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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 음악가의 부활

by 박종수

"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 친일 반민족주의자가 거주하던 곳을 평생학습 교육의 장으로 삼았다는 말인가?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좌파와 우파>간의 전쟁이 아니라 <친일 반민족주의자>와 <대한국민>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전개되고 있다."



I.


광복 80주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TV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 문득 <홍난파 가곡제>라는 제목하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내노라하는 성악가들이 나와 열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광복절이 바로 코앞인데라는 생각에 마치 광복절 축하 특집 프로그램인듯한 느낌으로 <홍난파 가곡제>를 방송하고 있는 “한경 아르떼” 방송이 야속함을 넘어 미친 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이렇게 광복절을 앞두고 ‘친일매국노를 위한 가곡제’ 간판을 내걸고 거창한 방송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만 했다. “한경 아르떼” 채널은 그동안 방송채널로서 별 손색없는 우수한 방송프로그램을 제공해 왔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갑자기 광복 8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친일매국노 특집방송>으로 꾸미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Hong01_20250812.JPG 2025년 8월 12일 TV 방송화면 갈무리


흔히 “고향의 봄을 작곡한 근대음악의 아버지”라는 거대한 영예로 채색된 홍영후는 어느새 그의 호를 덧씌워 ‘홍난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 홍영후보다 오히려 홍난파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홍영후, 그는 경기도 화성시 어느 작은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홍영후가 태어났다고 하는 소위 ‘홍난파 생가’(경기도 화성시 홍난파길 32)*라고 부르는 가옥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났다고 하는 화성시 집 앞에 그를 추앙하는 안내문이 쓰여 있는데 보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처럼 교묘하게 조작한 “가짜뉴스”처럼 ‘가짜안내문’이기 때문이다.(* 화성시는 그의 부서진 생가를 복원하고 집 주소지까지 ‘홍난파길’이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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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홍영후 생가터에 화성시는 <홍영후 생가>를 짓고 '안내문'까지 내걸었다.


그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난파 홍영후 선생은 1898년 4월 10일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고... 대표작으로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이 있는데...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으며 1941년 8월 늑막염이 악화되어 삶을 마감하였다. “


안내문은 한글로만 되어 있지 않고 영문을 함께 써놓았는데,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라는 부분의 영문 번역 내용을 보면 교묘하게 번역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 내용은, "In June 1937, he was thrown in Daegu prison in connectuon with 'Training Fellow Association'(Associ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ended his life in August 1941 with aggravated pleurisy...."


이 부분의 영문을 접하게 되는 순간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마치 홍난파가 애국독립운동을 하다가 대구감옥에 갇혀 있다가 병을 얻어 몇 년 후인 1941년에 사망한 조선독립운동을 한 <친일매국노>가 아니라 <애국자> 일 것이라는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교묘한 조작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홍영후는 한때 서울 한복판 한편에 마련된 지금은 소위 <홍난파가옥>이라고 이름 붙은 집(서울시 종로구 송월 1길 38)에서 5년 정도 살았다. 그 집이 지금은 그를 기념하는 내용물로 채워져 친일 반민족 음악가를 위한 기념관 구실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살았다는 집 앞에 그의 흉상까지 세워놓고 마치 독립애국지사를 추모하는 기념관을 지키는 주인공처럼 흉상을 소중히 모시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생가’라는 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처럼 교묘한 조작질을 한 <안내문>이 이곳에도 세워져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 홍난파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는 부문이 있다. 사실 홍영후가 이곳에 거주하며 작곡한 곡들은 우리에게 그의 대표작이라고 알리고 싶은 <고향의 봄>이나 <봉선화> 등이 아니라 대부분 “천황을 위해”, “일본군 만세”를 부르며, “일본군이 승리하는 그날까지”를 기원하는 그런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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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자 홍영후>가 살았던 가옥과 안내문


‘홍난파가옥’이라고 부르는 이 집에서 홍영후가 작곡한 곡들은 모두가 일본 천황을 위해, 일본군을 위한, 대동아번영을 위하는 그런 곡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마치 이 집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만한 그런 노래들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작질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 설립과 동시에 당시 이명박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친일 반민족행위는 서서히 희석되고 감춰져 간다.


분명 ‘국가유산포털’에 “홍난파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포함된 인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홍영후는 ‘홍난파’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어느 틈엔가 일제하 독립지사인양 급부상되기 시작한다. <홍난파 가옥>이 "건국전쟁"의 한 축을 담당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조금씩 잠식해 가고 있는 중이다.


2004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소위 <홍난파가옥> 부지를 사들이고 가옥 수리를 마치고 2006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을 받는다. 그러나 <홍난파가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받게 되는 과정을 보면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밝히고 있는 지정 사유가 일반적인 이유라고 알려져 있는데, 1)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인 이 집은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고, 2) 작곡가 홍영후가 1936년에 인수하여 몇 년간 살면서 그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딜쿠샤>라고 부르는 또 다른 2층짜리 석조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홍영후가 살았던 가옥보다 그 규모가 훨씬 더 크고 삼일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건물임에도 2017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한 후 문화재로 선정, 등록된다. 이를 볼 때 <홍난파가옥>의 건축학적 가치는 위장된 가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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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큐샤' 건축물 사진과 집안에 전시중인 방문자들의 그림들


<딜큐샤>, 이 집은 100여 년 전 미국 출신의 광산업과 무역업을 하던 앨버트 테일러 부부가 1923년 독립문 인근의 언덕배기에 붉은 벽돌로 영국식·미국식 건축법을 혼합하여 2층 건물을 짓는다. 건축 시점에서 이 건물은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양식 주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앨버트 테일러 씨는 당시 AP 통신사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이를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사업을 하던 그를 특파원으로 임명한다. 기업인이자 통신사 특파원으로 활약하던 앨버트 씨는 조선의 삼일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기사들을 본국으로 보내 해외에 알린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조선총독부는 외국인 추방령을 내리고 엘버트 부부를 한국에서 추방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에서 활동을 못하게 한다.


딜큐샤는 그 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문화재로 등록되어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관리하게 된다.(2017년 8월 8일) 한편 2016년 3월에 테일러 씨의 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Linley Taylor, 1958년 ~ )씨가 한국을 방문, 조부모의 유품과 딜큐샤 거주 당시 소장품 등 총 3102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다. 이들 중에는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딜큐샤 관련 자료들과 딜큐샤 다락에 숨겨놓은 피 묻은 태극기 등도 포함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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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큐샤의 안주인 메리여사의 그림솜씨는 뛰어나 집안 가솔들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두 번째, “홍영후가 1936년 이 집에 거주하며 사망하는 1941년 사이에 우리가 좋아하는 그의 대부분의 대표곡들이 만들어졌다 “라고 홍난파가옥 보존가치를 떠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은 홍영후가 1934년에 당시 소프라노 이대형과 재혼하고 그녀와 이 집에서 숨지는 1941년까지 살았고, 1942년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이 집의 소유자는 일본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구나 이 집 본채 현관은 남쪽에서 계단으로 1.42m 올라가서 나오는데,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방이 있고, 왼쪽에 거실과 작은 방이 나온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면서 1층의 칸막이 벽들을 문화재건축물인데도 마음대로 변형, 훼손을 하고 없애버렸다. 그런데도 이 1층이 이 주택의 중심 공간으로서 홍영후가 대표곡들을 작곡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홍난파가옥> 앞에는 독립애국지사들 흉상처럼 ‘홍영후 흉상’이 지키고 있다. 사실 이 흉상은 1968년 홍영후 탄생 70주년을 맞이해 당시 남산에 있던 KBS가 제작해 설치했던 것인데 홍영후의 친일행각으로 시민들 반발이 심해지자 KBS가 자진 철거를 했던 것이다. 그 후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홍영후 후손이 찾아와 이곳에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홍영후 흉상에 붙여놓은 그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 어처구니없게도 철거된 흉상의 친일 반민족 이미지는 간데없고 단지 홍영후를 칭송하고 기리는 찬사로 가득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홍난파가옥>은 2006년 문화재건축물로 등록된 후 2010년 1월에 문화재청은 뜬금없이(?) 홍영후 후손 홍익표에게 홍영후 가옥 운영권을 이전하고 종로구청과 홍난파 가옥 운영에 관한 MOU를 체결한다. 친일 반민족인사들의 재산몰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들에게 종로구청이 나서서 친일 반민족 인사인 홍영후의 후손에게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 설립 허가까지 내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이후 <홍난파의 집>은 사업자 등록까지 마치고 그를 기념하는 메달은 물론 각종 기념음악회 등의 사업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현재 홍영후의 후손들이 <홍난파가옥>을 구심점으로 아주 당당히 마치 자기 집처럼 관리는 물론이고 각종 홍영후를 기리는 사업들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홍영후의 생애’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조작된 사실들을 진실인양 과대포장하고 극대화해 마치 애국지사의 비극적이고 억울한 종말을 묘사하듯 감상적인 문장으로 아래와 같이 거짓된 사실들을 교묘히 사실인양 조작된 언어로 꾸며놓았다.


“1937년과 38년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중 난파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사상전향서를 쓰게 되었으며 ‘희망의 아침’(군가)을 강요에 의하여 작곡하게 되어 이것이 친일 시비에 관련되고 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머리를 다치게 되며 늑막염이 재발, 경성요양원에 입원하였으나 해방의 서광을 보지 못한 채 1941년 8월 30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Hong00.JPG <홍난파가옥> 입구에 붙여놓은 "서울시교육감 지정 평생학습 협력기관" 팻말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이 <서울특별시교육감 지정 평생학습 협력기관>이란 사실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표지판은 분명 <홍난파가옥> 정면에 버젓이 붙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리박스쿨’의 산 교육장인가? 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 친일 반민족주의자가 거주하던 곳을 평생학습 교육의 장으로 삼는다는 말인가? <건국전쟁>은 이렇게 예술의 탈을 쓰고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II.


홍난파, 본명 홍영후(1898-1941), 1910년 9월 YMCA 청년회관 중 학과에 입학, 1914년 3월 졸업, 한편 1912년 4월 조선정악전습소 서양학부 성악과에 들어가 1913년 4월 제2회로 졸업한다. 같은 해 조선정악전습소 서양학부 기악과에 입학해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면서 1914년 3월 졸업한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서양학부 교사로 임용된다.


1918년 4월 관립동경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해 1919년 3월에 수료하고,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 선과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 본과로 진학 후 1929년 3월 졸업한다. 그 후 귀국해 잠시 중앙보육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다 1931년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해 1932년 6월에 졸업한다. 그런데 셔우드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에 가입을 한다.


홍영후는 귀국 후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된다. 그러나 10월에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로 돌아서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모두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홍영후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다. 홍영후 역시 1937년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다.


홍영후는 자필로 쓴 이 글에서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사상 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고 글을 적는다.


그 후 1938년 6월에 동우회 사건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대동민우회는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상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한 단체로 일본의 ‘대 국가주의’ 사상을 추종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로 창립된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에 이광수, 최남선, 현제명 등의 예술가들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일본의 국체와 전시체제의 선전 활동에 최전선에 나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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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옥>에 전시된 게시물들


1937년 9월 홍영후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하는 일본군의 중국 ‘바오딩’ 지역 점령을 축하하고 황군에 감사하자는 목적으로 경성부민관에서 자신이 작곡한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를 발표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이날 공연 수익금은 황군 위문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홍영후는 계속해서 1938년에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로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 “라고 하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한다. 이 노래는 1941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가창지도곡’으로 선정되어 여러 차례 라디오로 방송된다.


그리고 1939년 10월에는 라디오로 방송된 <애국가곡집> 프로그램에서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연주한 <대륙행진곡>, <황국정신으로 돌아가>, <애마진군곡>, <부인종군의 노래>, <태평양행진곡> 등을 지휘한다. 같은 해 11월에 방송된 <우미유카바: 바다로 가면>, <기념식 행진곡>, <애국행진곡> 등과 12월에는 <태평양행진곡> 등을 연주한 중앙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한다.


1940년 일본의 ‘기원 2600년’ 봉축기념’의 해를 맞이해 홍영후는, “때는 바야흐로 기원 2600년! 성전도 이제는 제3단계에 들어가서 신동아 건설의 대업이 하루하루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때에 총후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했던 음악인들의 원정에는 의당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예술적 감흥이 성숙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말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할 것을 자기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홍영후는 일본의 ‘기원 2600년 봉축기념’ 현상 당선곡인 <순정의 꽃장사>를 작곡, 발표한다.


한편 홍영후는 1940년 7월 7일 자 <매일신보>에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그는, “과거에 있어서 국민가 다운 국민가를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애국행진곡 같은 ”신국민가“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사변이 일억 국민(조선과 일본 국민들을 합한)에게 보내준 선물로 우리는 영원토록 언제나 이 노래를 고창함으로써 새로운 감격과 불타는 애국열(일본을 향한)을 고조시킬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1941년 1월 홍영후는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그는 조선음악협회에서 각종 음악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일제의 참략전쟁에 협력하는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합하는 <국민가집>의 발간과 보급,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진가 <이겼다 일본>의 작곡과 보급, 국민개창운동 등의 활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1941년 2월에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해 <국민총력의 노래>, <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새벽에 빈다>,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열사의 맹서> 등을 방송한다. 그뿐 아니라 1942년 11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상 위원회에서 홍영후가 작곡한 <산에 들에>, <어머니 마음> 등을 가정가요 부문 문화상 추천 작품으로 선정한다.


MG_5451.jpg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중인 '일장기'와 '나치독일의 국기'


그러던 홍영후는 결국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늑막염이 도져 죽음을 맞는다. 홍난파 가옥이라는 이 집에서 그의 친일 반민족 행위를 대표하는 작품들 거의 대부분이 바로 이곳, 이 집에서 작곡이 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집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홍영후는 어느새 대한민국의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대한국민’으로 자리를 잡고 우리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마치 일제강점기 험난했던 시절의 희생양이었던 것처럼 포장되면서 말이다.



○ 참고문헌


민족문화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임종국, '친일문학론'

국가유산포털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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