람들에게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어냈고 마을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간다. 카트리에게 상담을 받은 마을 사람은 더 이상 타인을 믿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사회가 얼마나 미약한 것에 기대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는 환경은 생각보다 미약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는 너를 믿고 너도 나를 믿는다’는 느슨한 약속이다. 만약 사회를 느슨한 상호 호혜성 없이 카트리가 좋아하는 '계약'으로 이룩하려면 어떤 시스템이 필요할까. 수많은 경찰들과 법과 계약들이 필요하고 수반되는 비용과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내가 누리는 것들은 생각보다 약하지만, 근거가 약하기 때문에 더욱 튼튼하다. 생면 부지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큰 용기를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이 용기 덕에 사회가 사회답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느슨하고 강한' 사회의 혜택은 소설의 제목처럼 모순되다.  <정직한 사기꾼>은 내가 사회로부터 얻는 많은 것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느끼고 있는지 알게 해 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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