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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협력 직업인 Jun 09. 2024

하루 1000보도 걷기 어려운 해외주재원의 일상

하루종일 걷고 싶어요


한국에서 하루 중 가장 자주했던 일이 뭔가요 묻는다면 단연컨대 산책이다.

아침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45분 (햇살과 강, 들풀이 아름다웠다)

저녁 회사에서 지하철역까지 또 45분 (노을이 기가막혔다. 지하철역 앞 닭꼬치는 더 기가막혔고)


산책을 이렇게까지 즐기게 된 것은 첫 회사 휴직 후였다.

사회생활의 사자도 모른 채 시작한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그 후유증이 꽤 컸었는데, 제일 부러운게 날씨좋은 날 창밖으로 보이는 애매한 시간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부럽던지.

그러다보니 여행을 가게되면 이상하게 남의 나라 여의도같은 통근지역으로 굳이 가서 애매한 시간에 걸어다닌다. 딱봐도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어차피 나도 1주일 후 저들 중 하나이지만).


4년간 산책을 하루에 최소 만보 넘게 하다보니, 이상한 장점이 한가지 생겼다. 체력이 자꾸만 길러지는 것과 별개로, 얇은 신발을 신고서도 험한 길을 잘 가는 스킬이 생겼다. 주재국에서도 샌들 신고 남들은 운동화 신고도 어려워하는 흙길도 산길도 성큼성큼 건널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공중보건과 도시개발을 연계하는 개념 중 건강도시라는 것이 있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안전하고 충분하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더 건강하다는 거다(ex. 비만율과 각종 만성질환이 낮게 나타남).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한 치안, 공원이나 녹지 공간 조성, 같이 걸어다닐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개발협력분야에서 파견을 나가는 국가는 건강도시의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ㅠㅠ

하하. 건강도시는 커녕, 사실 주변 선배, 동료들에게 들은 “걷다가 생긴 괴담(?)”도 꽤 많다.  


좀 된 이야기이지만 필리핀 공원 러닝 할 때 기본 두 세명의 걸인을 마주쳐야 했던 선배, 필리핀 출장 때 호텔에서 두블럭 떨어져있는 스타벅스로 커피사러 가다가 노숙인이 달려들어 줄행랑을 친 동료. 파키스탄에서 (가부장/권위주의 문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쇼핑몰이라도 갔으나 성희롱적, 인종차별적 발언만 무진장 듣고 기분만 잔뜩 나빠져왔던 나의 친구. 들개가 너무 많다보니 답답한 파견자들 중에 운이 안 좋은 경우 개떼에게 공격당하는 불의의 사고도 종종 들린다.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캣콜링, 강도, 소매치기. 아무일도 안 일어나더라도 혼자 걸어다닐 때 느끼는 공포감 같은 것들이 우리와 같은 해외 주재원들을 집 안에만, 혹은 안전한 외국인 거주지역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주요 원인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경우 현재 초유의 국가 비상사태와 독재주의 정권의 대거 군대, 경찰 투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걷기 나쁘지 않은 환경에 살고 있다(이 나라도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걷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다. 길가에서 총격전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주변 동료들에게 저녁 8시 초저녁에는 그래도 걸어다닐 수 있어, 라고 말하면 엄청 놀라고 부러워한다. 어쩌면 최고의 복지다. 한국에서 결혼 전까지는 대학가 근처에서 계속 살았던 터라 12시 넘어서 걷는 것도 참 흔했는데(^^...흑흑) 이제 저녁 6시~8시 산책이라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차를 탈 때와 달리 걸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100년도 넘은 작은 디저트 가게, 길거리에 피어있는 열대의 예쁜 꽃들, 잠시 길에 멈춰있으며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딱봐도 싸운 연인도 마주친다. 하하.  

한편 예전의 안 좋았던 치안상황을 보여주듯 집집마다 높게 쳐진 벽과 교도소에서나 봤던 가시철조망들도 보인다. 이곳에는 대부분의 가게나 기관 건물 앞에 가드가 총을 들고 지키고 있는데, 무서운 분위기와 달리 3시가 되면 자전거에 빵과 커피를 주렁주렁 달고다니는 봇다리상에게 디저트를 사서 길가에서 짧지만 달콤한 오후를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루는 거리에 검정 쓰레기 봉투가 엄청 쌓여있길래, 뭔가 했더니 망고였다. 길거리에 망고 나무가 많은데, 뭐, 워낙 많다보니 아무도 안 먹어서 우리나라로 치면 은행나무 같은 느낌이랄까. 시큼 달큰한 망고 발효되는 냄새도 나름 운치있다.  


걷고 싶어 갔던 화산 투어. 분화구가 멋지다.

이곳에도 철쭉이?

예쁜 정원, 생일파티로 말로만 듣던 뮤네까(muñeca) 인형을 치고 있는 아이들. 버려진 유원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이 나라에는 소나무이긴한데 ㅋㅋㅋ 이상한 소나무가 많다
커피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라는거였구나.신실한 종교행사에도 걷기위해 참석해봤다
몇 안되는 공원 안 대나무 군집
귀여운 죽순, 소, 사진찍는 사람들
걷다가 마주친 예쁜 꽃잎
달걀 전문점과 기둥이 형형색색 예쁜 곧다란 나무들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긴 하지만, 한국에서 걷던 만큼은 당연히 못 걷는다. 그래봤자 하루에 4천보걸으면 참 많이 걸은 날이다. 그만큼 못걸으면 운동을 더 해야하는데, 어째 좀 게을러졌다. 게으름은 뱃살과 1.5kg 늘어난 몸무게로 반영되었다.

내일부터는 핑계를 좀 덜고, 짐에 가서 런닝머신이라도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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