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생의 발표연습
대학생 때 한 번 발표를 제대로 망쳤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발표를 하러 앞에만 서면 다리가 떨리고 목소리도 떨리고, 아주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발표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고 강단에 서면 자연스럽게 말이 나올 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는 낯선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할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박사 1년생일 때 여성학 컨퍼런스에 지원할 기회가 있었다. 감이 하나도 오지 않았고 '내 주제에 이렇게 큰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커서 포스터에만 신청했다. (박사 1년 차는 감히 말하건대 석사 3학년 정도의 마음가짐이랄까..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시간인 것 같다.) 포스터 발표는 대형 포스터를 하나 만들어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 중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 연구를 소개해주는 발표 형태로 좀 더 만만하게 느껴졌다. 다만 내가 참여한 컨퍼런스 측에서 포스터 발표 시간을 따로 배당해주지 않아 사람들에게 설명할 기회가 없었지만 대신 여러 사람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그때 큰 컨퍼런스를 경험함으로써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발표 준비라는 걸 진짜 해본건 DAAD 장학금 인터뷰 때였다. 이전 학기에 학교에서 들었던 '프레젠테이션 스킬 워크숍'에 따르면 내 관심분야와 연구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는 법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박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것도 할 줄 몰라 누군가 물어보면 덜덜 떨면서 어버버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장학금 인터뷰 때는 내 박사논문의 주제에 대한 한 문장을 그냥 외워버렸다.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동으로 같은 문장이 나오곤 한다. DAAD 장학금 인터뷰를 준비할 때에는 예상 질문을 짜 놓고 답안 아웃라인을 만들고 그걸 일주일 정도 반복해서 대답하면서 외웠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뷰 때 대부분의 질문이 형태만 달랐지 내용은 같아 비슷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기점으로 내 발표 준비 전략을 아주 많이 바뀌었다. '달달 외울 때까지 연습하기'로. 이런 발표 방식은 거진 2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참여하기로 했던 컨퍼런스, 워크숍들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일 년 정도의 공백기가 생겼다. 그동안 한 챕터를 대충 써놓고 이제야 내 논문의 방향성이 잡혔다. 컨퍼런스에서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2021년에는 다행히 온라인 컨퍼런스를 기점으로 오프라인 워크숍 등이 열렸다. 2021년에 내가 컨퍼런스나 워크숍에 참여/지원하는 형태는 항상 비슷했는데 1. 일단 초록을 써서 낸다. 2. 데드라인에 맞춰서 연구를 발전시킨다. 3. 필요하다면 초안도 쓴다. 덕분에 논문과 연구는 빨리 진행될 수 있었지만 컨퍼런스나 워크숍 근처가 오면 데드라인에 맞추느라 아주 허덕였고 발표의 퀄리티도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독일에서 박사를 공부한다면 옆에서 채찍질해주는 상황 (데드라인)이 아주 도움이 된다.
그리고 2021년에 내게 아주 큰일이 생겼는데, 바로 학부생 강의를 맡게 된 일이었다. 30분짜리 발표도 떨리는 마당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가르칠 만한 수업은 있으려냐 (아는 게 없는데..).라는 불안감을 뒤로하고 교수님이 제안하셨으니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며 수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떨릴 때도 있었지만 (학생들도 느꼈을까?) 생각보다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던 즐거웠던 경험이었다. 강의는 한 번에 두 시간짜리, 거기다 매주 해야 하니 그걸 발표처럼 달달 외울 수도, 수백 번 연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수업내용을 머리에 많이 넣으려고 했고 어려워 보이는 내용은 PPT에 적어두었다. 정말로 초보 강사였다. 그래도 다시 해야 한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또 시켜주세요).
올해 2022년 10월까지 벌써 두 번의 발표를 끝낸 상태였고 11월 말에 체코에서 진행된 컨퍼런스에도 참석을 했다. 올해 컨퍼런스 경험의 대미를 장식할 11월의 컨퍼런스였다. 해외 컨퍼런스에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오프라인으로 발표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이브리드로 진행되는터라 오프라인으로 얼마나 모일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시아학 컨퍼런스이지만 한국학을 하는 분들이 몇이나 오실지도 몰랐다. 거기다 체코라 우습게 봤는데 (비용+여행시간을) 프라하에서 4시간 떨어진 동네로 가게 되어 가는 길도 꽤 멀고 험난할 뿐 아니라 비쌌다.
이번 발표는 그동안의 발표 준비와는 조금 다르게 해 보았다. 그동안은 진짜 기계처럼 달달 외우며 백번 연습했다면 이번엔 스크립트를 제대로 만들어 내가 외울 부분, 설명할 부분, 읽을 부분을 나눠서 준비했다. 발표에서 중요한 건 제대로 '전달'하는 것, 즉 프레젠테이션 스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청중은 '내용'이 알차길 바란다는 걸 그 전 컨퍼런스에서 느꼈다. 중요한 부분인데 간과했던 것 같다. 발표 연습을 하면서 불필요한 슬라이드는 잘라내고 내용을 계속 수정했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논리적으로 발표가 흘러가도록 발표 내용을 고쳤던 것 같다. 더구나 이번 청중은 한국학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본학, 중국학, 동남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는 분들이 오실 것 같아 좀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했다.
컨퍼런스 장소로 향하면서 했던 가장 큰 걱정은 '참석자가 너무 적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었다. 하이브리드 형태의 컨퍼런스인데 왠지 모르게 모두가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만 멀리서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컨퍼런스에 참여하니 50명 정도의 오프라인 참석자들이 모였고 아시아에서 직접 비행기를 타고 온 분들도 계셨다.
내 발표는 둘째 날 가장 마지막에 배정되어있었기 때문에 첫날은 다른 발표자들의 발표를 하루 종일 들을 수 있었다. 아침엔 발표 연습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다른 분들의 연구를 듣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9시부터 오후 4:30까지 진행된 패널에 모두 참여했다. 온라인 발표자가 많아서 그런지 동시 진행되는 패널이 아주 많았고, 하나를 고르는데도 고민이 되었다. 웬만하면 현장발표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 패널로 갔는데, 확실히 온라인 발표자들보다 상호작용이 쉬웠고 발표 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패널이 많아서 사람들이 계속 옮겨 다니는 모습이 보였는데 모든 발표가 같은 층 여러 방에서 진했되었기에 아주 편리했다. 작년에 유럽 한국학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는 나도 온라인으로만 발표를 했는데 현장에 있던 분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결론적으로는 온라인 발표 경험이 현장 경험을 따라가긴 어려운 것 같다. 하이브리드 형태의 컨퍼런스에 또 참여한다면 앞으로도 현장 참여가 우선이 될 것 같다.
체코에 오기 한 달 전쯤 이전 워크숍에서 만났던 체코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정말 신기하게 이 친구는 원래 프라하에서 공부하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올로모우츠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한 번의 인연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올로모우츠에서 다시 한번 만날 기회가 생겼다.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아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 '다음에도 꼭 만날' 이유가 생긴 관계가 되었다. 덕분에 체코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첫날 발표가 끝나고 개최 측에서 도시 투어를 제공해 주었다. 동네를 걸어 다니는 게 전부이긴 했지만 체코도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작은 동네였지만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함께 컨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를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좋았다.
원래 이튿날 아침은 정말 일찍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다른 패널의 발표는 8시 30분부터 시작되었지만 관심분야가 아니라 빠질 생각을 하고 아침엔 발표 연습이나 한번 해볼까 생각했는데, 컨퍼런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대에 발표를 한다고 했고, 참여해야 할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가길 잘했던 발표였다). 이틀의 시간 동안 알게 된 연구자들이 여럿이 되었고 서로 연구에서 접점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새로운 분야 (특히 일본학은 재미있었다)를 배우게 되었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분에게는 나중에 다른 컨퍼런스에서 패널을 함께 구성해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이틀의 시간을 보내면서 참석자들과는 어느 정도 아는 사이가 되었고 그 말미에 내 발표를 하게 되었다. 내 발표는 컨퍼런스 가장 마지막에 배정이 되어 사실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쯤 되면 다들 집에 갈 준비 중이니까. 다행히 오전에 내가 참여한 패널의 발표자들이 자리를 채워주었고 아주 유익한 질문도 받았다.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피드백을 통해 알게 되는 건 컨퍼런스의 큰 장점인 것 같다.
2022년의 마지막 컨퍼런스는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발표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도 같고 발표의 묘미도 알게 된 느낌이 든다. 내년에 또 발표할 기회가 된다면 또 떨리겠지만 우리 교수님 말씀대로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질' 테지 아마도. 그래도 박사생 첫 해에 비하면 아주 발전했다고 하고 싶다. 처음엔 진짜 떨렸으니까. 그동안의 컨퍼런스와 워크숍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장점 중 하나가 주변 나라가 가까워 해외 워크숍,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쉬운 건데 그 이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매번 참석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니 말이다. 발표란 어떤 것이고, 연구란 어떤 건지 계속 배우고 있는 중이고 이제 내년 상반기까지는 논문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사실 새롭게 지원한 컨퍼런스 발표 내용이 아직 쓰지 않은 새로운 챕터이기 때문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