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NOV 2017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햇살이 좋은 오후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벌써 외출복을 입고 식탁앞에 앉아서 설겆이 하는 아빠랑 얘기를 하고 있다.
"엄마, 병원은 이따 저녁때 아니야?"
"응, 오늘 컨디션이 좀 좋아서 밖에 나가 보려고. 밥솥 밥이 잘 안된다고 하는 데, 아무래도 파킹이 오래된 것 같아서 새로 사려고. 상왕십리역 근처에 있대. 버스 타면 한 번에 가니까 갔다가 병원 들려서 피검사 하고 집에 올게. 이따 외래 너무 늦어서 미리 다녀오는 게 낫겠어."
"같이 갈까? 근데 나 지금 좀 피곤하긴 한대..."
"뭘 같이가. 그냥 쉬어. 이따 외래 같이 가고"
"응, 그럼 조심히 다녀와. 그럼 나 좀 쉬었다가 머리하고 이따 외래는 같이 가자."
밝은 목소리로 집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그리고 저 경쾌한 걸음이란.
맘같아선 같이 가고 싶었는 데,
거울을 보니 미용실도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고,
사실 내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일단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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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디야?"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병원 외래에 먼저 왔어. 힘들어서 집에 못 가겠어서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밥은 먹었어?"
"아니, 배 안 고파. 누워 있을 게."
"지금 갈게"
"아니야, 뭘 와. 그냥 쉬어"
"죽 사서 갈게. 차 막히니까 좀 기다려"
"그래 그럼."
집에 오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 데 연락이 없길래 전화해봤더니 다 기어가는 목소리의 엄마.
죽을 포장하고,
동생이 운전해서 같이 가는 데 차가 너무 막혀서 병원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다.
"엄마-"
"왔어?"
외래 소파에서 누워있는 엄마를 일으켰다.
한 때, 박씨부인보다도 더 기운찼던 우리엄마는 어느 새 한줌의 병아리가 되었다.
오늘 모르는 길을 다니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하시며
따뜻한 죽을 넘기신다.
아, 맛있다. 아, 따뜻하다. 속이 다 시원하다. 아 맛있다를 연신 내뱉으며
엄마가 환히 웃으며 죽을 드시는 데 너무 곱고 이뻐서 속으로 눈물이 났다.
"상왕십리역에 가면 다 되는 줄 알았는 데,
길도 다 바뀌고 무슨 일본에 간 거 같은 느낌이었어.
길을 물어 물어 걸었는 데, 나중에 보니까 택시 탈 거리더라고.
엄마가 이제 기운이 딸려서 오래 못 걷는 데, 오늘 한 두시간쯤 걸었어.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는 데 나도 모르게 넘어졌었어."
"어?!!! 넘어졌다고? 넘어지면 안돼!"
"그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 다리가 내 맘대로 안 되서 그냥 털썩 주저 앉은거야."
"엄마, 안돼 이제. 무조건 택시타고 다녀."
"에이 무슨 택시야. 그냥 버스 살살 타고 다니면 되지."
"절대 안돼, 택시타 무조건. 내가 준 카드 그거 교통비 10% 할인이니까 무조건 택시타."
"어머, 그러니? 어떻게 그런 카드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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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안에서 엄마는 더 작아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고 차가운 교수님은 간결하게 검사결과를 설명해주시고
안타까움을 약간 표시하시며.
빅뉴스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이 내려 앉았다.
"아직 쓸 수 있는 약이 있나요?"
순수한 눈빛으로 창백한 얼굴의 엄마가 귀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아, 그럼요. 아직 네 다섯개 더 남았어요. 머리 다시 빠질 건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이 약은 손발저림이 있는 데, 괜찮을까요?"
"손이 다시 따뜻해졌어요. 괜찮아요." 엄마가 발개진 손바닥을 내어보이며 밝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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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을 나서며
내가 엄마한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아쉽긴 하다, 조직검사에서 호르몬 수용체라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항암할 수 있으니 너무 다행이다, 너무 좋다-.
근데 뭐랑 뭐가 없다는 데, 그건 옛날에도 없다고 그러더니 운동하니까 다시 생기더라고.
항암제를 오래 썼으니 걔네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지.
다시 기운차려서 운동하면 걔네들 또 살아날꺼야. 운동해야지.
아까는 상왕십리 거기서 길을 헤매는 데
90세 먹은 할머니가 김장 걱정을 하면서 옆을 지나갔어.
꼬부랑 할머니인데, 그 할머니가 부럽더라고.
내가 어쩌다 저 할머니를 부러워하게 되었나...하다보니 길 걷다가 그냥 눈물이 나서 길에서 좀 울었어"
"아니 또 지금은 왜 울어. 울지마. 울면 기운 빠져. 그리고 다시 기운 내려면 한참 시간걸리잖아. 힘드니까 울지마. 근데 말야, 엄마는 정말 90까지 살고 싶어? 어휴, 난 90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도 잘 생각해봐, 20년도 더 넘겨야 하는 거야."
"하하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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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그렇게 둘이서 내과 외래에 앉아서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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