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본다.”
렘브란트를 기리는 동상 발치에 쓰여있는 문구가 재미있다. Rembrant(1606-1669),
“예술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본다.”(The artist looks at the place of his youth)
렘브란트(Rembrant: 1606-1669), 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라이덴(Leiden)에서 태어나 25살이 되는 1631년까지 이 도시에서 살았다. 렘브란트는 고향 라이덴에서 드로잉과 회화의 기본을 익힌후 1624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당시 유명한 역사화가 피터 라스트만(1583-1633)에게서 6개월 동안 수업을 받는다. 수련을 마친 렘브란트는 라이덴으로 돌아왔다가 1632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자마자 그는 역사화와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로서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 그는 많은 작품의뢰를 받았고 그의 화법을 배우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찾아온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오자마자 주문받은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 1632>이다. 암스테르담 외과의사들이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한 때가 렘브란트가 겨우 25세였을 때였으니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1632년 1월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해부학 수업을 위해 의뢰한 것이었다.
그림 속 의사들은 각기 다른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는 역동성을 더한다.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의 전설적인 기법과 실물크기의 초상화를 그리는 뛰어난 재능을 느끼게 한다. 이후 렘브란트는 초상화의 대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적지 않은 유명세를 얻게 되고 엄청난 작품 의뢰를 받게 된다.
(* 당시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를 비롯한 화가들의 초상화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회가 “2025 암스테르담과 렘브란트”라는 제목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한편, 렘브란트는 (지금은 렘브란트 하우스라고 부르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몇몇 제자들을 두고 그의 그림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의 도제로 특히 뛰어난 재능과 솜씨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화가들은 반 호흐스트라덴(Van Hoogstraten)을 비롯해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와 아브라함 푸르네리우스, 그리고 베르나르드 기일이 있다. 이들은 렘브란트에게서 이론과 실제가 결합된, 즉 실제 삶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물을 보는 대로 묘사해야 하는지 등을 배우고 있었다.
이와 함께 렘브란트 제자들은 그에게서 빛이 직진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러나 그 직진하는 빛이 어떻게 인간 인식에 작용하고 의미를 주는지를 이해하고 그림 속에 어떻게 빛을 표현해 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렘브란트는 빛을 표현하는 단선적인 방법으로 동판화를 이용한다.
빛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물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반복적인 사용이 가능한 판화 그림제작기술은 그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스케치를 한다는 그런 느낌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심지어 자신의 초상화를 반복적으로 동판화로 제작해 사용하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회화와 동판화, 그리고 스케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갈 즈음 렘브란트는 서서히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고향을 떠나온 렘브란트가 이제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 어느덧 인생의 막바지를 향해 갈 즈음, 문득 렘브란트는 그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가 태어난 고향 라이덴을 찾는다. 그가 라이덴을 떠날 때 여전히 렘브란트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거의 대부분 라이덴에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와 숙모, 종조모, 그리고 그의 형제자매 까지도 이곳에서 살았다. 렘브란트 아버지는 이 동네 여러 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안탑깝게도 어느 집에서 살았는지, 그 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베데스테이크 서쪽 물가 근처에는 성벽 뒤로 두꺼운 벽이 있었는데 두벽 사이의 공간은 흙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성벽 위에는 두 대의 풍차가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렘브란트의 할머니가 잠시 소유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라이덴에 거주할 당시 도시 외곽 서쪽, 비스트 포르트(Wist Poort) 근처에 살았다. 성벽 밖에는 주민들을 위한 작은 정원들이 꾸며져 있었는데, 렘브란트 가족 중 몇몇은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었고 렘브란트 자신도 1630년에 500 길더를 주고 이곳의 땅 일부를 사들였다. 이곳은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까지 쉼터로서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는데 그가 곤경에 처해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보금자리로서 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자 렘브란트 생가는 근처에 있는 인쇄소 확장 공사를 위해 안탑깝게도 철거해야만 했다. 그 후 렘브란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1906년 그가 태어난 건물 외관에 “렘브란트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새겨진 벽돌 하나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 표식 하나가 남아 있어 다행히 오늘날까지 렘브란트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득 위대한 한 예술가의 흔적이 그리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일이 안탑깝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든다. 렘브란트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과 건축물 등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그의 죽음처럼 허무하리만치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둔 후 그의 주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다. 렘브란트가 말년에 죽음을 맞자 그의 주검은 암스테르담 베스트커르크(Westchurch) 시체 보관소에 집하된다. 그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 아무도 연고자가 찾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보관되었던 렘브란트를 비롯한 다른 시체들을 미연고 시체로 처리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 후 렘브란트의 시체가 어디로 보내져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전혀 기록도 없고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렘브란트의 시체는 행방불명이다. 현재 렘브란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오직 베스트커르크(Westchurch) 벽면에 “여기 렘브란트의 죽음이 있었다”는 기념패만이 걸려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렘브란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슈테판 발켄홀(1957년 독일 프리츠라 출생 조각가)은 젊은 렘브란트를 추모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살았던 이 지역(지금은 렘브란트를 기념하는 작은 공원)에 설치한다.
그 작품은, 공원 한가운데 한 소년이 이젤에 놓인 청동조각 자화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벽에는 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렘브란트의 세라믹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살던, 지금은 렘브란트 공원이 된 이곳 맞은편으로 운하에 놓인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가면 그곳에 렘브란트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바라보고 서있다.
렘브란트를 기리는 동상 발치에 쓰여있는 문구가 재미있다. Rembrant(1606-1669), “예술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본다.”(The artist looks at the place of his youth), 어쩌면 이곳이 그가 살았던 시절에 꽃을 심고 가꾸면서 마음의 평안을 받으며 평화로움을 누리던 그 작은 정원 바로 맞은편이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런 문구를 적어 놓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