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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방울새'의 비상

카렐 파브리티우스

by 박종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영원한 비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건 작은 <황금방울새> 한 마리가 “델프트 천둥소리”를 뚫고 저 높은 하늘 끝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I. 화가를 꿈꾼 파브리티우스


1654년 10월 12일, 여늬날처럼 청명한 날이 밝았다. 델프트는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장이 서느라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점차 고성을 지르며 물건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잠시 후 어디선가 무거운 폭발음과 함께 건물 조각들이 파편처럼 날리며 운하 주변에 늘어선 장터를 뒤덮어 버린다. 8만 파운드(약 3.6톤)의 화약을 보관하고 있던 델프트 병기고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델프트 천둥소리’(De Delftse donderslag)가 160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델프트의 상징 같은 교회와 운하들, 모두 부서지고 찢겨 나갔다. 무너져 내린 건물들 잔해와 폭발로 희생된 수백 명의 사상자들, 지옥이 따로 없을듯한 풍경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소설 'Goldfinch' 표지

한편, 2019년 9월, 소설가 도나 타트의 소설 <황금방울새: Goldfinch> 시리즈 중 첫 번째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개봉된다. 영화 ‘황금방울새’의 첫 장면은 폭발로 시작되었다. 마치 델프트의 화약고 폭발처럼 처참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주인공 테오는 산산 조각난 폭발의 파편들 속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순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가운데 수북이 쌓인 잔해 속에서 테오는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방울새>를 찾아낸다.


<황금방울새>, 이 작품은 소설의 서사 속을 오가며 테오의 삶을 괴롭히고 폭발로 어머니를 잃은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의 그림 제목인 <Goldfinch: 황금방울새>가 캔버스의 좁은 틀에 갇힌 듯 테오는 이 그림에 갇혀 어쩔 줄을 모른다.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Goldfinch>, 이 작품은 우리말로 ‘황금방울새’라고 불렀다. 이 작은 새 그림은 그 자체로 강력한 파괴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델프트의 폭발사고로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1641년에서 1654년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화가로 활동하다 폭발 사고가 발생하자 그 여파로 사망한다. 하지만 엄청난 폭발에도 <황금방울새>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과 함께 파브리티우스는 이제 영원히 사람들 기억 속에 살아남게 된다.



II. 황금방울새의 비상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 1622–1654), 그는 암스테르담 북쪽 작은 마을 미덴베엠스터(Middenbeemst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관리인이자 교사였으며, 주말에는 화가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목수일을 가르치면서 간간히 그림 그리기를 가르쳤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카렐과 그의 형제 바렌트, 요하네스 모두 화가가 된다.


한편, 당시 관습에 따라 그의 선조들은 "파브리티우스(Fabritius)"(라틴어로 "faber"는 목수를 의미)라는 성을 사용했다. 1641년 초 19세가 된 카렐 파브리티우스는 이웃이자 지역 목사의 누이인 앨트게 벨투이스(Aeltge Velthuys)와 결혼을 하기 위해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입교해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에 카렐 파브리티우스는 아내 앨트게와 동생 바렌트와 함께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렘브란트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떠난다.


암스테르담의 스튜디오에서 렘브란트의 도제가 된 파브리티우스는 눈에 띄는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렘브란트의 가장 유망한 제자로 여겼다. 그런데 1643년 봄 암스테르담에 온 지 2년여 밖에 안된 어느 날 파브리티우스의 아내 앨트게가 아이를 출산 중 사망하자 파브리티우스의 암스테르담에서의 미술교육은 끝이 난다. 비탄에 빠진 그는 모든 걸 포기한 채 부모님이 살고 있는 미덴베임스터로 돌아간다.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렘브란트의 작업실에 머물렀던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안 파브리티우스는 렘브란트의 스튜디오(현재 ‘렘브란트 하우스’로 부르는 곳)에서 작업을 하며 렘브란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빛과 감정을 포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에 대해 배웠다.


Portrait of a Beaarded Man-1640s.jpg
03-The Raising of Lazarus (1643)-National Museum, Warsaw, Poland.jpg
Christ Among the Doctors(c17).jpg
1) Portrait of a Beaarded Man(1640s), 2) 나사로의 부활(1643), 3) 스케치, Christ Among the Doctors(17c)


당시 파브리티우스의 아내 앨트게의 재산 목록에 따르면, 그녀가 1,800 길더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지니고 있었고, 파브리티우스가 직접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두 점의 "거칠게 채색한 그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두 점의 그림은 <Portrait of a Beaarded Man: 수염 난 남자의 초상화(1640s),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England>와 <나사로의 부활(1643),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폴란드>로서, 1642-43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그림은 파브리티우스가 암스테르담과 미덴베임스터를 오가며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브리티우스가 그린 <수염 난 남자의 초상화>와 <나사로의 부활>을 보면 음영을 사용한 방식에서 렘브란트 스타일이 거의 비슷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의 쇠퇴에 대한 죽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파브리티우스가 나사로의 부활을 그리면서 어쩌면 그의 아내 엘트케의 부활을 고대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파브리티우스는 스승과는 달리 짙은 배경색 대신 밝고 따뜻한 배경을 선호했다. 또한 르네상스 회화의 무거운 도상학(iconology)을 버리고 더욱 기술적인 회화 접근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임파스토 영역이 얇은 유약의 섬세함과 균형을 이루어 무거움과 가벼움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렘브란트 밑에서 짧은 도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파브리티우스가 렘브란트의 제자 중 유일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브리티우스의 초기 작품 <나사로의 부활, 1642>을 보면 그의 특징이 더욱 확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브리티우스는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모인 놀란 구경꾼들의 얼굴을 통해 사건의 장엄함을 전달하는 데 렘브란트가 보여주는 정밀함 이상으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파브리티우스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성경의 유명한 장면을 렘브란트 특유의 "어둠과 빛" 기법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파브리티우스의 그림들에서 분명 렘브란트의 특징인 복잡한 빛의 반사를 만들어내는 명암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파브리티우스는 스승의 기법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자기만의 사실적인 그림자가 드리운 심도를 부여한다.


카렐 파브리티우스는 암스테르담을 떠나온 후 그의 고향 미덴베엠스터에 머무르면서 간혹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 스튜디오를 찾아가 렘브란트의 도제로서 그림을 공동제작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술적인 자문을 구하거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그가 암스테르담을 떠난 후부터 델프트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기까지의 7년여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작품들을 렘브란트의 도제로서 제작을 하거나 다른 도제들과의 공동제작으로 완성한 작품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04-Hagar and the Angel_1645-LeidenCollectioninResidenzgalerie Salzburg.jpg
07-Mercury and Aglauros (1645-1647)- Museum of Fine Arts Bost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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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agar and the Angel(1645), 2) Mercury and Aglauros(1645-1647), 3) The Beheading of John the Bap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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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습작 스케치 작품들이 10여편 남아 있다. 이 습작들은 1640년대 후반에 그린 것들이다.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델프트로 입성하기 전까지 그린 작품들을 보면 그의 작품들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마치 ‘작은 렘브란트’를 보는 듯하다. 다음 작품들은 이 시기 파브리티우스가 직접 그린 작품으로 인정된 것들이다. <Hagar and the Angel, 1645>, LeidenCollection in Residenzgalerie Salzburg, <Mercury and Aglauros, 1645-1647>, Museum of Fine Arts, Boston, <The Beheading of John the Baptist, 17c>, Rijksmuseum, Amsterdam, <Mercury and Aglauros, 1645-1647>, Rijksmuseum, Amsterdam, <아브라함 드 포터의 초상화, 1649>, Rijksmuseum, Amsterdam, <Portrait of a Lady in profile, 17c>, Rijksmuseum, Amsterdam, <Portrait of a Seated Woman with a Handkerchief, c1644>, Rijksmuseum, Amsterdam, <모자 쓴 늙은 남자, 17c>, Rijksmuseum, Amsterdam. (* 17c 표기는 정확한 제작연도는 모르지만 1643년부터 1649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


파브리티우스가 단독으로 그리지 않고 렘브란트의 지도를 받거나 동료 학생들과 공동으로 그림을 그린 작품들도 적지 않다. 이 중 몇몇 작품들은 최종 렘브란트의 서명을 표시하고 공개된 작품들도 적지 않다. 다음의 그림들 경우가 그렇다. <Anonymous Man met helm, 17c, Groninger Museum, 네덜란드>, <Die Milchmagd, 17c>, <The Happy Child, 17c>, <Hera Hiding During the Battle Between the Gods and the Giants, 1643>, <Portrait of an old man, 17c>, <Saskia van Uylenburgh, 17c>, <서재에 있는 청년의 초상, 1640, 호흐스트라텐과 공동제작, National Museum, Stockholm>


05-Portrait_of_a_Seated_Woman_with_a_Handkerchief (c1644)- Art Gallery of Ontario, Toronto.jpg
09-Abraham De Potter (1649)-Rijksmuseu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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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Seated Woman with a Handkerchief(c1644), 2) Abraham De Potter(1649), 3) A Lady in profile(17c)
The_Happy_Child-Toledo Museum of Ar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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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_Saskia van Uylenburgh-Antwerp, Royal Museum of Fine Arts.jpg
렘브란트 워크숍: The Happy Child(17c), Die Milchmagd(17c), Saskia van Uylenburgh(17c)
Carel_(voorheen_toegeschreven_aan)_Fabritius_Hoofd_van_een_oude_man_met_hoed_Kop_van_een_oude_man_Groninger_Museum.jpg
after_서재에있는청년의초상_1640년대전반공동제작호흐스트라텐_vanDijck_Fablitius_NationalMuseum_Stockholm.jpg
Anonymous_Man_met_helm_Groninger_Museum.jpg
모자쓴 노인의 초상(17c), 서재에 있는 청년의 초상(17c), 공동제작, Anonymous Man met helm(17c)


특히 이 중에서, <Saskia van Uylenburgh, 17c>라는 작품은 렘브란트의 부인 샤스키아(Saskia)를 모델로 렘브란트와의 워크숍 중에 파브리티우스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는 물론 렘브란트의 사인이 들어있다. 이런 작품들이 적지가 않은데, 파브리티우스의 실력을 보여주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파브리티우스는 렘브란트처럼 신화 속 이야기를 찾아내 여러 작품을 그린다. 그중에서 특히 머큐리(Mercury)와 아르고스(Argus)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Mercury and Argus, 1646,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는 렘브란트의 그늘에서 벗어나 더욱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나아가는 파브리티우스의 화풍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Mercury and Argus(1646)

그러나 수 세기 동안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런데 경매회사 ‘소더비’가 1985년 경매시장에 나온 그림에서 파브리티우스의 서명을 발견한다. 그제야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작품이 아니고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임을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어쩌면 누군가 어느 시점에 물감에 가려져 있던 “파브리티우스”라는 이름을 “렘브란트”라는 이름으로 고쳐 그림을 팔았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작품의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기에 ‘사인 조작’을 숨겼을 가능성이 높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유럽 회화 및 조각 수석 큐레이터인 필립 코니스비는 "풍부한 질감은 (실제로) 렘브란트 작품과 비슷하지만 파브리티우스는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오해받아서는 안 될 만큼 뛰어나게 미묘한 색채와 금발 색조를 사용했다."라고 지적한다.


한편, 파브리티우스는 1640년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렘브란트의 뒤를 이을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아브라함 드 포터의 초상화>는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언뜻 보기에 그의 비단 상인(아브라함 드 포터) 초상화는 다소 진부해 보인다. 모델은 수수한 검은색 옷차림에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뻣뻣한 주름 장식의 러프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파브리티우스가 스승의 스타일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가 일반적으로 황량하고 불투명한 배경과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피사체를 사용하여 초상화를 그린 반면, 파브리티우스는 모델을 별다른 특징이 없는 얼룩덜룩한 석고 벽에 기대어 세웠다. 이는 섬세하고 솜씨 좋은 터치로 피사체를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파브리티우스의 가장 유명한 장르화 작품인 <파수꾼>과 <황금방울새>는 이와 비슷하게 풍화된 밝은 회색 배경을 특징으로 한다.


파브리티우스가 보여주는 초상화에 대한 감각은 점차 파브리티우스만의 스타일로 발전해 감을 느끼게 한다. 렘브란트의 어두운 배경의 초상화와 달리 밝은 배경과 빛나는 눈동자의 초상은 파브리티우스 그림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파브리티우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그림 한 점이 눈에 띈다. 최근까지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많은 찬사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A Girl with a Broom: 빗자루를 든 소녀, 17c,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사실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워크숍 과정에서 그의 제자 중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A Girl with a Broom(1646/1648~1651)

1640년대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학생과 조수의 역할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기록적인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무엘 반 호흐스트라텐(1627-1678)과 카렐 파브리티우스처럼 렘브란트의 학생 중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제자가 수습 과정을 마친 후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들은 독립적으로 작업하고 자신의 그림에 서명하기 시작한 후에도 렘브란트 이름으로 판매될 그림의 제작을 계속 도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림의 특징적 측면을 보면 사무엘 호흐스트라텐보다는 파브리티우스의 솜씨가 더 분명한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작품은 파브리티우스가 그린 것으로 판명된다.


워크숍을 마치고 렘브란트가 공동작업한 그림을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면, 작품에는 그의 서명과 날짜가 새겨진다. <빗자루를 든 소녀> 역시 이런 맥락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파브리티우스는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 얼굴과 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소매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화려한 붓놀림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화가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

는 <빗자루를 든 소녀>는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III. 영혼을 울린 ‘델프트의 천둥소리’


파브리티우스의 아내 애트겔이 죽은 후 7년이 지난 1650년 8월 14일, 파브리티우스는 미망인 아가타 판 프루이센(Agatha van Pruyssen)과 재혼을 한다. 미덴베임스터(Middenbeemster)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파브리티우스의 고향마을을 떠나 아내 프루이센의 고향 델프트로 향한다. 1650년 델프트로 이주한 파브리티우스는 자신의 작업실을 차리고 기부 단체를 결성하고, 심지어 제자 마티아스 스푸어스(Mattias Spoors)를 받아들인다.


파브리티우스가 델프트에 정착하면서 17세기 중반 델프트 학파의 중심인물로 자리를 잡는다. 델프트 학파는 주로 도시와 일상생활을 담은 풍경화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실내구도로 유명했다. 델프트에서 파브리티우스는 그의 특징을 살려 그림을 그릴 때 밝은 배경에 어두운 인물을 배치하는 섬세한 음영을 주로 사용했다.


파브리티우스는 <황금방울새>와 <파수꾼>을 포함한 그의 "유명한 작품들" 대부분을 이곳 델프트에서 그린다. 그러나 파브리티우스는 델프트 화가 길드인 ‘성 루카 길드’에 가입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늦게 가입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네덜란드의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경제사정으로 인해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인 듯했다.


실제로 파브리티우스가 델프트 시의회로부터 12 길더를 받아 시의 문장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시 델프트의 미술시장 상황이 그가 미술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하겠다.

여하튼, 파브리티우스는 1652년 델프트 화가 길드에 가입하고 델프트 학파의 일원으로 활동을 한다. 그 후 델프트의 ‘성 루카 길드’의 수장이 되고, 파브리티우스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당시 ‘성 루카 길드’에 가입한 회원으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와 니콜라스 마에스(Nicolaes Maes), 그리고 피터르 데 호흐(Pieter de Hooch)가 있었다. 파브리티우스는 이 예술가들과 함께 델프트 학파를 이루고 그가 죽기 전 2년 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10-Carel_Fabritius04_1652ViewOfDelft-런던 국립 미술관.jpg <악기 판매대가 있는 델프트의 풍경, 1652년>, 런던 국립미술관


파브리티우스는 ‘성 루카 길드’의 회원들과 공동으로 미술시장 개척에 나서며 그림의 주제 등을 논의한다. 그 결실로 공동의 주제를 정하고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파브리티우스의 <악기 판매대가 있는 델프트 풍경, 1652>은 그렇게 학파의 주제를 파노라마로 반영해 그린 작품이다. 15.4 x 31.6cm 크기의 작은 파노라마 그림인 <델프트 풍경>은 마치 광각렌즈를 사용한 것 같은 도시의 아나모픽 풍경을 담고 있다. 전경에 노점상이 류트와 베이스 비올라를 지키고 있고, 그의 오른쪽 배경에는 니우에 케르크(신 교회), 시청, 그리고 운하를 따라 늘어선 집들이 보인다.


교회는 푸르고 하얀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고, 찬란한 여름 하늘 아래 나무들이 건물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양한 색조의 반사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파브리티우스는 이 풍경에 자신의 서명을 넣었는데 마치 그래피티처럼 상인 뒤편 벽에 그렸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수호한 침묵의 빌렘 2세가 사망하고 신(新) 케르크(교회)에 안치된 지 2년 후 완성된 그림이다.


그림은 마치 광각 렌즈로 본 것처럼 독특하고 복잡한 원근법으로 그렸다. 전경에 있는 비올라의 극적인 단축 효과로 시각적 효과가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곡면에 전시하거나 원통형 원근법 상자를 통해 볼 때 이미지가 (3차원으로 볼 때) 비례적으로 보이도록 의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이 어떤 종류의 관람 장치를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파브리티우스가 그러한 장치를 실험하고 심지어 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파브리티우스가 이 작품을 제작한 지 몇 년 후, 그의 친구 사무엘 반 호흐스트라텐 역시 파브리티우스가 행한 수법을 따라서 <네덜란드 주택 내부를 엿보는 쇼: 1655-60>를 발표한다.) 실제로 반 호흐스트라텐은 파브리티우스가 여러 점의 대형 원근법 장치를 사용했지만, 이 그림들은 그의 생을 단축시킨 폭발 사고로 안탑깝게 도 대부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미술사학자이자 작가인 발터 리드케는 파브리티우스가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에게 사사하는 동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의 해석』(Trattato della Pittura) 초판본(1651년 파리에서 처음 출판)의 필사본에 담긴 원근법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리드케는 파브리티우스의 <델프트 풍경>이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가장 위대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념비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통을 어떤 식으로든 깨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환경에 대한 심화되는 관심에 따라 기존의 표현 관습을 확장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gbert van der Poel_A View of Delft after the Explosion of 1654_National Gallery Lond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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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델프트 화약고 폭발 후 풍경, 2) 델프트 남쪽에 위치한 화약고 건물(지금은 레스토랑으로...), 3) 무기고 표식이 여전히...


천재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도전과 실험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예견되지 않은 파브리티우스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시기에 그는 마지막 작품 3점을 남긴다.

파브리티우스가 화약고 폭발로 죽음을 맞이하는 1654년에 그린 작품들은 다행히 모두 살아남는다. 그 작품들은, <The Goldfinch: 황금방울새, 1654, 33.5 ×22.8cm, 마우리츠후위스 미술관, 헤이그>, <The Sentry: 파수꾼, 1654, 68 ×58cm, 쉬베린국립박물관, 독일>, <A Young Man in a Fur Cap, Self Portrait: 모피 모자를 쓴 청년, 1654, 70.5x60.5cm, 런던국립미술관>이다.


파브리티우스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챈 것인지 자신의 모습을 남기려 했나 보다. 파브리티우스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은 그가 사망하던 해에 그린 <초상화, 1654>를 포함해 모두 3점이 있다.

1) 초상화(1645, 65x49cm, 알테피나코테크 미술관, 뮌헨)

2) 초상화(1645, 65x40cm, 보이만스 판 뵈닝겐 박물관, 로테르담)

3) 초상화(1654, 모피모자를 쓴 청년, 70.5x60.5cm, 런던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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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초상화 작품들


그런데 파브리티우스의 자화상을 그린 3점의 초상화 중에서 첫 번째 <모자를 쓴 초상화, 1645> 그림은 진짜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자화상인지, 아님 그의 형제를 그린 것인지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구나 같은 해에 고향마을 미덴베엠스터와 암스테르담을 오가며 2점의 자화상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도 조금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여하튼 첫 번째 그림의 모습과 두 번째 초상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듯한 모습이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여하튼, 파브리티우스의 자화상은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만의 특징을 갖고 있다. 렘브란트 초상화가 일반적으로 불투명한 배경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피사체를 마치 사진을 찍듯이 그렸지만 파브리티우스는 별다른 특징 없는 얼룩진 석고 벽에 배치하여 섬세하고 촉각적인 표현으로 피사체를 더욱 밝게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죽기 전 32세의 파브리티우스가 모피모자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젊고 패기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는 다짐과 의지의 표명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파브리티우스는 초상화에 이어서 두 점의 또 다른 걸작, <The Sentry: 파수꾼, 1654>과 <Goldfinch: 황금방울새, 1654>를 남긴다. 이 그림들은 각각 렘브란트의 무거운 명암법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비할 데 없이 맑은 빛의 색조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현존하는 모든 작품 중, 이 두 작품은 각각 구도적 환상주의와 서사적 모호함 속에서 미묘한 차이를 탐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파브리티우스는 자신의 서명을 낙인처럼 써넣는다.


특히 <파수꾼, 1654>은 파브리티우스의 진가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 남자는 아무것도 지키고 있지 않고 마치 도망병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지친 몰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분명 전투에서 돌아온 지친 전사, 즉 평범한 전쟁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 제목이 지나친 반전은 아닐 테지만 적당한 제목을 찾으려는 시도는 불필요할 것 같다.(작가가 그런 제목을 붙일 때는 다 의도한 바가 있었을 테니까)


The Sentry(1654), 슈베린 국립미술관, 독일

파브리티우스가 <파수꾼, 1654>을 그렸을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 중이었다. 80년 전쟁이 막 끝났지만, 갈등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는 국내에서 영국과 포르투갈을 상대로, 또한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해상 교통로에서 각각 전쟁을 치렀다. 네덜란드 거리에는 전투로 지친 병사들이 이 그림처럼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브리티우스는 영웅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전투에서 돌아온 후 완전히 지쳐 쓰러진 한 남자를 그렸다. 결국 지친 병사들은 전쟁을 위해 저장해 놓았던 폭약과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나야 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선견지명이 어쩌면 그런 운명들을 위해 <파수꾼, 1654>이라는 작품을 남기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파브리티우스의 모든 그림 중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꼽히는 <파수꾼, 1654>. 이 그림에서 잠자는 파수꾼이 벽, 기둥, 아치, 이렇게 세 개의 구조물 앞에 앉아 있다. 작고 검은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는 파수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위쪽 아치에는 농부와 가축의 수호성인인 안토니우스 성인의 부조가 있다. 파브리티우스가 요절한 해에 완성된 이 그림은 밝은 색채와 맑은 빛, 분위기 있는 색조를 선호하는 작가의 성향과 서사적 변칙성을 구현하기 위해 기하학적인 건축 형태를 실험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운은 파브리티우스의 모든 그림 중 파브리티우스의 <파수꾼, 1654>을 "가장 신비로운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파수꾼>이 수 세기 동안 역사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의 형식적 모호성과 부족한 서사적 완결성 때문이다.


이 그림은 일관된 서사도, 은유적인 그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졸고 있는 군인이 있는 길모퉁이는 병사가 위치하는 장소로 특정한 의미를 갖추고 있지 않다. 더구나 일관성 없는 건축적 형태들과 졸고 있는 병사가 함께 놓여 있어야 할 연관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홀로 서 있는 기둥은 문이 완전히 열리는 것을 막는 것 외에는 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 듯하며, 모호한 분위기는 안토니우스의 반신상이 새겨진 석조 부조를 통해 더욱 고조된다.


최근 분석 결과, 작가가 관문 뒤편 벽을 걷는 두 번째 인물을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밝혔지만, 이 인물이 어떤 서사적 기능을 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보초병에게 위협이 되는 적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이 인물을 포함시킨 것은 그림의 신비를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파브리티우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경계를 넓히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은 그가 네덜란드 황금기의 거장 렘브란트를 제치고 최고의 화가로 등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파브리티우스의 화가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는 <Goldfinch: 황금방울새, 1654>라는 작품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황금방울새, 1654>는 네덜란드 회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인데 이 그림에서 파브리티우스는 유럽산 황금방울새(네덜란드어로 puttertje)를 묘사하고 있다. 이 새는 파브리티우스의 특징인 회칠한 벽에 기대어 서 있고, 두 개의 금속 또는 나무 반원형 안에 파란색 용기가 들어 있는 새 모이통 위에 앉아 있다.

황금방울새(1654), 마우리츠하위스 왕립 미술관, 헤이그

표면적으로는 이 그림이 죽은 새를 묘사하는 정물화 장르처럼 보이겠지만 파브리티우스의 그림은 정물화가 아니다. 그의 새는 분명히 살아 있으며, 언제든 날아갈 수 있다. <황금방울새>는 구성의 솔직함과 단순함 때문에 네덜란드 미술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강렬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다른 화가들처럼 그림의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하는 데 몰두하는 것과는 달리, 파브리티우스는 섬세한 디테일을 피하고 깃털로 장식된 액자와 동물 머리의 단축된 형태를 떠올리기 위해 일련의 느슨한 붓놀림을 사용했다.


또한 파브리티우스는 오히려 날아오를 준비를 한 새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림을 보면 새, 먹이 상자, 아래쪽 고리(그리고 상자에 있는 고리)가 빈 벽에 드리운 부드러운 그림자가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 작은 그림은 약 10cm 길이의 유럽산 금화조를 묘사한 것으로, 실제 크기로 그렸으며, 먹이통에 잠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먹이통은 먹이통을 고정하는 황동 고리에 가느다란 금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으로 그린 새는 기민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관람객을 향해 돌아서 있다.


빛의 효과를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 파브리티우스는 이 그림에서 미묘한 색조로 전달되는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또한 눈높이보다 약간 높은 부엌에 그림을 걸어 실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트롱프뢰유 기법을 사용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실제 부엌에서 금화조를 애완동물로 자주 키웠다. 더구나 당시 칼뱅주의자들은 금화조의 붉은 반점과 엉겅퀴를 먹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이 그림을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03년에 실시된 이 그림의 기술적 분석 결과, 황금방울새가 그려진 패널은 한때 금박 액자로 덮여 있었고 열 개의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역사가들은 이 작품이 한때 가구의 일부(아마도 캐비닛 문)였거나, 다른 구조물과 결합되어 살아있는 새가 아닌 채색된 새를 위한 새장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분석 결과 작품 표면에 작은 홈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이는 델프트 화약폭발 사고 당시에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득, 소설 <황금방울새>의 주인공 테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잔해에서 <황금방울새>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작고 노란 새가 하얀 먼지에 가려 희미하게 보인다." 폭발의 여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테오는 그 여파의 파편들을 모아 조각들을 맞추며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 그 중심에는 파브리티우스의 작품 '황금방울새'가 있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테오는 이 그림이 자신의 삶에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그게 누구의 삶이든 짧다는 것. 운명이란 잔혹하지만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의 한가운데서, 유기체에서 솟아올라 치욕스럽게 유기체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 그 순간에, 죽음이 건드리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영광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재앙과 망각이 이 그림을 따라 시간을 거쳐 내려왔다면,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이 불멸인 한, 나는 그 불멸에 작고 밝은 불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죽음과 함께 시작된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영원한 비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건 작은 <황금방울새> 한 마리가 “델프트 천둥소리”를 뚫고 저 높은 하늘 끝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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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interpreting Dreams(17c), Christus am Olberg(c.1641-1642),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어른들(1645)
View of a Row of Houses in a City(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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