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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슬리 보홀 Dec 25. 2016

<월간 보홀> 12월호

#괜찮아, 보홀이야

#괜찮아, 보홀이야


 퇴근한 그녀와 종로에서 만났다. 즐겨가던 노포에 앉아 늦은 저녁과 소주를 마셨다. 나는 일이 어땠냐고 물었고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비웠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는 그림을 그리지만 원했던 직업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요즘, 빨리 취업해서 다행이라며 직장이 있는 서울에 작은 집을 얻었고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들과 마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보홀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울과 보홀에서 장거리 연애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요 며칠은 내가 한국에 머물러 그녀의 퇴근 시간마다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한숨을 쉰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청춘의 한숨은 누가 들어도 순탄치 않다. 사회에 대한 열망이 실망이 되고 신뢰가 배신이 되는 세상사는 누구나 같았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 마시는 술맛이 좋았다. 아니, 이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던 늘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내가 한국에 있거나 그녀가 보홀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결국 나는 말했다. 보홀을 함께 여행하지 않겠냐고.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비웠다.


 사실 나조차 그동안 보홀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래 머물렀을 뿐 늘 일에 비해 내 수입은 일정치 못 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내 삶의 여행을 멈추기 싫었다. 멈춰 돌아간 한국에서의 삶을 감당할 자신도, 능력도 없었다. 차라리 버티는 삶보다 불안의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떨어져 있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정말 쥐뿔도 없는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말했다. 물론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확답을 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얄팍한 자존심과 허세가 뒤섞인 그 말을 꺼낸 지 일 년이 지나고서야 우리는 결국, 보홀에서 만났다. 그녀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에 작은 집을 뺐다. 그리고 그동안의 그림과 퇴직금만 들고 보홀로 왔다. 우리는 바다와 멀지 않고 노을빛이 보기 좋은 집을 얻었다. 그녀의 두 번째 집이었다. 나와 그녀는 앞으로 함께할 여행에 들떠 있었다. 게다가 드디어 장거리 연애가 끝났다. 이제 '보고 싶다'는 말과 저녁마다 붙들고 있던 전화 통화와 문자도 멈췄다. 그렇게 우리는 보홀에서 마주 보며, 어떤 이야기를 하던 늘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었다.


 나와 그녀는 며칠 동안 정신없이 보냈다. 내가 일을 쉬는 날이면 함께 시내에 나가 필요한 물건을 사고 저녁거리를 고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오가며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렇게 살자, 아냐 저렇게 사는 게 더 좋을 거야.',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같은 말들은 우리의 앞 날을 더욱더 설레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홀의 생활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줬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한국과 다르기에 이해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홀에서 해야 하고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먼저 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험 없이 보홀에서의 삶에 조금씩 만족하는 것 같았다.


 여행의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평소보다 더 잘 먹었고, 잘 잤다. 그리고 더 잘 놀았다. 그동안 뜸했던 노을도 다시 찾게 됐고 한동안 가보지 못 했던 곳에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믿었다. 내가 바다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보홀에서 꼭 필요한 오토바이 운전도 빨리 배워 제법 잘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벌써 손수 시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한다. 그러다 내가 바다에서 나오면 집에는 따듯한 밥 내음이 진동한다.


"왔어? 오늘도 고생했어. 더웠지? 곧 다 되니까 저녁 먹어요."

 오늘의 해가 지고 노을빛이 물든다. 그리고 우린 식탁에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하루 중 온전히 우리만을 위한 시간이다. 그녀와 천천히 하루를 나누며 함께하는 저녁의 행복은 우리의 여행에서 매일 다른 노을빛과 같았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보홀을 함께 여행하자고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부족했지만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느 여행이든 늘 맑은 날만 있지 않다. 가끔씩 사소한 말과 작은 행동으로 서로를 섭섭하게 만드는 날도 있었고 상처를 주기도 했다. 물론 장거리 연애 중에도 있는 일이었지만 하루하루를 함께하는 시간은 달랐다. 그리고 몰랐다. 그런 작은 일들이 서로의 마음에 쌓이고 오해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작은 오해가 큰 다툼으로 번지자 그녀의 눈이 깊게 젖었다. 그리고 힘들다고 했다. 가족이 보고 싶다고. 친구가 그립다고. 아직 보홀의 날씨도, 생활환경도 답답하고 적응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걱정할까 봐 씩씩한 척했지만 이렇게 다툴 때마다 나쁜 마음만 물든다고 한다. 나는 정말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동안 나는 그녀가 누구보다 이곳에 빨리 적응하고 행복해 보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나는 나의 목적지로만 향했을 뿐이다.


 그럴 만도 했다. 나의 보홀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 나는 벌써 오랜 시간 머물렀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을 뿐이다. 이곳에 나의 일이 있고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까지.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와 함께 하는 것뿐이었고 결국 충족됐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이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나와 함께하는 것은 시작일 뿐, 다시 자신의 일을 만들어야 했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의 발걸음을 맞추며 적응할 수 있는 개인의 시간까지.


 이런 곳에 그녀가 자신의 일과 집을 버리고 왔지만 나는 그 무엇도 해준 게 없었다. 그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이번 여행을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나는 그 행복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그녀를 위한 것인지도 구분할 재간이 없다. 내가 행복하다면 그녀도 행복하겠지. 그리고 우리가 행복할 거라 생각한 나는, 아직도 어리석고 서툴렀다.


 사실 그런 '우리'를 나누어보면 나와 그녀로 나뉜다. 그중 나는 보홀을 오랜 시간 여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중간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보홀의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지만 아직도 여행할 곳이 남았다. 이대로 함께 여행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내 발걸음에 맞추며 웃겠지만 어느 순간 지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춘다면 내가 지칠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그녀와 천천히 가면 됐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여행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을 망칠 수 없지 않은가. 이 여행은 지금까지 어떤 여행보다 빛날 것이며 각자의 삶에 스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다. 세상을 보는 것. 사랑하는 것. 모두 떠나야지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여행'을 삶의 가장 큰 학습으로 여겼다. 그리고 나는 다시 떠난다. 그녀와 함께할 보홀의 여행을.


 그렇게 울고 불며 싸운 날, 우리는 지쳐 침대에 누웠다. 다시 하루는 지났고 우리의 감정은 서로에게 닿았다. 내가 말했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동안 나의 여행을 위해 애써 웃어준 그녀에게. 그리고 이제는 나의 여행이 아닌 '우리'의 여행을 시작하자고 말했다.

"그럼 같이 출발 할 거야?

그녀가 물었다.

"응. 괜찮아. 보홀이잖아."




#필리핀은 산미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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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에 있는 어느 바에서 산미구엘을 마셨어요. 필리핀이 그리운 날이었거든요. 한 모금에 잠시 따듯한 보홀에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렇게 여행은 어디서든 떠날 수 있어요.  


 제가 바다에 있을때 그녀는 보홀을 그립니다. 이 그림을 가장 먼저 그렸으니 아마도 가장 좋아하던게 아니었을까요. 저희가 쓰고, 그리고 찍은 보홀을 나누고 싶어요. 보홀에서 그녀와 함께, 여행하며 시작한 블로그.

                                           

 먼쓸리- 보홀 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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