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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학파 1

기원과 특징

by 박종수

델프트에서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수장으로 있던 성 루카 길드는 1654년 화약고 폭발로 파브리티우스가 죽자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된다. 페르메이르의 수장으로서의 역할과 작품제작이 이제 델프트 학파를 자리 잡게 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더 호흐의 가정 내 안뜰 풍경과 가정생활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델프트학파는 거의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I. 델프트 학파


아름다운 도시 델프트, 이 도시에는 우리가 아는 대단한 화가들이 여럿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164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직 응집력 있는 학파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640년대 후반과 1650년대 초반에 이르게 되면 서서히 공통된 관심사와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파울루스 포터(Paulus Potter: 1625–1654), 에마누엘 더 비테(Emanuel de Witte: 1617–1692),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 1637–1673),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 그리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 같은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한다.


델프트 학파는 가정생활, 교회 내부, 안뜰, 그리고 도시 거리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페르메이르는 이 학파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위에 언급된 화가들 역시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를 이끈 중요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각자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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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카렐 파브리티우스, 피터르 더 호흐 자화상


네덜란드 미술의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 한 명인 발터 리드케는, 델프트 학파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분명히 확인하고,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85점의 그림(그중 15점은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인상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리드케는 간략하게 "1650년대와 1660년대의 가장 혁신적인 델프트 예술가들은(물론 무의식적으로) 델프트에서 확립된 특징과 '새로운 예술의 요람'이라 부르는 하를렘에서 유행했던 자연주의적 묘사 방식을 종합했다"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리트케가 지적했듯이, 최근 미술사 연구는 델프트 학파(화파)보다는 델프트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의 개성과 그들이 네덜란드 남쪽지방이라는 더 넓은 맥락과 맺고 있는 관계에 더 집중 분석해 왔다. 일부 비평가들은 네덜란드에서는 예술의 "지역적" 차이가 덜 두드러진다고 주장한다. 국토가 그리 크지 않은 네덜란드는 강력한 상업적 유대와 매우 효율적인 교통 체계로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Carel_Fabritius04_1652ViewOfDelft-런던 국립 미술관.jpg 카렐 파브리티우스, 구교회가 보이는 델프트 풍경, 1652



2. 왜 델프트인가?


왜 한 도시가 다른 도시보다 특정 순간에 새롭고 중요한 회화 형태를 탄생시키는지는 알 수 없다. 요한네스 페르메이르 시대에 델프트는 주로 네덜란드 귀족과의 명망 있는 관계, 양조장, 도자기, 태피스트리, 그림 같은 거리, 운하, 안뜰 및 청결함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델프트는 네덜란드 국가에 엄청난 역사적,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도시였다.


델프트, 이 도시는 17세기 유럽에서 80년 전쟁이 시작될 때 모든 연합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활동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네덜란드의 주요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제독 피에트 헤인(Piet Hein: 1577–1629)과 마르텐 하페르츠 트롬프(Marten Harpertsz Tromp: 1598–1653),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 오렌지 공 윌리엄(Willem van Oranje: 1533–1584)의 아들 이자 전쟁 영웅 프레데릭 헨리(Frederick Henry: 1584–1647) 왕자, 그리고 법학자이자 정치가인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델프트는 분명 작은 도시였지만 고귀한 인재들로 가득했고 많은 시민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만큼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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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고 그로티우스(신교회 앞에 있는 동상), 2) 네덜란드 독립 영웅 빌럼 오렌지공(신교회 내)


17세기 초, 1600년부터 1650년까지 델프트의 예술 활동은 초상화,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 건축화 등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주요 예술 중심지였던 하를렘이나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그 중요성은 오히려 미미했다. 델프트 학파 이전의 회화는 주제와 양식 면에서 보수적이었지만, 높은 수준의 장인정신과 세련미, 그리고 절제미를 지향하는 경향을 특징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림을 포함한 희귀하고 정교한 작품에 대한 델프트 귀족 사회의 애정은 극동에서 돌아오는 배들이 델프트 내륙 부두에 내려놓은 이국적인 아시아 상품들의 유입으로 더욱 커졌을 것이다. 델프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 중 하나였기에 도시의 역동성은 그 어느 도시보다 대단했다. 따라서 델프트의 문화예술적 기대감은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컸을 것이다.


17세기 전반 델프트 회화는 세련미에도 불구하고 고급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이 부족했다. 리트케가 지적했듯이, "델프트 바로크"라는 개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형미는 단정했고, 붓놀림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델프트의 주요 예술가들은 혁신보다는 기존의 예술 전통(일부는 해외에서 수입)을 계승하는 데 주력하는 듯했다.


델프트에서 렘브란트(1606-1669)와 프란스 할스(1580-1666)의 혁명적 예술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사람들은 1650년 이전 델프트 회화의 본질적인 특징들이 델프트 학파의 예술을 도시의 과거 예술과 연결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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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이그 마우리츠후위스 박물관, 2) 프란스 할스, 웃는 소년 ca.1625, 3) 렘브란트, 호메루스, 1663


1650년대까지 델프트의 예술 작품은 델프트에서 걸어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헤이그의 예술 작품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많은 델프트 화가들이 헤이그 궁정에서 일하며 고품질 초상화와 역사화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델프트 학파가 자리를 잡으며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하자 델프트의 예술가들은 다양한 그림과 예술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정물화, 후원자와 궁정을 위한 초상화, 헤이그 궁정과 델프트의 귀족 수집가를 위한 정교한 역사화, 장식 예술품, 호화로운 태피스트리, 은제품 등 대부분의 문화예술작품들을 제작했다.


델프트의 젊은 예술가들이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 진출하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1650년 11월 80년 전쟁을 끝내고 스페인으로 부터 네덜란드 독립 기초를 세운 빌럼 오렌지 공의 죽음, 두 번째는 1654년 델프트의 화약 창고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크게 재건되었으며, 세 번째는 1672년 네덜란드는 람프야르(재난의 해)로 알려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강국들과의 또다른 전쟁을 하게되면서 헤이그 의회가 흔들리게 되자 많은 델프트 예술가들이 안정적 후원을 잃게 되었기 때문에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델프트가 자구책을 강구하며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는 듯했지만 시민 생활의 분위기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보수적이기만 했다. 더구나 델프트의 경제적 상황은 전쟁으로 인해 그리 오래지 않아 호황을 누리던 암스테르담에 비해 위축되어 갔고 더 이상 국가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못할 정도로 델프트의 위세는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침체되어 가던 델프트의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 델프트 주민 약 5만여 명은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며, 약 5만 점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도시 내에서 폭넓은 문화적 참여와 예술적 감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적 욕구에 대한 관심은 여러 침체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델프트 학파, 특히 미술시장의 확대 발전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게 된다.


12_파수꾼_(1654)쉬베린미술관.jpg 카렐 파브리티우스, 파수꾼, 1654



3. 델프트 학파의 특징


회화에서 "학파(school)"란 무엇일까? 회화와 관련하여 "학파"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네덜란드 학파"처럼 연대와 관계없이 한 국가의 화가들을 포함할 수 있다. 가장 좁은 의미로는 "라파엘 학파"나 "렘브란트 학파"처럼 한 예술가의 영향을 받아 활동한 화가 집단을 의미한다. 세 번째 의미로는 "피렌체 학파"처럼 한 도시나 지방에서 공통된 지역적 영향을 받으며 디자인, 색채, 기법 등에서 어느 정도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화가들을 의미한다.


특정 지역의 화가들은 현대보다 훨씬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작품을 합법적으로 제작하고 판매하려면 지역 미술 상거래를 규제하고 화가들의 질병과 노령을 지원하는 예술가와 장인들의 단체인 ‘길드’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 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판매할 수 있다는 말이다.


Delft (2).JPG 델프트 성 루카 길드 전경, 지금은 J. 페르메이르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도시에 있는 각각의 길드는 명확하게 정의된 규칙과 전통, 그리고 젊은 화가들이 공인된 길드 수장 밑에서 4년에서 6년 동안 일하며 배움의 기회를 통해 나름의 학풍을 익히도록 하는 도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길드의 수장인 마스터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많은 제자들에게 각인시키고, 그들 중 다수는 마스터가 번영을 보장해 준 지역 수집가들의 취향에 기꺼이 순응해야 했다.


"델프트 학파" 또는 "델프트 화파"는 세 번째 유형의 학파에 속하지만, 그 "회원"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어떤 학파에도 속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의무적인 길드 회원 자격에 묶여 있었고, 델프트와 같은 작은 마을에서는 필연적으로 서로 교류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지역별 장르 화가들의 예술적 연대. 특히 1650년 이후 네덜란드에서 동질적인 장르 풍경을 제작했던 유일한 도시였던 라이덴과 하를렘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라이덴에서는 헤리트 다우(Gerrit Dou: 1613-1675)와 그의 제자 프란스 판 미에리스(Frans van Mieris the Elder: 1635-1681)의 영향력이 컸으며, 이는 18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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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ans van Mieris the Elder, A man and a Woman, 1678, Rijksmuseum, Amsterdam

2) Gerrit Dou, Self-Portrait, 1665,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3) Pieter Brueghel(the Elder), The Dutch Proverbs, 1559


또한 하를렘은 브뤼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30) 전통의 영향을 받은 농촌 이미지로 유명했다. 다른 네덜란드 도시인 도르드레흐트도 예술가들 간의 짧은 협업 기간을 경험했지만, 지역적으로 뚜렷한 "유파"를 형성할 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한편,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과 같은 주요 도시들 역시 뛰어난 장르 화가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스타일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한때 장르 회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위트레흐트는 1650년 이후 오히려 이 분야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이런 상황들은 결국 ‘학파’로 까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델프트는 짧은 기간이지만 학파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델프트 길드 '성 루카 길드'를 중심으로 회원들이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델프트 화가들이 공동으로 주제를 정하고 이를 그려나간다. 특히 이들은 가정 내 '실내풍경'을 가장 인기 있는 주제로 은연중에 선택하고 대부분의 델프트 화가들이 그렸다.


이들이 실내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이 주제는 다른 곳에서도 점차 환영받는 주제로 발전해 나간다.) 구애와 음악 연주, 집안일, 은밀한 즐거움, 그리고 가족생활 등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선구적인 역할을 한 델프트의 성 루카 길드의 수장이던 카렐 파브리티우스는 '성 루카 길드'의 수장으로서 함께 델프트라는 '도시 풍경화'를 그리도록 한다. 델프트 화가들의 <델프트 풍경>은 이런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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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De Hooch, A Woman and Child in a Bleaching Ground ca.1657–ca. 1659, 개인소장

2) Carel Fabritius, View of Delft, 1652, 런던 국립미술관

3) J. Vermeer, View of Delft, 1660-1661, 마우리츠 후위스, 헤이그


뿐만 아니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역시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1654년 델프트 화약폭발로 사망한 후 ‘성 루카 길드’의 수장이 되자 파브리티우스가 했던 것처럼 '공통의 주제'를 제안한다. 그는 네덜란드 라이덴 출신의 성공한 예술가인 헤리트 테르 보르흐(1617–1681)와 프란스 판 미에리스(1635–1681)의 작품을 오마주한 델프트의 특징적인 레퍼토리를 제작한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편지 읽기”와 “편지 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편지 쓰기와 편지 읽기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가브리엘 메추'의 작품 '편지 읽기'와 '편지 쓰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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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Vermeer, 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 1670-71, National Gallery of Ireland: Dublin

2) J. Vermeer, Woman reading a letter, 1662-63, Rijksmuseum: Amsterdam


이와 함께 델프트 화가들은 대부분 가정 내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피터르 더 호흐가 중심이 되어 가정생활상을 그려나간다. 델프트 화가들이 그린 가정 내부 장면은 일반적으로 캔버스의 왼쪽 끝에 위치한 창문에서 조명이 비추고 있었는데, 피터르 더 호흐는 밝은 배경에 인물의 실루엣을 표현하기 위해 혁신적인 역광을 사용하기도 한다. 빛은 거의 항상 관례에 따라 그림의 왼쪽에서 들어오지만 때로는 거꾸로 사물의 그림자를 만들기도 한 것이다.


델프트 화가(특히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는 빛 그 자체를 위해 많은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빛’은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로 인해 일부 비평가들은 페르메이르 그림의 진짜 주제는 빛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회화에서 인기 있는 인공조명 계획, 예를 들어 달빛, 촛불 또는 횃불은 델프트 학파 화가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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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De Hooch, The Bedroom, 1658-1660,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2) J. Vermeer,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1662,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델프트 실내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른 지역의 비슷한 작품들보다 전반적으로 밝았다. 많은 실내 그림의 배경 벽은 밝은 회색이고, 그림자는 비교적 밝고 차가운 색조를 띤다. 바닥 타일, 창문, 천장 들보, 가구를 포함한 건축적 특징의 원근법적 구성은 이전에 그려진 부르주아 실내 그림보다 훨씬 더 일관성이 있었다.


델프트 학파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빛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회화 기법을 통해 3차원적 깊이감을 조성하는 데 사용되는 기하학적 원근법을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델프트 화가들은 그림 속 공간적 깊이의 환상을 구현하기 위해 기하학적 원근법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집중적인 관찰을 통해 빛, 색, 그리고 윤곽을 활용하여 깊이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연광과 공기가 방을 채우고 인물과 주변 환경 주변을 흐르는 듯한 느낌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델프트 화가들은 따뜻한 색과 밝은 색은 캔버스 표면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인식되는 반면, 차가운 색과 어두운 색은 가까이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대충 그린 사물은 날카로운 윤곽으로 꼼꼼하게 그린 사물보다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을 채도가 높은 원색(더 호흐와 페르메이르가 모두 사용한 기법)으로 표현하면 주변 사물과 구별되어 공간적으로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사물을 연한 색으로 표현하면 간과되고 더 멀리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물감의 질감조차도 공간적 깊이를 정의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두꺼운 ‘임파스토 기법’으로 사물을 표현하면 눈에 일종의 시각적 고정 장치가 제공되어 사물이 실체적이고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배경의 보조 인물에만 사용되는 얇고 희석된 물감으로 묘사된 사물은 상대적으로 비물질적이고 따라서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델프트 화가들은 통풍이 잘 되는 공간의 느낌을 높이기 위해 그림자를 더 밝은 톤으로 표현했는데, 때로는 그들만의 색을 사용하기도 했고, 주변 물체의 색상과 반사율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조명 조건에 의해서도 반사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10-1659-Vermeer_-_A_Lady_and_Two_Gentlemen.JPG J. Vermeer, A Lady and Two Gentlemen, Herzog Anton Ulrich Museum: Braunschweig


페르메이르의 <숙녀와 두 남자>는 델프트의 가장 진보적인 화가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했던 공간을 정의하는 기법의 가상 요약집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가 입은 호화로운 비단 드레스의 가장 밝은 부분은 당시 화가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가장 진한 붉은색 안료인 순수한 주홍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드레스의 그림자는 그림자를 묘사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익명의 짙은 갈색이 아닌, "긍정적인" 붉은색으로 표현되었다. 각 주름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드레스의 외곽선은 균일하게 선명하다. 인물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와 관람객의 무릎 위에 있는 듯하다.


한편, 테이블 뒤에 웅크리고 있는 낙담한 표정의 배경 인물은 칙칙한 흙빛으로 칠해져 있다. 그의 옷 안쪽 윤곽과 해부학적 특징은 날카로운 명암 대비보다는 미묘한 색조 변화로 표현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두 인물은 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마치 한 인물은 전면으로 돌진하는 듯하고, 다른 한 인물은 어두운 배경 속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공간적 깊이가 주는 탁월한 효과는 직접 봐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림의 세련된 표면 질감, 윤곽선의 변화, 그리고 미묘한 색채의 미묘한 차이들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델프트의 가정과 안뜰 풍경


델프트에서 창조된 또 다른 주제는 도시 안뜰 풍경이었을 것이다. 파브리티우스의 <델프트 풍경>은 일반적으로 델프트에서 그린 가장 초기의 도시 풍경으로 여겨지지만, 더 호흐는 이 유형의 풍경을 눈부시게 성숙시켰다. 더 호흐는 델프트 도시 안뜰의 지형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풍화된 벽돌과 회반죽 벽, 그리고 나뭇잎과 반사되는 물, 그리고 반짝이는 기와를 쉴데라흐티크(schilderachtig), 즉 "그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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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De Hooch, Village House, 1665, Rijksmuseum: Amsterdam

2) Peter De Hooch, A dutch courtyard, 1658-1660,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이런 방법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고요함과 시대를 초월한 집안일의 반복을 포착하는 방식이었다. 1650년대 이후의 델프트 도시 풍경과 건축 회화는 개인적인 인상, 즉 너무 익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물의 모습을 담고 있어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페르메이르는 안뜰을 직접 그린 적은 없지만, 그의 두 개의 거리 풍경(그중 하나는 현재 소실됨)은 더 호흐의 안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07-1657-58-Vermeer-_Gezicht_op_huizen_in_Delft,_bekend_als_'Het_straatje.jpg J. Vermeer, 델프트 골목풍경, 1657-58: Rijksmuseum: Amsterdam


델프트에서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수장으로 있던 성 루카 길드는 1654년 화약고 폭발로 파브리티우스가 죽자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된다. 페르메이르의 수장으로서의 역할과 작품제작이 이제 델프트 학파를 자리 잡게 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더 호흐의 가정 내 안뜰 풍경과 가정생활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델프트학파는 거의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내부 환경은 일반적으로 배경 벽과 바닥을 보여주고, 화면의 가장 왼쪽이나 오른쪽에는 두세 개의 단순한 가구를 배치한다. 아마도 화면 중앙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주위에 움직이는 인물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배경 벽은 일반적으로 비어있거나 당시에 애용하던 벽지도나 액자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 반면, 바닥은 그냥 비어있거나 대리석 타일이나 평범한 나무판자로 덮여 있을 것이다.


창문을 그릴 경우 대략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배경 벽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빛이 흘러내리며, 광원에서 멀어질수록 점차 약해진다. 후기 실내 작품 중 일부에서는 직접 창문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림자가 화면의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바닥으로 내려와 창문이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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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De Hooch, The Visit, ca.1657: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J. Vermeer, The Glass of Wine, 1660-61, Gemäldegalerie: Berlin


델프트의 실내장식은 남부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방의 왼쪽 모서리를 통합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모델로 했지만, 그림 속 공간에서 인물들이 더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델프트 실내장식은 일반적으로 폭보다 높이가 높아 화가가 몇 명의 촘촘하게 짜인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초기 실내장식의 텅 빈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며 와인을 마시고 화가와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손짓하는 활기찬 배우들과는 달리, 델프트에서 그린 실내장식의 인물들은 관객에게 실제 사람들처럼, 실제 환경 속에서 실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학자들은 이러한 실내 풍경이 사실과 허구가 인위적으로 결합된 것임을 밝혀냈지만, 대부분의 관람객은 마치 3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한 가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목격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델프트의 도시 경제가 점차 도자기산업으로 옮겨가면서 그림에 대한 미술 시장의 판도는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쇠퇴해 간다. 미술계에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혁신의 불꽃은 대부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다른 사람들이 더 큰 기회를 찾아 델프트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델프트에 남아 작업을 이어간다.


1660년 대에 이르러 많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 특히 피터르 더 호흐 같은 화가들이 델프트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델프트의 ‘성 루카 길드’에서 페르메이르가 맡았던 수장의 리더십은 자연스레 약화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지적하듯, 이질적인 예술가 그룹으로 느슨하게 구성된 델프트 학파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델프트 외부에서 태어났지만 165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다양한 기간 동안 델프트를 오가며 활동했다. 그러나 화가들이 생활을 영위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모인 델프트에는 강력한 중심인물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된다.


델프트, 1650년대 초부터 성 루카 길드를 중심으로 ‘학파’를 결성해 1660년대까지 높은 수준의 독창성을 지닌 그림들을 계속해 제작했다. 그러나 델프트 화풍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더 유망한 시장, 특히 암스테르담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르메이르가 1675년 사망할 무렵, 델프트는 다시 예술의 낙후 지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카렐 파브리티우스는 물론이고, 하를렘에서 활동한 피터르 얀스 산레담(Pieter Jansz Saenredam, 1597-1665)이나 델프트 성 루카 길드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헤이그로 이사를 간 파울루스 포터르(Paulus Potter, 1625~1654), 심지어 암스테르담에서 주로 활동했던 니콜라스 마에스(1634–1693) 조차도 한때 델프트 학파 형성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이 화가들 중 누구도 자신이 "델프트 학파"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델프트라는 도시를 단순히 거쳐가는 곳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스쳐 지나간 흔적들이 대단히 깊은 상처를 남기듯이 그들은 델프트 학파(화파)를 형성했고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로서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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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icolaes Maes, Self portrait, 1684, Dordrechts Museum

2) Paulus Potter, Cattle in a Meadow, 1652, 개인소장

3) Pieter J. Saenredam, Nieuwekerk in Haarlem, 1652, Museum of Fine Arts: Budapest



※ 참고 서적

Peter C. Sutton, Pieter De Hoogh: Complete Edition (Oxford: Yale University Press 및 Wadsworth Atheneum, 1980), 52.

Adriaan Waiboer, "Vermeer and the Masters of Genre Painting," Vermeer and the Masters of Genre Painting: Inspiration and Rivalry , Adriaan Waiboer와 Eddy Schavemaker 편집(런던 및 뉴헤이븐: 예일대학교 출판부, 2017), 9.

Liedtke, Walter A.. Vermeer and the Delft School. 2001,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Wikipedia : Delft school (painting), Carel Fabritius, Pieter de Hooch, Johannes Vermeer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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