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박혜영
가상 세계처럼 젠더를 나누지 않는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셰리 터클(1948-)은 <스크린 위의 삶: 인터넷 시대의 정체성>에서 정체성의 문제가 사이버 문화로 인해 얼마나 혼란스러워졌는지 시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터넷 속 가상공간이 본연의 나 자신을 더욱 잘 규정해 줄 수 있는 장소라고 믿습니다.
전시명인 <80486>은 인텔 486의 CPU의 풀 넘버링입니다. 저의 이른 다섯 살은 아버지가 사 오신 486 컴퓨터 모니터 속 게임들을 거쳐 각종 장르를 섭렵하고 스스로 원작자의 의도를 재해석할 줄 아는 완벽한 서른이 되기까지, 컴퓨터 전원 버튼을 켜고 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현실과 가상의 인지 오류에서 시작된 제 작업들은 게임을 하면서 예술적 경험을 어떻게 구축하는지와 플레이어가 게임의 예술성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실증적인 자료를 제시하는데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과 이를 표현한 단어들을 분석함으로써 게임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삶과 경험을 바탕에 두고 만든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서 회화 작업 또는 VR 작업으로 저의 경험을 옮기고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게임을 할 때, 선택하는 선택지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의 궤도를 가지게 되는데, 회화에서도 공간을 배치하고 구성하며 색감을 차용해오는 과정이 이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에서 느낀 감정들을 정리하여 비슷한 감정의 표본을 묶어 한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 작업들은 가상 세계에서 탄생했고 그 시작은 모니터 속 사이버 세상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풍경들은 모니터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게임 속 풍경이기도 하고, 마주했던 가상의 물들이기도 합니다. 사실 가상인지 현실인지 내 삶을 스스로 관철하는 데 있어서 그 무엇이 중요할까 라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주변 동료 작가 중에선 가끔 그 <게임>이란 단어만 빼면 조금 더 나은 작업이 될 거 같다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어요. 그 <게임>이 제 인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수히 많은 환경에 도전하게 해왔는지.
가끔 게임을 시작도 하지 않은 제 모습을 상상해요. 어쩌면 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 같고,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믿어요. 어떤 모습이든 지금처럼 행복하게 반짝이진 않았을 것 같아요. 행복의 정의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삶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박혜영 전시 노트
전시 제목 : 스크린 위의 삶 : 80486
전시 작가 : 박혜영
전시 기간 : 21.10.04(월) - 21.10.10(일)
전시 장소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역로 21 갤러리 아미디 신촌
관람 시간 : 월-토 12:00~18:00 일 12:00~15:00
1. 나는 지난 수난 동안 오직 부서진 형상을 합쳐서 새로운 형상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있다.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누구에게도 솔직해지지 않는, 아무것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태도로 이미지를 부셔내고 흐트러트리고 다시 합치기도 한다. 이 형상들은 내가 과거에 본 적이 있는 무언가 이거나 투케(tuché)를 느끼는 공간, 즉 내(I=reality)가 실재(existence)와 만나는 지점일 수도 있다.
2. 현대 사회 이전에는 분명 개인의 정체성이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를 대변하는 디지털 세대의 인간은 더 이상 고정된 사회 구조 안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유동적이고 개인적이고 복합적이다. 현대의 인간은 가상의 사이버 공간 안에서 그들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으며, 신체나 성별, 나이, 인종 등의 정보는 절대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더 나아가 물리적 자아로부터 일체 될 수도 완전히 분리가 가능하기도 하다.
3.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이중자아의 얽힘, 즉 가상과 현실세계의 정체성에 관한 혼동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곳에는 더 이상 타자화된 응시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