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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학파 3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by 박종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피터르 더 호흐가 보여주는 실내처럼 느끼게 해주는 풍경은, 멀리서 반쯤 열린 문의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다른 색깔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빛이 중간중간 비치며 빛이 나고 있었다."



I. 델프트로 온 피터르 더 호흐


피터르 더 호흐(Peter de Hooch: 1629~1683), 그는 네덜란드 황금기 시대의 화가로 가정 풍경을 담은 풍속 화가이다. 더 호흐는 1629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로테르담 개혁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벽돌공이었고, 어머니는 조산원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성인으로 성장해 화가로서 길드의 회원이 되기까지 다소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의 어릴 적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대부분의 기록 자료를 볼 때 그가 로테르담, 델프트,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더 호흐에 대한 전기를 쓴 아놀드 호브라켄(Arnold Houbraken)에 따르면,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가까운 하를렘에서 야곱 오흐테르펠트(Jacob Ochtervelt: 1634-1682)와 풍경화가 니콜라스 베르켐(Nicolaes Berchem: 1622-1683)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공부를 했다고 한다.


더 호흐는 1650년 린넨 상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유스투스 드 라 그랑주 밑에서 화가 겸 하인으로 일을 했는데 그와 함께 장사를 하기 위해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652년 델프트에 왔을 때 이곳에 정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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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ieter de Hooch, 자화상(1648), Rijksmuseum, Amsterdam

2) Pieter de Hooch, Man Offering a Glass of Wine to a Woman (1653),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3) Pieter de Hooch, Tric Trac Players (1652-1655), Rijksmuseum, Amsterdam


델프트에서 정착을 한 더 호흐는 1654년 델프트 출신 야네트예 판 데르 부르흐(Jannetje van der Burch: 1654년 결혼, 1667년 사망)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낳는다. 한편, 델프트에 온 지 3년이 지난 1655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보다 2년 늦게 ‘델프트 성 루카 길드’의 회원이 되면서 델프트 학파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더 호흐는 델프트에 거주하는 초창기에 당시 델프트 ‘성 루카 길드’의 수장이었던 화가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와 니콜라스 마에스(Nicolaes Maes)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모두 렘브란트의 촉망받는 제자로 활동을 하다가 델프트로 와 정착을 한 화가들이었다. 더 호흐는 그들의 도움으로 성 루카 길드의 회원이 된다. 하지만 그 역시 페르메이르처럼 12 길더의 입회비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더 호흐는 중산층의 주택 실내와 정원을 전문으로 그렸다. 그는 복잡한 실내 공간과 햇살 가득한 안뜰을 그릴 때 원근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빛에 반응하는 능력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작은 규모였는데, 눈에 띄지 않는 일상생활의 작은 세부 사항들을 매우 정교하게 관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정교한 빛 처리 방식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더 호흐의 붓놀림은 종종 거칠기는 하지만 그의 묘사 방식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 호흐 작품의 약 3분의 1은 가정과 관련된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그의 가정생활 묘사는 네덜란드 풍속화의 특징인 지나친 감상주의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그의 서사는 대체로 직설적이며, 도덕적인 암시나 도상학적 미묘함에 대한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그림 속 그림(예를 들어 벽에 걸린 액자그림)을 사용하여 주요 주제에 대한 보충 설명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그의 예술의 의미는 대개 은밀하게 암호화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묘사된 대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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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Pieter de Hooch, The Courtyard of a House in Delft(1658), NationalGallery, London

5) Pieter de Hooch, Village House(1665), Rijksmuseum, Amsterdam

6) Pieter de Hooch, A dutch courtyard(1658-1660),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더 호흐는 델프트에서 거주하던 시기에 장르 회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인 개인적이고 도식적인 안뜰의 풍경 (그림 5)을 거의 혼자서 창조하고 그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집안에 위치한 중앙정원은 네덜란드 주택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었는데 집의 중앙이나 집 뒤쪽에 만들었다. 그런데 도시에 있는 주택들은 관례적으로 길고 좁은 대지에 서로 가까이 붙여서 지었기 때문에 중정의 우선적인 기능은 집 내부에 빛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더 호흐는 배경에 즉시 알아볼 수 있는 구조물을 넣는 것을 습관적으로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단순히 실제 중정을 물감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실내 풍경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중정 묘사는 궁극적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널리 퍼진 회화적 관습을 교묘하게 결합한 인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정 풍경 묘사는 모티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더 호흐는 여러 모티브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지만, 그의 특기는 소위 '투명문' 모티브였다. 이 모티브는 다른 방, 안뜰, 또는 그 너머 거리를 2차, 3차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겉보기에 단순한 이 장치는 화가에게 더욱 복잡한 건축 공간을 창조하는 동시에 서사를 확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미술사학자 마사 홀랜더는 더 호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160점이 넘는 그림 중 이 모티브를 보여주지 않는 작품은 12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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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Pieter de Hooch, The Bedroom(1658-1660),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8) Pieter de Hooch, The Mother(1659-1660), Staatliche Museen, Berlin

9) Pieter de Hooch, A Mother's Duty(ca. 1658), Rijksmuseum, Amsterdam


더 호흐의 원숙기 작품에 등장하는 빛, 원근법, 그리고 묘사적 디테일은 종종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제 장소를 충실하게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화가의 상상력과 구도 기술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


더 호흐, 그는 델프트 ‘성 루카 길드’에서 카렐 파브리티우스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같은 시기에 델프트 학파의 일원으로 함께 활동을 했다. 그런데 더 호흐는 특히 페르메이르와 주제와 양식이 비슷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더 호흐가 페르메이르와 같은 시대, 같은 학파의 일원으로 비슷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 화가인 두 사람은, 더 호흐가 1629년에, 페르메이르가 1632년에 태어나 비슷한 나이에 거의 같은 시간대를 함께 보낸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 델프트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둘 다 네덜란드 가정의 내부를 배경으로 한 풍속을 그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풍속화가 매우 섬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더 호흐는 완벽한 가정의 명료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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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Pieter de Hooch, Interior of a Dutch House(1657), Louvre Museum, Paris

11) Pieter de Hooch, Woman and a Child in a Pantry(ca.1658), Rijksmuseum, Amsterdam

12) Pieter de Hooch, Nursing Mother, and Child with Serving Maid(1663-1665),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의 관계는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은 더 호흐가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했지만, 최근에 와서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 부족을 고려할 때, 페르메이르가 어떤 경우에는 앞서 나갔고, 어떤 경우에는 더 호흐가 앞서 나갔다는 주장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의 초기 작품들이 특별히 독창적인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오늘날 더 호흐의 예술은 페르메이르의 예술에 비해 지적인 심오함과 철학적 함의(그리고 아마도 야망)가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더 호흐는 의심할 여지없이 두 화가 중 더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다재다능한 화가였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 (* 더 호흐는 160여 점을, 페르메이르는 40점이 안 되는 작품을 남겼다.)


더 호흐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적 요소는 역시 빛에 대한 것과 관련이 크다. 더 호흐는 페르메이르가 후기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과 <기타 연주자>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전통적인 좌우 경사 조명 외에도 다양한 조명 기법을 탐구했다. 동시대 화가들과 달리 더 호흐는 야외 풍경뿐만 아니라 실내 풍경에도 역광을 활용했다. 특히 도자기 그릇, 윤이 나는 나무, 유리에 반사되는 빛을 최상의 정확도로 포착하는 그의 능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창문이나 열린 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어둑한 실내를 비추는 그의 묘사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다른 관점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장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지만, 더 호흐의 작품에서는 그가 어떤 종류의 광학 장치에 의존했거나 심지어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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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Pieter de Hooch, Woman drinking with two Men(ca.1658), The National Gallery London

14) Pieter de Hooch, Soldiers Playing Cards(1658), Private Collection

15) Pieter de Hooch, Cardplayers(1658), Royal Collection (Buckingham Palace), London


페르메이르는 당대에 더 호흐보다 더 높은 전문적 지위(1654년 10월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화약폭발로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성 루카 길드’ 수장이 된다.)를 얻었지만, 이후 수 세기 동안 페르메이르의 명성은 오히려 희미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더 호흐의 서명은 오히려 페르메이르가 죽은 후 그의 여러 작품에 추가되어 마치 더 호흐의 작품인 것처럼 조작해 금전적 가치를 높이는 데 사용된다. 그중에는 심지어 페르메이르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회화의 알레고리>가 포함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페르메이르의 또 다른 작품인 <연애편지>도 한때 더 호흐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그의 사후 더 호흐의 서명이 새겨진 것이 발견된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닌데, 당시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페르메이르의 그림 가치를 부풀리려는 시도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서로 혼동되는 것은 고의로 조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의 그림 자체가 같은 주제를, 같은 구도로,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기에 그런 오해나 실수가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은 더 호흐의 작품을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했는데 더 호흐가 그린 <A Woman with a pair of scales: ca.1664 >는 페이메이르의 <Woman holding a balance: 1664>라는 작품과 매우 유사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더 호흐의 작품과 페르메이르의 작품 유사성은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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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Johannes Vermeer, Woman holding a balance(1664),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17) Pieter de Hooch, A Woman with a pair of scales(1664), Academy of Fine Arts Vienna

* 1664년 두 화가는 동시에 "저울질하는 여인"을 주제로 '구도'와 '소재'까지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린다. 심지어 그림 속 모델이 입은 여인의 팔이 드러난 남색 옷과 머리에 쓴 두건 등이 모두 같다.


더 호흐의 초기 예술적 노력은 주로 마구간과 선술집과 같은 배경에서 군인과 농민을 묘사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다 호흐의 주요 관심사는 주제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이러한 장면을 사용하여 빛과 색상 그리고 관점에 대한 그의 숙련된 솜씨를 다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 호흐 역시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며, 캔버스의 햇빛이 비치는 부분은 그의 후기 작품에 비해 차갑고 옅어 보인다. 특히, 더 호흐의 숙련도는 1654년경에 그린 두 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휴식 중인 인물을 묘사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더 호흐의 초기 예술적 발전은 1655년경에 그린 그의 그림에 특히 잘 드러나 있다. 1654년까지 그는 군인들 모습을 묘사하는 데 정점에 도달했고, 이러한 그의 대상에 대한 관점은 1654년 결혼 초까지 지속되었다. 1650년대 중반에 더 호흐는 가족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가정생활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그림작업은 ‘가정 풍속’으로 초점을 전환한다.


이런 가정의 풍습에 대한 작업들은 어쩌면 그의 가족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부유한 여성들이 모유 수유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그의 작품은 조산원에서 일하던 그의 어머니 모습을 기억해 내면서 그것들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그의 시그니쳐 같은 집안의 정원 풍경은 더 호흐가 어릴 적 로테르담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의 어머니가 가꾸던 집안의 정원 모습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린 더 호흐의 그림들은 종종 델프트에 더 호흐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페르메이르의 그림과 유사한 정교하고 섬세한 빛 처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더 호흐는 인물과 내부 기하학을 결합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처음으로 선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주제와 구성도 더 호흐와 페르메이르가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기에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은 페르메이르가 더 호흐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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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ieter de Hooch, Figures Drinking in a Courtyard(1658), Private collection

19) Pieter de Hooch, Leisure Time in an elegant Setting(1664),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20) Pieter de Hooch, Woman nursing an infant, with a child and a dog(1658-1660), Fine Arts Museum of San Francisco


1650년대 후반, 더 호흐는 전례 없는 공간적 질서와 자연주의를 선보이는 새로운 장르의 회화를 개척한다. 무심코 관찰하고 비공식적으로 보이는 집과 안뜰의 고요한 묘사는 정교한 원근법과 공간 정확도에 대한 세심한 주의로 신중하게 구성된다. 이러한 미묘하게 획기적인 그림 중 다수는 여주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군인이 있는 즐거운 회사와 같은 그의 초기 작품의 주제를 다시 소환한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시대의 희미하게 밝은 마구간과 선술집은 중산층의 햇살이 비치는 실내와 정원, 그리고 안뜰로 대체된다.


더 호흐의 도시 풍경 역시 네덜란드 회화에서 그리 흔한 장르는 아니었는데, 당시 델프트 학파의 노력이 빚어낸 성과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당시 델프트 학파의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그린 <델프트 풍경>과 함께 피터르 더 호흐의 <안뜰과 거리 풍경> 묘사, 그리고 페르메이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 등이 도시 환경에 대한 초기 작품들로 유명하다. 이 작품들은 도시 경관을 강조한 거의 최초의 작품들로서 더 호흐가 델프트에 머물던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한편, 1663년에 제작된 더 호흐의 풍속화는 건축물에 대한 그의 집중력 있는 관찰을 보여준다. 그는 타일, 가구, 창문뿐만 아니라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자세와 함께 이러한 요소들을 활용하여 그림의 구조와 철저히 원근법이 적용된 공간을 구성해 내고 있다.


더 호흐가 보여주는 그림의 깊이를 창조하는 가장 효과적인 '기법'은, 그림의 배경으로 운하 건너편에 있는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의 집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풍경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 특별한 기법을 사용하여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느끼는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피터르 더 호흐가 보여주는 실내처럼 느끼게 해주는 풍경은, 멀리서 반쯤 열린 문의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다른 색깔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빛이 중간중간 비치며 빛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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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Pieter de Hooch, A Musical Conversation(1674), Honolulu Museum of Art

22) Pieter de Hooch, Couple with Parrot(1668), Wallraf Richartz Museum, Köln

23) Pieter de Hooch, A Musical Party(1677), National Gallery, London



3. 암스테르담 시대


더 호흐의 암스테르담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정확한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더 호흐가 1674년에 세무 등록이 완전히 면제된 기록을 볼 때 그의 암스테르담에서의 생활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더 호흐의 재정상황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선적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국제적인 위상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유럽열강들과의 전쟁이 가장 큰 불안요소로 작용을 했을 것이다.


여하튼, 1661년 더 호흐는 델프트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델프트를 떠난 후, 더 호흐는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후원자들은 네덜란드가 80년 전쟁(1568-1648)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하는 번영의 시기에 무역과 주식 거래가 증가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는 델프트-암스테르담 전환기에 더 호흐의 초기 작품들과 일치한다. 이 시기에 그는 대리석 바닥과 높은 천장이 있는 호화로운 실내에서 찍은 사진처럼 고급스럽고 화사한 장면과 가족 초상화를 그려 유명세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암스테르담에서도 여전히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살았다.


더구나 1667년 더 호흐는 38세의 나이에 아내를 잃고 어린 자녀들을 혼자 돌보아야 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더 호흐의 생활은 이제 작품활동을 하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더 호흐가 그리는 작품들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아이와 하녀를 묘사하는 등 델프트 시대의 모티브를 재현하거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군인 장면을 재현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고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그리는 작품들은 점차 그 품질이 저하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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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Pieter de Hooch, A sick child(ca.1675), Pushkin Museum, Moscow

25) Pieter de Hooch, The Greeting(1675), private collection

26) Pieter de Hooch, Card Player at a table(1672), private collection


델프트 시대의 재해석은 미미한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이러한 자기 반복의 사례는 그다지 신선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전반적으로 과장되게 어두운 톤을 띠고 있으며, 특히 음울한 주홍색과 그림자에 널리 퍼진 차가운 파란색과 같은 색채들이 거칠어지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4. 더 호흐의 유산


그의 예술적 유산은 예술 평가 방법이 점차 공식화되면서 19세기까지 계속 주목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쟝 프란시스 밀레(Jean-François Millet)와 같은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더 호흐의 그림 가치는 급등했고,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페르메이르를 비롯한 다른 네덜란드 황금기 예술가들의 일부 작품들이 시장 가격을 높이기 위해 마치 더 호흐의 작품인 것처럼 거짓으로 표시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더 호흐의 실내 장식 그림을 칭찬하는 등 여러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더 호흐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에 이르러 1945년 반 미거렌의 작업실에서 미완성 작품 "더 호흐의 그림"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더 호흐의 명성을 빗댄 작품들로 미발표작품이라는 소문 역시 모두 헛소문이었고, 작품들 또한 모두 위조품으로 밝혀진다. 더 호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씁쓸한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아마도 네덜란드의 미술 시장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문화 활동의 모든 측면이 심하게 압박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미술시장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결코 더 호흐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생활이 아내가 죽은 후 어린 자녀들을 홀로 돌봐야 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더 호흐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그림작업을 해나간다. 로테르담에서 어릴 적 엄마와 함께 했던 가정의 모습, 아내와 아이들을 낳고 지냈던 델프트에서의 추억들을 가정풍속화라는 이름으로 그려보지만 결국 그를 억누르는 경제사정과 건강문제 등은 더 이상 더 호흐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만든다.


결국 더 호흐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1683년 암스테르담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입원 당시 상황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사망 날짜 역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단지 그가 상당 기간 동안 암스테르담 돌하위스(정신병원)에서 지내다 1683년 사망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 참고 문헌


제인 터너, 렘브란트에서 페르메이르까지: 17세기 네덜란드 예술가들(뉴욕: 세인트 마틴스, 2000)

Peter C. Sutton, Pieter De Hoogh: Complete Edition (Oxford: Yale University Press 및 Wadsworth Atheneum, 1980)

알베르트 블랑케르트, 델프트의 페르메이르(옥스퍼드: 파이돈, 1978)

Wikipedia : Delft school (painting), Pieter de Hooch, Johannes Vermeer, etc.


27) Pieter de Hooch, Concert(1680), Hermitage Museum, Saint Peter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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