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언젠가 수능시험대비문제집을 풀다가 이런 지문을 본 적이 있다. "황순원 작가의 소설 「소나기」에서 '보라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해답지 아래 적힌 해설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보라색은 비극을 암시하는 극적 장치라고. 수능시험을 치르고 난 뒤, 황순원 작가의 오래전 인터뷰 기사를 보기 전까지 그것을 정답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러나 작가의 인터뷰는 우리시대 고3 수험생들이 도서관에서 보낸 많은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보라색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냥 보라색을 좋아해서요." 그렇다고 우리시대 고3 수험생들은 모두 오답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 이후는 온전히 해석자에게 떠넘겨진다. 해석자가 비극을 암시하는 극적 장치로 보았다면, 그것은 정답이다. 이 해석 하나가 정답이라 말하는 것이 오답이다. 그러니 학생이 아니라,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자신하며 문제를 낸 제출자가 틀렸다.
여행은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사람의 삶을 마주하는 일이다. 모든 삶에 정답은 없다. 정답 없는 삶과 삶이 만나는 일이 여행이다. 그러니 여행에도 역시 정답은 없다. 어떻게 여행지를 해석하는가는 전적으로 여행자의 몫이다. 때론 독선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여행자가 가진 뚜렷한 한계다. 이 한계가 또다른 여행을 위한 동력이 된다. 여행의 역학. 책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의 저자 변종모는 여행의 역학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은 작가다. 변종모 작가는 여행지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여행지를 해석하고, 그 속에 여행자로 선 자신을 분석한다. 그 모든 감상을 글로 적어 넣는다. 책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는 변종모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모아놓은 수필집이다. 그의 감상은 정답을 강요하기 보단 여행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독자에게 정답이 아닌, 여행의 영감을 불어넣는 책. 작가의 개인적 감상에서 시작된 영감은 독자가 보다 풍성하게 여행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나의 손을 잡고 모든 풍경과 사람들을 스치며 내가 내 속을 걷는 일 여행……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중에서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만이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있다. 고된 일상을 내려놓고 쉬는 일이라든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일,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떠나게 되는 일. 무수히 많은 여행자가 개인적으로 만들어놓은 여행의 의미들은 여행을 여행이란 단어 속에서 끄집어 낸다. 여행은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우리에게 시처럼 다가온다. 때론 함축적이고, 화려하며, 또 담백하고 평온하게 말이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는 변종모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 여행은 모든 풍경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이 책은 작가가 전세계 18개의 도시를 풍경 삼아 자신을 발견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의 사진은 멋진 풍경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가장 닮은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으리라. 사진 속 풍경은 광활하지만 쓸쓸하고, 혼자이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은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의 여행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독자에겐 한 편의 시가 되어 다가간다. 어떤 독자는 자신과 닮은 작가의 마음에 공감하기도 하고, 어떤 독자는 작가의 생각을 재해석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의 책에서 여행은 또 하나의 시가 된다.
변종모 작가의 여행은 결국 자기 자신과 하는 데이트다. 낯선 장소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한발씩 내딛는다. 그의 여행은 생각보다 도전적이지 않다. 생경한 여행지를 여행한다고 해서 모두 강한 여행자는 아니다. 오히려 나약한 인간이야 말로 더 깊고 낯선 장소로 향하기 마련이다. 강한 인간은 구태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강한 인간은 굳이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어갈 일이 없다. 그러니 구석진 여행지를 찾은 인간이야 말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에 등장하는 18개의 도시 중 대부분이 지도상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여행지라는 것을 보면 그는 한없이 나약하고 흔들림이 많은 사람이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는 첫 꼭지에서부터 자신의 여행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한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글에서 등장하는 모든 변명들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 스스로 설득하고 변명하며 여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 여행작가가 자신의 여행을 구태여 변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변명은 자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것이 그렇다. 자신을 긍정하고 합리화하는 일의 연속이다. 변종모 작가의 변명은 여행에서 마주한 자기 자신을 끌어안기 위한 노력이다. 그의 노력은 독자들의 삶에 대한 변명을 대변한다. 대신 변명해주고 기꺼이 울고, 웃는다. 그래서 독자도 그와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 그의 구구절절한 변명은 작가와 닮은 삶을 사는 독자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
황순원의 인터뷰를 본 뒤, 「소나기」를 다시 읽었다. 보라색은 때론 우울함으로 읽혔고, 때론 아름다움으로 읽히기도 했다. 소설은 그제서야 문제가 아닌 소설 그 자체로 다가왔다. 황순원 작가가 보라색의 의미를 멋지게 포장해 알려주었다면, 지적 카타르시스는 있겠지만 소설을 두 번 볼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라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소나기」가 서사 곳곳에 숨겨진 단서를 찾아야 하는 추리소설이었다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시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는 다르다. 사랑은 가끔 무의미한 일을 하게 만든다. 무의미한 일들이 모여 어떤 사람에겐 유의미한 감정이 된다. 무의미로 가득 찬 것이 사랑이고, 삶이다. 다만, 그것을 해석하는 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이 곧 사랑이 되고 삶이 되는 것이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는 유의미한 변명과 사색으로 지어진 책이다. 그것들이 여행이 되고, 사랑이 되고, 자기 자신의 의미가 되는 것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이 변명들이 어떤 의미를 지녔다 믿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책에 고스란히 실려 독자에게 전달된다. 독자는 흔들리는 삶에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받는다. 이 모든 것이 변명이라면 변명, 합리화라면 합리화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해석하는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변종모 작가는 여행을 독자의 것으로 넘겨준다. 마음껏 여행하고, 자주 자신을 마주하고, 실컷 울어 보라고 말이다. 그의 여행은 다시, 당신에게로 향하고 있다.
현재의 나를 잠시 두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게 되는 나를 잘 다스리는 일. 그런 나를 데리고 와서 여행을 추억하며 살아야 할 일. 좋은 것들을 좋은 마음으로 만났으니 좋아지는 삶. 이것을 믿는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중에서
글│아트래블 편집부
사진│변종모-출판사 자음과모음 제공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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