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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am Sep 20. 2023

사진은 날렸지만 추억은 남았지

20230920

우선 그때 그 엄청난 충격을 잘 극복하고, 마음을 온전히 치유하여, 평상심을 유지한 상태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글로 남기고 있는 나자신을 대단히 치하하는 바이다.


때는 지난 9월 10일 새벽, 지금으로 부터 딱 열흘 전의 일이다.

내 휴대폰엔 1000여 개의 동영상을 비롯, 무려 2만 8천여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물론 그 중의 10%정도는 진작에 정리했어야 할 쓸데없는 사진이었을 것이나, 90%는 소중한 내 아이들을 담은 사진이었다. 휴대폰의 저장 용량이 늘어 하루 이틀 백업을 미루다 무려 2년 넘게 나는 백업을 하지 않고 휴대폰에만 사진을 두고 있었다. 실제로 휴대폰의 무게가 무거워진 것은 아니겠으나, 용량이 들어차면서 휴대폰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고(아마 백업에 대한 마음의 부담때문이었으려나) 드디어 백업을 결심했다. 휴대폰을 바꾸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 새로운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면 세 살 아가와 수준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정도로 기계치인지라 백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백업을 안 하는 2년여 동안 뭐가 바뀐 걸까? 컴퓨터에 휴대폰을 연결하면 바로 되는 줄만 알았는데 이상한 프로그램이 구동되고 내가 모르는 용어들로 얼럿창이 뜨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했고, 바로 SOS신호를 보냈다. 상대는 컴퓨터 전문가여야 했었다. 하지만 우리집에 그런 사람은 없는 관계로 급한대로  IT업계에 종사는 했는나 컴퓨터는 잘 모른다는 연 모씨를 소환했다. 그렇다. 내 남편이다.


남편은 지금까지 백업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냐는 약간의 잔소리와 함께 백업을 도와주었다. 내 예상과 달리 그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에 나는 외장하드를 그에게  완전히 맡기고 졸려하는 아이들을 재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완전히 믿었다. 나보단 낫겠지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쌔한 기운과 함께 그가 나를 찾아 왔다. 휴대폰을 건네며 사진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은 2000여장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한 자리가 빠진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2만여장이 그대로 있는 줄만 알고 "잘 있는데?" 했다. 그런데 그때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으로 알았다. 다시 확인해보니 2만이 아니라 2천. 헉 90%이상이 없어졌다. 

백업은 되지 않았는데 사진은 사라졌다. 어디 숨었나 싶어 컴퓨터와 외장 구석구석을 뒤져보았지만 흔적도 없다. 그렇게 아이들의 사진은 사라져버렸다. 허무하게도 한 순간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아홉 살, 여섯 살 내 딸들이 깨어 그 현장을 보았다면 엄마가 아니라 자신들의 동생이 생겼다고 해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너무나도 슬펐다. 

남편은 말했다. 뭐라고 했을까?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을 거라고?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진작에 백업을 했어야지."


그렇다. 그는 T이다 극T다. 파워T다. 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다니. 

남편의 말을 듣고 더 서럽게 울었다.


그날 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은 코골고 잤다. 속편한 모습을 보면 믿기 어렵겠지만 날린 사진 속 주인공은 그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새벽 내내 깨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날 밝는대로 복구사이트에 연락해봐야지. 어떻게든 복구해야지. 

그리고 9시 땡하자 마자 복구사이트로 전화를 걸고 내가 어떻게 사진을 날렸는지 설명하였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복구하기 어려울 거란 답변. 게다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휴대폰을 맡기냐고 업체에 맡기는 복구는 안하는 게 좋겠다는 T남편의 부연설명. 


난 아침에 다시 한 번 울었다. 이유는 진짜 슬퍼서. 사진이 남는 거라는 말, 난 정말 동의한다. 아이들 사진은 내 노후를 위한 준비였다. 지금은 바쁘지만 나중에 할머니 되면 아이들 사진 보며 힐링해야지 하며 사소한 순간들도 참 많이 남겼다. 그런 사진이 없다. 이제 더이상. 


아이들이 순차로 일어났다. 슬퍼하는 나를 보며 이상하게 여긴 재인이가 묻기에 연유를 설명했다. 

돌아온 대답은? 엄마, 괜찮아. 다시 좋은 추억 만들면 되지? 이런 따듯함 뚝뚝 묻어나는 대답? 천만의 말씀. 재인이는 이렇게 말했다.


 "인스타그램에 있는 건 남은 거지?" 

그렇다. 재인이도 T다. 

재인이 눈에 슬픈 나는 안보이는 거 같아. 


다행히 나를 쏙 빼닮은 둘째 아인이가 일어났다. 그녀는 F 나를 닮아 파워F. 아인이에게 엄마가 슬픈 이유를 설명해주니 아무말도 안한다. 


그냥 나를 꼭 끌어 안는다. 

작은 품에서 나는 큰 위로를 느꼈다. 

그렇지, 이것이 진정 F들을 위로하는 법이란다. T들아.


아인이의 포옹 때문일까? 나는 속상함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

아이들과 어린이 미술전시를 보기로 한 날이다. 2년여의 시간을 담은 사진을 날린 건 너무너무 아쉽지만 내겐 오늘도 소중하다. 슬퍼하고만 있기엔 나의 오늘이 너무 귀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기운 차리기로 결심했다. 


사진은 사진이고, 오늘은 오늘이니까. 


지난 날도 소중하지만 지금, 그리고 다가올 날들이 100배는 더 중요하니까 나는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많이 울어 머리는 아프지만 예정대로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사진이 대수인가 싶지만, 사진 중요하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기에 사진이 그 모자람을 채울 수 있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느낌과 감정에 사진은 총천연색 색을 입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날린 사진은 날린 거고. 난 지금부터라도 더 열심히 사진찍고 기록하려고 한다. 


"2배로 열심히 추억을 만들거야. 

데이터 상태로 오래두지 않고 고르고 편집해 하드카피로 출력도 하고 책도 만들거다. 

그렇게 손에 잡히는 추억으로 만들거다" 라고 결심하고 하니 나는 기운이 났다. 


목표가 생기면 씩씩해진다. 


사진 속에 있던 모든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기억하는 게 10분이 1도 안될 거 같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지만 그 속상함이 내 지금을 잠식하게 두진 않으려고 한다. 후회말고 결심과 계획으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씩씩하게.


여튼 나는 그날 이후, 인스타그램에 매일매일의 아이들을 남기고 있고,

중단했던 아이들 책만들기를 다시 시작했으며

그날 그날의 대표 사진 1장을 골라 사진 일기로 남기고 있다.


사진을 날리지 않았다면 이런 의미있는 기록은 하지 않았겠지?

라고, 초특급 긍정에너지를 내보며 이 글을 마친다.


미래의 나야, 나중에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사진을 날린 덕분에 아이들의 아름다운 순간들 담은 책을 여러 권 만들 수 있었지." 하며 흐뭇하게 미소짓길 바란다.


그리고,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꼭 정기 백업을 생활화 하세요!

데이터를 믿지 마세요. 일부는 하드카피로 만들어두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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