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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l o a n Jan 15. 2022

글로 써야 남는 기억

APR 2 2020


긴 하루를 보내고 와인 한 잔 하고

이제 자야겠다 싶어서

침대에 엎드려서 막내랑 문세윤 관련 동영상을 카톡으로 나누면서 깔깔대다가

이를 닦으러 욕실에 들어섰다

갑자기 욕실 블루투스 스피커에 흘려 나오는 김광진의 편지.

문세윤이 복면가왕에서 부르던 '처음 느낌 그대로'가 유투브 자동재생 프로그램에 의해

김광진과 이소라가 96년도 이소라 프로포즈에서 '처음 느낌 그대로'를 나눠 부르던 동영상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 곡이 김광진의 '편지' 였다

-

김광진의 편지만 들으면

몇 해전 퇴근 길 만원버스에서 귀청이 떠나가라 이어폰 볼륨을 올렸던 그 날이 떠오른다.

곡을 반복해서 몇 번을 들으면서 괜히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끄적이면서 결심을 했던 날

그 감정이 너무 또렷하다.

그 날이 며칠인 지, 계절이 언제 였는 지 정확히 숫자로는 기억하지는 못하는 데

그 날 버스 어디쯤 앉았었는 지, 그 날의 버스의 습도가 어땠었는 지 , 그 날 내 대각선에 앉았던 아저씨의 머리 모양까지 기억이 너무나 또렷하다.

그리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었는 지도..

-

오늘 외래 대기실에서도

뭔가 글을 끄적이려고 들어갔던 웹사이트에서

몇 개 안 되는 예전에 쓴 글 들을 읽어보는 데

몇 년 그 글들을 썼을 때의 그 느낌이 너무나 또렷해서 놀랐다.

그 날 그 오후의 햇살, 그 피곤함 그리고 대화를 나눴던 그 장소, 그 동작 하나하나,

너무나 어제일 같이 또렷해서

글로 남기는 기록이 얼마나 인간의 기억력을 끌어낼 수 있는 지,

글의 힘이 너무나 무서우면서도

혹 내가 더 많이 쓰고 남겼다면 어땠을 까,

아쉬운 순간들이 더 나의 것이 되고 내가 그걸 계속 오래 남기고 새겼을 까

아니면 그 감정이 너무 흔해져서, 오히려 거기에 무감각해졌을 까

-

일 년에 한 두 개 밖에 쓰지 않았던 기억이라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관심사가 중구난방인 내가 일 년에 몇 번, 글이 쓰고 싶을 때 짧게나마 하나에 집중하는 그 시간을 내가 더 오랫동안 기억하는 거 일 수도

-

암튼, 요즘 짤막하게 생각나는 것들이 많은 데

잊기 전에 많이 써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기억들도 더 잊기 전에 최대한 자세하게 써두고 싶고.

소소하게 이것저것을 잘 기억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는 데 그래도 가끔 또렷한 느낌들이 아직 많이 있다,

감각이 예민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글로 많이 남겨서  그 감각들을 오래 갖고 싶다,

왜 글로 써 두면 감각들이 더 살아나는 지 그게 너무 신비롭고 그리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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