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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Dec 07. 2020

채소 같은 기분

때때로 아삭하고, 때때로 부드러운

당근처럼 아삭한 기분이야!

푹 삶은 감자처럼 포근해!

볶은 버섯처럼 쫄깃해!


매일 아침 동료들이 형식적으로 묻는 “오늘 어때 (How’s it going)?”라는 질문에 그 날 따라 좋은 내 기분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다가 대뜸 “당근처럼 아삭한 기분이야 (I feel crunchy like carrots)!” 했더니 사무실에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런 비유는 처음 듣는다며 다들 웃음이 만발이다. 나도 멋쩍어서 크게 웃다 보니 정말 싱싱한 햇당근을 베어 문 것처럼 달고 풋풋한 맛이 입에 돈다. 함께 있는 사람들과 크게 웃는 이 기분을 아삭한 당근보다 더 잘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즐겁다가, 화를 냈다가, 한껏 부드러웠다가, 신이 나는 우리의 다양한 감정처럼 채소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요리책을 펼 때마다 전혀 모르던 새로운 채소를 만나는데 그럴 때면 어서 새 재료를 구해다가 밥을 해 먹는 계획을 짠다. 그럴 때면 어린이날 받은 선물 포장지를 뜯어내기 전의 순간처럼 짧은 파동의 미묘한 간지러움이 가슴에 들어찬다.


비트를 처음 만난 날이 그랬다. 짙게 붉은 비트는 겨울 샐러드 요리법을 찾다가 발견했다. 감자 같기도 하고 짤뚱한 무 같기도 한 비트는 네덜란드 살던 시절 시장에서 처음 샀다. 책에는 그저 "익힌 비트를 깍둑썰기 한다."라고만 적혀있어서 잎 줄기가 길게 뻗은 비트 한 단을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왠지 고구마처럼 구워야 맛있을 거 같아서 인터넷에 비트 굽는 법을 찾았다. 겉에 묻은 흙을 잘 씻은 뒤 포일에 싸서 거의 한 시간 가량을 구워야 한단다. 소금 후추 간도 조금씩 하고 올리브유를 둘러 꽁꽁 포일에 싸맨 비트 두 알을 오븐에 넣고 한 시간 동안 큰 오븐에 비트만 굽는 게 아까워 급히 빵 반죽을 했다.


한 시간 만에 다 구워진 빵과 비트를 같이 꺼냈다. 빵은 잔뜩 부풀어 올라 폭신하고 비트는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나왔다. 빵이 한 김 식고 난 뒤에도 따뜻한 구운 비트를 쥐고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낸다. 손에 붉은 비트 즙이 한가득이다. 옷에 튈까 조심조심 잘라서 한 입에 넣는다. 감자와 무, 고구마를 섞으면 이런 맛일까 달큼하고 아직은 푹 익지 않은 무처럼 물크러지는 식감이었다. 갓 구운 빵에 올려 겨자씨가 있는 노란 머스터드를 올리고 소금 간을 살짝 했더니 맛 조합이 딱 맞았다. 저녁에 샐러드를 만들어야 하니 조금만 먹어야지 하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냉장고에 넣어두는 그 오후의 순간이 꼭 비트 같았다. 주방엔 땅 깊이 단단히 자라나 부드럽게 익은 흙의 달큼함이 진하게 퍼져있었다.


Photo by Natalia Fogarty on Unsplash

비트는 생김새를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익숙한 맛이었다. 뉴올리언스 유명 음식 검보(Gumbo) 요리법을 찾다가 알게 된 오크라와는 정반대였다. 오크라는 겉보기엔 청양고추처럼 생겼고 안에 씨가 들어 있어서 사진을 찾아봤을 때 낯이 익었다. 장날 어느 아주머니 앞 소쿠리에 가득 담겨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한 여름 덥고 습기 찬 기후에서 잘 자라는 오크라를 추운 네덜란드의 가을에 찾기는 쉽지 않았다. 주말 시장에서도 슈퍼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서 한 동안 검보 요리법을 적어만 두고 시도도 못했었다.


그러다 암스테르담 어느 길가에 자그마하게 있던 인도식 재료를 파는 곳에서 오크라를 실제로 처음 보았다. 뜻밖의 곳에서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상점 주인이 나에게 인도가 세계에서 오크라를 제일 많이 재배하는 곳 중 하나라는 걸 알려줘서 뜻밖이 아닌 당연한 곳에서 오크라를 발견했다는 걸 알았다. 고이 집까지 가져와서 그 날 저녁 바로 검보를 만들기로 했다.


깨끗이 오크라를 씻고 자르는데 미끈거리는 감촉에 적잖이 당황했다. 다시마를 불리고 나서 만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렇게 미끈대는 채소는 본 적이 없어서 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 다른 재료들이 이미 익고 있는 냄비에 넣기 전 다시 한번 오크라에 대해 읽었다. 미끈거리는 점액질이 검보를 걸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걸 확인하고 잘라둔 오크라를 투하했다. 어떤 맛이 날까 걱정이 조금 앞서는 마음으로 한 시간 동안 요리가 잘 나오기를 기다렸다.


밀가루로 루(roux)를 만들어서도 그랬겠지만 오크라를 넣은 검보 스튜는 걸쭉했다. 오크라가 넉넉히 든 검보 스튜 한 국자를 크게 푸자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순간 같았다. 뜨끈하고 칼칼한 검보 스튜를 밥과 함께 먹었다. 토마토, 버섯, 양파 등 많은 채소가 섞여있어 오크라의 맛을 콕 집어 내기는 어려웠지만 모습만 보고 기대했던 것처럼 친숙한 맛은 아니었다. 신기한 식감과 맛에 홀려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난 저녁은 푹 익은 오크라처럼 묵직한 어둠이 이미 짙어있었다.

Photo by Neha Deshmukh on Unsplash

무엇을 먹느냐가 개개인을 만든다지만 그 과정의 시작은 각각의 채소를 만지고 요리할 때부터 시작된다. 다양한 재료들을 만나고 이해하면서 내 기분도 그에 맞게 함께 동화한다. 언제나 새로운 채소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따뜻한 포옹이 그리운 지친 날엔 그 해에 갓 나온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넣은 부드러운 감자수프를, 처진 기분을 한껏 올려줄 활력이 필요할 땐 탱글탱글한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을 간장에 볶아 버섯 쌈밥 한 상을 차려 먹는다. 매일매일이 다른 우리 일상에 채소는 몸을 위한 영양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도 풍족하게 한다.


이 깊어가는 겨울밤 원하는 분위기에 맞게 오늘도 오늘의 채소를 골라 상을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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