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n Sep 25. 2023

하는 일이 꼬일 때

비싼 값을 치르고 오게 된 낯선 동네 정읍 탐방기


나름 괜찮다고 하기엔 나쁘지만 감정에 먹힐 정도로 나쁘진 않다. 그걸로 내가 성장하는 중이란 생각이 들어 또 이길만 하다. 이것은 고생한 나의 하루에 대한 평이다.


출장 가는 날, 아침 일찍 몸을 일으켜 3일 치 짐을 짊어메고 역으로 향했다. 무거운 짐 덕에 평소 걸어 다니던 길을 버스를 타고 일찍 도착했다. 역에서 급하게 뛰어가는 대학생들 뒤로 나는 조급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살포시 뛰었다. 그 결과 눈앞에서 문이 닫혔고 아쉽지만, 다음 차를 타고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20분 간격으로 오는 열차를 차분히 기다렸다.


다음에 와야 하는 차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 그때부터 불안이 증폭됐다. ‘아, 아까 눈앞에서 떠난 그 열차를 탔어야 했구나…’ 그 뒤로도 역마다 웅얼거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뭔 이유 때문인지 1분 간, 30초간 정차한다는 말이 여러 차례 들렸다. 점점 초조해졌고 안될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봤다. 빨리 ktx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숙지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메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고 내리고…


놀랍게도 4분 만에 해당 플랫폼에 도착했다. 아직 기차가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은 닫혔고 스르륵 속도를 내더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멘붕. 예견했지만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선 역에서 나를 픽업하기로 한 직원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나는 다음 차를 타기 위해 표를 알아봤다. 바로 다음 차는 최소 3시간 뒤에 있다. 그마저 현재 있는 역이 아닌 다른 역. 땀으로 축축해진 셔츠를 쓰다듬으며 이동했다.


도착한 용산역은 쾌적했다. 정처 없이 걷다 벤치에 앉아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맑고 밝게 부서지는 햇살을 느꼈다. 힘든 오전 시간을 위로해 주듯 조금 힘이 생겼다. 세 시간 동안 슬로우 라이프를 살듯 샐러드 한 그릇을 토끼처럼 냠냠 먹고 햇살 아래 쉬었다. 예상치 못한 자극의 크기보다 한 숟가락 더 큰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정읍행 열차를 탔다. 앞으론 미리보다 미리 나서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왜 ”미리“가 아닌 ”미리미리 “인지 몸소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정읍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도 막막하다. 출장지까지 대중교통으로 3시간이 걸리는데 그중에 1시간 20분이 도보다. 심지어 숲길. 가지 말라는 거겠지? 욕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이 와중에 정말 감사한 건 차를 타고 온 직원이 저녁에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 3시간 동안 나는 뭘 해야 잘했다고 할지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나 이내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것보다 시원한 바람이 필요함을 인지했다. 텀블러에 챙겨 온 물 한 컵은 진작에 땀으로 다 배출됐으니까.


카페를 찾아 걷는 길, 두 번의 기차요금과 긴 대기 시간과 이미 얇아진 연골과 어깨 뭉침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오게 된 낯선 동네 정읍은 내 이미지와 달랐다. 쌍화차, 구절초, 벚꽃길로 정돈된 작은 마을이란 느낌은 조금만 벗어나면 죽어있었다. 한쪽은 불 꺼진 채 오래 방치된듯한 건물이 즐비하고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쪽에는 붉은색 변기와 보일러기름 통이 길가에 줄 서있어 완전한 시골동네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약간 놀란 지점은 탈 것과 전신주 전선 위에 앉은 짹짹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 간에 말소리가 없었다. 걷기만 해도 너무 더운 이 지역에 뭔가 어둡고 답답한 공기가 둘러싼 듯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보이는 담벼락은 나를 환기시켰다. 오늘 하루에 대해 얼마든 분노할 수도 있었겠지만 남에게 엉뚱하게 감정 분출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나름 괜찮다고 하기엔 나쁘지만 감정에 먹힐 정도로 나쁘진 않다. 그래,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선 내려놓고 현재를 즐기는 것, 책에서 가르쳐주던 것들을 어느새 실천하고 있었다. 뿌듯.


예기치 못한 정읍이란 동네를 만난 오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잼 동네이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머리를 비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한 듯하다. 어서 벗어나고 싶지만 백양사로 가는 열차도 생각보다 늦게

타게 됐다. 정말. 다 안 되는 거 같고 다 꼬이는듯한 하루를 버티는 방법은 내려놓는 것뿐이다.


엊그제 프로그램 중에 나를 놀라게 했던 일화를 마지막으로 기록하며 나도 어서 도착하길.


숲해설을 들으며 만났던 나무 중에 자신과 닮은 나무를 그려보고 그 이유를 적어보는 시간. 유난히 걱정의 단어를 많이 쓰던 10대가 칡을 그렸다. ‘하는 일이 꼬일 때가 많아서’라는 이유와 함께. 그리고 롤링페이퍼처럼 돌려가며 해당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게 하였다. 칡을 그린 친구의 종이를 받아 든 또래 아이가 쓴 말이 인상적이었다. ‘꼬이는 일이 많아도 너는 할 수 있어’

이제 그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날리자고 했다. 칡을 그린 아이는 바람 불어서 잘 안될 거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바람이 불기 때문에 더 잘 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 아이의 비행기는 오랫동안 바람을 타고 날랐다.


작가의 이전글 자꾸 퇴사를 막는 이유가 뭔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