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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Jul 23. 2020

바르샤바, 기억하기 2

그리워서 쓰는 늦은 여행기

[바르샤바, 기억하기 1편: https://brunch.co.kr/@yoriyuri/30]


바르샤바 대학교에 가기 위해 걸어가는 길은 독일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파스텔톤의 건물 색과 외관이 우리가 사는 독일 바바리아 지방과 닮았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훨씬 넓었고 더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거리에 있는 상점들도 신기했는데 그중 하나가 오래된 그림과 지도들을 파는 ‘아티쿠스 (Atticus)’라는 골동품 상점이었다. 평소에 상점에 들어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이곳에서 오래된 지도들을 보면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사고 싶다기보다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그림이 몇 점 있었지만 겨울옷을 싸느라 부족한 꽉 찬 여행가방을 탓하며 우리는 아쉽게 상점에서 나왔다.

파스텔톤 건물 색이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건물들과 비슷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긴 대로인 ‘크라쿠프 교외 (Krakowskie Przedmieście)’로에 있는 바르샤바 대학교 입구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마치 공원 입구인 듯 한 길목에 들어서니 학생들이 한편에서 분주하게 행사 준비 중이었다. 그저 넓은 대로에서 작은 길목으로 몇 발자국 내딯었을 뿐인데, 젊음이 넘실대는 공간에 있으니 나도 함께 들떴다. 그 활기찬 길목에서 조금 벗어나자 금세 널찍하고 공원 같은, 이제 막 색을 갈아입기 시작한 잎들이 조용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색의 조화가 너무 예쁜 캠퍼스
내부는 마치 호텔 같았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앉아 수다를 나누고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 곁을 직장인 신분으로 걸으니 나도 조금은 발걸음을 천천히 하고 나를 둘러싼 이 공간에 녹아들고 싶었다. 겉에서 보기엔 그냥 단아하다 생각한 건물들 안은 마치 중세시대에 온 것 같은 장식이었다. 그냥 건물 안을 둘러보기만 하는 것뿐인데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훔쳐 나온 듯 조금은 긴장도 되고 어색했다.


캠퍼스에서 나와 구시가지를 향해 쭉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여행하면서 내가 가장 즐겨하는 일정 중 하나가 그 나라, 도시에 있는 슈퍼에 가는 것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관념 같은 것들을 얼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슈퍼마켓에서 가장 먼저 알아챌 수밖에 없던 건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보드카를 사랑하느냐 였다. 독일 슈퍼에 가면 수백 가지 종류의 맥주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슈퍼 입구 근처에 벌써 보드카가 한 진열장을 가득 채웠다.


보드카 종류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드디어 구시가지에 도착했을 때야 내가 폴란드에 대해 너무나 몰랐구나 깨달았다. 뭉실뭉실 피어오른 구름 배경과 그 앞 나란히 선 바르샤바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걸으니 이 도시가 지닌 것들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러시아에 의해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나라’라고만 알고 있던 나의 무지함이 이 아름다운 도시에 미안했다. 그렇게 우연히 걷다 보니 구시장 광장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바르샤바 박물관을 만났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간 바르샤바 박물관에서 오후 나절을 다 보냈다. 보통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흔한데도 그 안에 있는 이야기 하나하나 읽고 가까이서 보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사진을 찍는 것 대신 이 도시에 오랫동안 있었던 물건들을 보면서 아주 짧게나마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과 이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달 모양 조각들
박물관 꼭대기 층에서

박물관에서 나오니 아침에 꽤나 든든하게 먹은 샌드위치가 금세 소화된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일러서 밥을 먹으러 가기 전 잠시 호텔에 들러 쉬면서 저녁 먹을 식당을 골랐다. 비건 식당들이 줄지어서 있는 Chic Śródmieście Południowe 구역에 가기로 했다.


‘시크-사우스’라는 명칭에 걸맞게 이 구역 건물들은 이 날 봐온 다른 공산주의나 구시가지 건물들과 다르게 프랑스 느낌이 났다. 트렌드에 민감한 곳이 대도시에 꼭 한 곳씩 있는 것처럼, 이 구역이 바로 그런 곳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많은 비건 식당들 중에서도 국제 요리를 파는 곳이 많았는데 그중 우리는 Tel Aviv라는 이스라엘식 비건 식당에 들어갔다.


치아씨와 민트, 사과 조각을 넣은 물


아침에 갔던 Nancy Lee와 비슷하게 자유분방한 느낌이 참 좋았다. “비건이라 더 환영해”라고 사방의 분위기가 내게 어서 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리를 잡고 배가 너무 고파서 후무스와 팔라펠을 애피타이저로 제일 먼저 주문했다. 따끈한 빵과 함께 나왔는데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빵을 열심히 뜯고 후무스를 바른 뒤 팔라펠을 조금 올려서 먹기 시작했다.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시간이라 더욱 이 따뜻한 음식이 여행 첫날의 마지막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피타 빵과 팔라펠, 그리고 후무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원하는 메뉴를 골랐다. 남편은 ‘이로 (Gyro)’라고 불리는 그리스식 구운 ‘고기’를 피타 빵에 넣은 요리를 골랐고 나는 코코넛 카레와 반찬 같이 작은 요리들이 함께 나오는 메뉴를 주문했다. 비건 음식점에 가면 항상 깨닫는 것 중 하나가 비건식이라도 바깥 음식은 역시 자극적이고 소금이나 설탕을 많이 넣는다 였는데, 이 곳 음식은 부드럽고 부담스럽지 않은 맛이어서 너무나 좋았다. 맛을 원하고 갔다면 그저 그랬을 수도 있지만, 추운 바르샤바의 첫날 일정을 잘 마치고 다음 날을 위해 좋은 음식을 원했던 우리에겐 너무나 완벽한 식사였다.


내가 먹은 메뉴 -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남편이 먹은 이로 빵


식사를 다 마치고 계산을 하면서 이 문구를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청혼에 이 자유롭고 활짝 열린 마음의 도시에 금세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리고 한참 동안 이 곳에서 먹은 요리들과 지나친 모든 풍경들을 그리워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저녁을 먹은 후 비건이 되기로 결심한 후에도 내 의견을 지지해주고 변함없이 함께 노력해주는 비건이 아닌 내 남편과 함께 맥주와 칵테일로 우리 서로에게 건배로 첫 날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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