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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Oct 12. 2023

정답으로 가득한 삶이 갑자기 싫어진 날

<리스본행 야간열차> 독서모임1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리고 언어


이번 주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그룹이 같은 날 시즌을 시작했다. 오프라인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온라인은 <단편책담 - 여행> 중 그림 형제 동화 <세 가지 언어>를 읽고 토론했다.


오래된 이야기 중에 정체성과 언어의 관계를 교육의 문제로 풀어낸 동화가 있을지 궁금해서 찾다가 발견한 동화가 <세 가지 언어>인데 이 동화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익혀야 하는 언어 세 가지를 각각 개, 새, 개구리라는 상징으로 나타낸다. 하나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에 필요하고 생계와 관련되며 두 가지는 자기와의 대화에 필요한 언어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우울의 원천이 될 수도 있고 상승 작용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는 동물의 비유와 각 언어를 듣게 되는 상황이 아주 적절하게 배치돼 있어서 개인의 창작이 아닌 민담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세 가지 언어>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교육과 억압을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을 사용하면서 아버지가 원했던 모습보다 더 높은 것을 성취해 내고야 만다. 이 동화를 읽다 보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대화와 내적 동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에서도 언어가 중요한 화두다.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시도를 해 봄으로써 인생의 전환을 시도하는 그레고리우스라는 57세 언어학자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쓴 프라두라는 작가를 찾아 리스본으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인 라틴어를 너무나 사랑한다. 반박도 할 수 없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분명하게 정답이 정해져 있는 언어-라틴어에 능통한 그레고리우스는 별명도 그에 걸맞게 파피루스다. 그레고리우스는 논쟁도 적응도 도전도 싫어하고 내면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포와 그런 자신에 대한 실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레고리우스라는 사람은 높은 자부심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살아가지만 어린 시절 해결하지 못한 열등감과 공포의 문제를 끌어안은 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분노와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모순적 성숙을 상징한다. 어린 제자와 학교의 동료들에겐 존경을 받지만 가장 가까웠어야 할 아내에겐 거듭된 실망만 안기다 이혼한 남자, 그렇지만 헤어진 아내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그 남자는 왜 갑자기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들고 여행을 떠난 걸까?


<세 가지 언어>에서 집을 나온 소년은 교황이 되고 싶어 로마로 떠났지만 막상 교황을 할 수 있게 되자 라틴어를 할 줄 몰라서 망설인다. 그땐 라틴어가 지적 권위와 신적 권능의 상징이었으니 소년을 기죽이고 대중을 기죽이기 좋은 언어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는 라틴어에 능통하지만 실제 대화에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리숙하고 고대 문헌에 대한 설명은 잘 하지만 자기를 표현하고 상대를 알아가는데 미숙하다. 정해져 있는 말만 하고 정해져 있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거나 미움 받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아마데우 프라두에게 빠져드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연금술이 무엇인가. 세상에 없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과학과 마법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모하기까지한 시도가 바로 연금술이다. 언어로 연금술을 부린다는 것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로 언어를 재탄생시키고 싶다는 뜻이다. 책의 서문만 보고 왠지 자기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프라두를 통해 다른 삶을 엿보고 싶어했던 그레고리우스는 책의 제목을 보고 그런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프라두가 본인 같이 정해져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처받고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끝까지 이 여정을 마치게 될까?


이 책은 그레고리우스를 판단하는 독자의 태도를 통해 독자 스스로 자기의 용기와 결정력을 가늠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자기분석을 유도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은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5년 만에 다시 읽고 토론하게 된 상당히 의미 있는 시즌이다. 북클럽 초기 단계였던 5년 전에는 한 그룹에 인원도 더 많고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도 더 많았지만 토론이 잘 안 됐었다. 책의 내용 파악조차 제대로 안 하거나 책의 흐름이 흘러가는 방향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자연스럽게 토론이라는 것이 됐다. 흥미와 불안을 스스로 느끼기도 하고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추적해서 인물의 동선을 파악하며 그레고리우스의 노력을 실감나게 상기시켜주는 멤버도 있다. 적극적으로 해석해 온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가 어딘가에서 겪었던, 새로운 출발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좋은 문학 작품을 동등한 시선으로 읽고 토론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서 5년 동안 다양한 주제의 단편 시즌과 장편 시즌으로 훈련해 왔었다. 멤버는 거의 바뀌었는데 북클럽이 성장한 상태라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이번 시즌은 나에게 그리고 호담서원에게 의미가 아주 크다. 일단 이 시즌을 진행하면서 책이 출간될 예정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 강남 호담서원의 향방이 결정된다. 나뿐만 아니라 호담서원도 어떤 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서 나도 이 시즌을 지나가면서 많은 것을 정리하고 용기 있게 다음 출발을 준비하고 싶다.


<세 가지 언어>에서는 인간이 성장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면 호기롭게 시작하고 성취도 하고 만족감도 느끼지만 다음 행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우울 구간을 통과한다는 걸 보여준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아무 포부도 없는 사람은 스위스 베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살았던 그레고리우스처럼 그저 평안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고 싶고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은 사람은 그 욕망과 불안 사이에서 단단한 기반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며 우울의 늪에 빠진다. 그땐 ‘넌 할 수 있다.’라는 말이 더 큰 우울과 회피를 부를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이룰 사람이라면 소년처럼 우울한 기분과 상관없이 전진한다. 그레고리우스처럼 공포와 악몽과 후회 속에서 아무튼 리스본에 발을 디딘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란 책에서 우리의 마음이 상자 속에 있으면 영원히 상처받지 않겠지만 그 안에서는 사랑을 경험할 수 없으며 어차피 상자 속에서도 그것은 변한다고 말한다. 맞다. 그레고리우스는 베른에서 안전하게 지냈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언제나 사람들의 평판과 이혼한 아내의 불만족에 신경썼고 타인의 입을 통해 인정 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파피루스가 된 것이다.

동화 속에서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이 교황직을 받아들일 때 들은 새의 언어는 어떤 의미일까? 라틴어를 모르는 소년에게 새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말을 읊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준비되지 않았지만 교황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인정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새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교황이 될 거라는자기 충족적 예언을 듣고 우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소년은 새의 언어를 배웠지만 실제로 듣는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격을 논하는 아빠의 언어가 더 크게 들렸기 때문에 도전을 앞두고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요즘에 높은 학점과 대단한 학벌, 많은 자격증이 있어야만 일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비슷하다. 유명세와 화려한 인맥이 없으면 이 삶은 절대 개선되지 않을 거라는 절망에 빠진 현재의 나와도 비슷하다. 그때 필요한 것이 그만 준비하고 일단 하는 것이라고 동화는 말하고 있다. 그 용기를 주는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들려주는 속삭임이라고. 그때그때 필요한 말을 공급해 주고 움직이게 하는는 것은 어쨌든 자기일 수밖에 없다고.

1회차 모임을 하고나니 지난 몇 년 동안의 북클럽의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았지만 그 덕에 5년 전과는 다른 오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안 겪는 게 나았을지 돌이켜보면 어차피 이 길을 걸어야만 했다면 내 그릇은 평탄하게 올 그릇은 아니었다. 힘들면 어떡할지 걱정할 깜냥도 안 됐던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우울을 느끼게 된 건 뭔가를 좀  알게 된 다음부터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


그레고리우스는 이제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한다. 파피루스는 양피지 아닌 삶을 시도하게 될까? 단편 책담에서는 <굿 헌팅>을 읽을 예정이다. 캔 리우가 소개하는 근미래의 이야기는 환상적이면서 우화적이고 민담을 닮아서 해석하고 사색하기 좋다. 이 여정을 통해서 우리 멤버들과 많은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싶다. 종착지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외롭지 않고 실망하지 않길. 분명히 그럴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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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북클럽 호담서원 호스트의 2306 시즌 후기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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