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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l o a n Nov 10. 2017

엄마의 준비

09 NOV 2017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햇살이 좋은 오후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벌써 외출복을 입고 식탁앞에 앉아서 설겆이 하는 아빠랑 얘기를 하고 있다.


"엄마, 병원은 이따 저녁때 아니야?"

"응, 오늘 컨디션이 좀 좋아서 밖에 나가 보려고. 밥솥 밥이 잘 안된다고 하는 데, 아무래도 파킹이 오래된 것 같아서 새로 사려고. 상왕십리역 근처에 있대. 버스 타면 한 번에 가니까 갔다가 병원 들려서 피검사 하고 집에 올게. 이따 외래 너무 늦어서 미리 다녀오는 게 낫겠어."

"같이 갈까? 근데 나 지금 좀 피곤하긴 한대..."

"뭘 같이가. 그냥 쉬어. 이따 외래 같이 가고"

"응, 그럼 조심히 다녀와. 그럼 나 좀 쉬었다가 머리하고 이따 외래는 같이 가자."


밝은 목소리로 집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그리고 저 경쾌한 걸음이란.

맘같아선 같이 가고 싶었는 데,

거울을 보니 미용실도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고,

사실 내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일단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

.

.


"엄마, 어디야?"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병원 외래에 먼저 왔어. 힘들어서 집에 못 가겠어서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밥은 먹었어?"

"아니, 배 안 고파. 누워 있을 게."

"지금 갈게"

"아니야, 뭘 와. 그냥 쉬어"

"죽 사서 갈게. 차 막히니까 좀 기다려"

"그래 그럼."


집에 오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 데 연락이 없길래 전화해봤더니 다 기어가는 목소리의 엄마.

죽을 포장하고,

동생이 운전해서 같이 가는 데 차가 너무 막혀서 병원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다.


"엄마-"

"왔어?"

외래 소파에서 누워있는 엄마를 일으켰다.

한 때, 박씨부인보다도 더 기운찼던 우리엄마는 어느 새 한줌의 병아리가 되었다.


오늘 모르는 길을 다니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하시며

따뜻한 죽을 넘기신다.

아, 맛있다. 아, 따뜻하다. 속이 다 시원하다. 아 맛있다를 연신 내뱉으며

엄마가 환히 웃으며 죽을 드시는 데 너무 곱고 이뻐서 속으로 눈물이 났다.


"상왕십리역에 가면 다 되는 줄 알았는 데,

길도 다 바뀌고 무슨 일본에 간 거 같은 느낌이었어.

길을 물어 물어 걸었는 데, 나중에 보니까 택시 탈 거리더라고.

엄마가 이제 기운이 딸려서 오래 못 걷는 데, 오늘 한 두시간쯤 걸었어.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는 데 나도 모르게 넘어졌었어."

"어?!!! 넘어졌다고? 넘어지면 안돼!"

"그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 다리가 내 맘대로 안 되서 그냥 털썩 주저 앉은거야."

"엄마, 안돼 이제. 무조건 택시타고 다녀."

"에이 무슨 택시야. 그냥 버스 살살 타고 다니면 되지."

"절대 안돼, 택시타 무조건. 내가 준 카드 그거 교통비 10% 할인이니까 무조건 택시타."

"어머, 그러니? 어떻게 그런 카드가 있니?"


.

.

.


진료실안에서 엄마는 더 작아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고 차가운 교수님은 간결하게 검사결과를 설명해주시고

안타까움을 약간 표시하시며.

빅뉴스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이 내려 앉았다.

"아직 쓸 수 있는 약이 있나요?"

순수한 눈빛으로 창백한 얼굴의 엄마가 귀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아, 그럼요. 아직 네 다섯개 더 남았어요. 머리 다시 빠질 건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이 약은 손발저림이 있는 데, 괜찮을까요?"

"손이 다시 따뜻해졌어요. 괜찮아요." 엄마가 발개진 손바닥을 내어보이며 밝게 웃는다.


.

.

.


진료실을 나서며

내가 엄마한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아쉽긴 하다, 조직검사에서 호르몬 수용체라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항암할 수 있으니 너무 다행이다, 너무 좋다-.

근데 뭐랑 뭐가 없다는 데, 그건 옛날에도 없다고 그러더니 운동하니까 다시 생기더라고.

항암제를 오래 썼으니 걔네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지.

다시 기운차려서 운동하면 걔네들 또 살아날꺼야. 운동해야지.

아까는 상왕십리 거기서 길을 헤매는 데

90세 먹은 할머니가 김장 걱정을 하면서 옆을 지나갔어.

꼬부랑 할머니인데, 그 할머니가 부럽더라고.

내가 어쩌다 저 할머니를 부러워하게 되었나...하다보니 길 걷다가 그냥 눈물이 나서 길에서 좀 울었어"

"아니 또 지금은 왜 울어. 울지마. 울면 기운 빠져. 그리고 다시 기운 내려면 한참 시간걸리잖아. 힘드니까 울지마. 근데 말야, 엄마는 정말 90까지 살고 싶어? 어휴, 난 90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도 잘 생각해봐, 20년도 더 넘겨야 하는 거야."

"하하 그런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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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그렇게 둘이서 내과 외래에 앉아서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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