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리하는유리 Apr 30. 2021

카메라 뒤에서 당근을 쥐고

비건 유튜버가 된다는 것

삼각대의 다리를 길게 늘이고 그 위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도마 위 허공에 손을 놓고 초점을 맞추면 촬영 준비가 끝난다. 두 사람이 들어서면 꽉 차는 작은 주방에 선 큰 삼각대는 내게 움직일 공간을 주지 않는다. 얇은 플라스틱 다리들 사이에 내 다리를 들여놓으며 재료를 잘 자를 수 있는 각도를 찾는다. 분명 편집자가 영상 첫 부분 촬영을 시작하기 전 시간을 좀 길게 두라고 했지만, 해가 저물어가는 탓에 자연광을 잃을까 겁이나 부리나케 칼질을 시작한다. 토요일 오후가 한 10시간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녹화가 시작되면 촬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내게 주어진  주말 이틀,  안에 글을 쓰고  요리법을 시도하고, 영상을 찍고 편집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일단 자른 채소는 써야 하고 어떻게든 요리를 해야 하니,  영상을 며칠로 나누어 찍을 수는 없는 일이다.  컷에 모든 과정과 완성본을 담기 위해 빠르게 촬영을 진행해야 한다. 채소를 꺼내어 씻고, 중간중간 주방이 더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깔끔히 치우고, 냄비에 올려둔 요리를 타지 않게 휘저으려면 시간이 10시간 있어도 모자란다. 팔이 10개쯤 달린 인도의 두르가 신이 되어야 제시간에 완벽한 요리와 영상을 함께 만들  있을  같다.



부족한 시간에 내 덤벙거리는 성격을 더하면 주방 안에선 우스운 광경이 종종 펼쳐진다. 완벽하게 채소를 썰으려다 우르르 바닥에 떨어트리는 건 기본이고 기름 묻은 손으로 카메라를 만지다 의도치 않게 녹화 버튼을 두 번 눌러서 녹화를 취소하기도 했다. 당근을 열심히 썰다가 한참 뒤에야 녹화가 안 됐다는 걸 깨달아서 필요한 양 보다 훨씬 많은 당근을 준비해야 한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깨끗이 청소한 주방 위에서 케이크 재료를 섞다가 두유를 엎어서 주방을 다시 치우고 녹화를 한 날은 너무 속상해 울 뻔도 했다.


직장에서 일이 지독히도 많은 한 주를 보내고 주말이 오면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좋은 요리법과 영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 기술이 내 능력을 초과한다고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매주 새로운 요리를 한다고 해도 요리법을 완벽하게 만들고 정리하려면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특히나 케이크나 쿠키 같은 요리법이 더 그렇다. 재료와 주변 환경, 오븐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로 나올 수 있는 디저트류는 더 많이 만들어봐야 한다. 주중에 같은 디저트를 매일 같이 굽는데 요리법이 완벽하게 나오지 않을 때는 답답해서 다 구워진 케이크를 식히게 두고 밖으로 뛰러 다녀오기도 했다. 주말에 등산도 다녀오고 다른 활동도 하고 싶지만 시간을 쪼개 계속 일을 하는 게 벅차기도 한게 사실이다.


 어려운  한국에서 구할  있는 재료로 요리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독일에서 구할  없는 한국 재료로는 요리법을 시도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요리할  다양한 향신료를 정말 많이 쓰는데 한국에서 찾을  있는지, 없다면 다른 대체 재료가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한국에서 자주 먹던 들깻가루, 깻잎, 각종 나물, 매실액, 수수와  같은 곡물류, 그리고 손수 만든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도 독일에선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달간은 그저 밥만  먹으며 요리법을 개발해보면 좋겠다 같은 공상을 하기도 했다. 결국엔 구할  있는 재료로 최대한 쉽게, 간단하게 비건 요리를 만들어냈지만.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든 요리가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그 전의 모든 걱정과 시행착오는 사라진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 요리법을 따라 해 주었으면, 그리고 좀 더 건강하게 맛있는 요리를 먹었으면 하는 바람만이 가득 찬다. 하지만 영상을 올린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 영상을 보러 오는 건 아니다. 요리법이 완벽하고 영상이 볼만해도 유튜브가 어떻게 추천과 검색 결과를 중요하게 두는지를 알아야 한다. 홍보를 더 잘하기 위해 썸네일 만드는 법도 배우고, 태그 다는 법, 재생목록 만드는 법 등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영상을 노출시키는가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쉬웠다. 그 시간에 더 많은 요리를 할 수 있을 텐데.


영상을 만드는 것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사진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 게 전부고 영상 편집은 해본 적도 없던 내가 편집 전문 프로그램도 구독료를 내고 다운로드했다. 다른 유튜버들처럼 멋진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 효과를 찾아보고 단계별로 차근차근 알려주는 편집 전문 유튜버들 영상도 보며 배웠다. 일 년을 넘게 만들며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만큼 영상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울 때가 정말 많았다. 편집자 분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영상들은 그래도 훨씬 나았고 덕분에 몇 달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영상을 올릴 수 있었다. 특히나 원하는 게 많은 내 세세한 부탁을 다 받아주신 편집자들에게 항상 감사했다.


아쉬운 영상이 많았다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2만 명이 넘는 구독자 분들이 생겼다. '맛있게 잘해 먹었다.', '영상 참 감사하다. 잘 봤다.'라는 댓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절로 난다. 내 온몸에 펌프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더 해 볼 힘과 용기가 났다. 하지만 '똑같이 따라 했는데 완전 망했다.', '재료가 구하기 어렵다' 같은 후기가 달리면 책임감이 더 커졌다. 내가 만든 것을 믿고 따라 해 주시는 분들의 수고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보다 좀 더 건강하고 싶어서 시도해 본 요리가 잘 안 나와서 혹은 만들 수 조차 없어서 혹시나 실망 하시진 않았을까, 이 경험으로 더 이상 요리를 시도하지 않으시면 어쩌지 하는 안타까움이 들어서였다.


아주 길고 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솟았다 꺼지는 동력을 완전히 잃은 건 작년 가을이었다. 온 세계가 코로나로 잔뜩 움츠린 그 시점에 나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회사 일은 점점 늘어났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고, 시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시간관리를 잘 못하고 계획을 못 짜는 내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 동굴 깊숙이, 어둠에 들어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채식은 내게 싱그럽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것인데 이걸 자본주의에 맞게 껴맞추고 상품화되는 게 싫었다. 그 굴레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고, 뭔가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올려두었다가 주저앉아 버렸다고 해야 하나,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정지한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나를 주섬주섬 끌어 모은  2월쯤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갖쳐있던 나를 풀어   사람과 요리였다. 몹쓸 전염병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는데 이웃들과 왕래하고 요리를 나누다 보니 삶의 원동력을 다시 찾았다. 우리 윗집 이웃(이자 이제는 친구인) 카롤과 루카스가 시작한 Übrig (여분의, 남은)이라는 프로젝트는 소비하지 않으면 이유 없이 버려질 멀쩡한 음식을 모아 누구든 편히 와서 가져갈  있는 카페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돈을  필요 없는  공간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커피와 간단한 주전부리를 제공하는데, 기부 형식으로 원하는 만큼 돈을 내면 된다.  카페 내가 구운 포카치아와 색다르게 만든 독일식 피칸 초콜릿 케이크도 기부하며 온라인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과 소통했다. 눈을 마주 보고 미소를 나누는 작은 순간들이 많아지니 새로운 요리를 하고 싶어 졌다. 그리고 닫혀있던 마음이 조금씩, 결국엔 활짝 열렸다.



그래서 이번 주말 다시 삼각대를 꺼냈다. 오랜만에 켠 카메라는 배터리가 없어서 충전을 해야 했고, 유튜브의 세계에서 멀어져 동면을 취하기 전 마지막으로 촬영했던 스페인식 토마토 밥 요리법 녹화본을 보며 우리 참 열심히 했구나, 남편도 유튜브 채널을 이만큼이나 열렬히 지지해주었구나 깨달았다. 이번 주말 삼각대 뒤에서 당근을 쥐고 나는 다시 새 영상의 구성을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요리법과 안부를 오랫동안 기다려주었을, 요리하는유리 유튜브 채널의 모든 구독자 분들께 어떻게 인사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한다. 싱그럽고 부드럽게,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싶다 - 모두들 건강히,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작가의 이전글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