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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 이야기

G. 클림트의 여인들

by 박종수


클림트의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는 특정 시대를 구현하는 동시에 그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역사의 질곡을 그려낸 애절한 순애보 같은 서사적 작품이라 하겠다.



1.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 경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엘리자베스 레더러(Elisabeth Lederer, 1894-1944)의 초상화’는 클림트 후원자인 세레나 레더러(Serena Lederer, 1867-1943)와 아우구스트 레더러(August Lederer, 1857-1936) 부부의 의뢰로 그린 작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과 상징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동안 클림트가 그린 여인들 초상화와 다른 신화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1914년에 그린 이 작품은 클림트의 가장 고귀한 후원자의 딸이 황제만 입었던 중국식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 패션과 판타지가 융합된 이 초상화는 ‘엘지자베스’를 비엔나 최고 스타일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015 frau.jpg G. Klimt,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1914-16)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시아 디자인의 화려한 직물에 대한 심취는 이 작품에서 정점에 달한다. 군인, 궁정신하, 그리고 천상의 모티프가 담긴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를 마치 황후처럼 묘사하고 있다. 실제 인물의 키처럼 큰 크기인 183cm x 122cm에 달하는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는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의 최고 화가로서 최고의 기량과 명성을 누리던 시절에 탄생했다.


그런데 2025년 11월 18일 뉴욕에서 소더비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Bildnis Elisabeth Lederer)'를 에스떼 로더 화장품 회사 회장인 레너드 A. 로더 컬렉터 이브닝 경매의 일환으로 선보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인 아우구스트 레더러(August Lederer, 1857-1936)의 딸인 젊은 엘리자베스 레더러, 그녀를 묘사한 이 그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매에 출품된 적이 없다. 1914년부터 1916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중국식 용 문양이 그려진 제복을 입은 20세의 젊은 여인의 초상화인데 로더의 집 거실벽에 거의 40여 년간 걸려 있었다.


한편, 이 작품과 함께 클림트가 사랑한 여름 별장 아터제(Attersee)를 배경으로 그린 두 점의 풍경화 작품들, 1903년에 그린 ‘꽃이 만발한 초원’(Blumenwiese)과 1916년 작 ’아터제 운터라흐의 숲 속 경사면(Waldabhang bei Unterach in Attersee)' 등이 함께 경매에 나왔다. 이 작품들 역시 지금까지 경매에 출품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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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limt02-Forest Slope in Unterach on the Atterse_1916.jpg
G. Klimt 작품 1) 꽃이 만발한 초원(1903), 2) 아터제 운터라흐의 숲속 경사면(1916)


경매 결과는 예상보다 고가의 낙찰가를 기록했다. 예상가 1억 5천만 달러를 훨씬 넘는 2억 3,640만 달러(수수료 포함 한화 약 3,465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작품 구매자는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금액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로 문디’에 이어 세계경매가 2위를 기록했다.


역사상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ca.1500), 이 작품은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수료 포함 4억 5,030만 달러에 낙찰되어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비공식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하마드 빈살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Leonardo da Vinci, Salvator Mundi, oil on walnut, 45.4×65.6cm, Louvre Abu Dhabi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려한 여인의 초상화가 미술품 경매사상 두 번째로 비싼 그림이 되었고, 클림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화가의 자리에 등극했다. 한편, 이 작품과 함께 경매에 나온 클림트의 풍경화 2점, ‘꽃이 만발한 초원’은 8,600만 달러(한화 약 125억원)에, 그리고 ‘아터제 숲 속 경사면’을 담은 풍경화는 6,830만 달러(한화 약 100억원)에 낙찰되었다.


클림트의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는 화장품 재벌 레너드 A. 로더의 유산에서 나왔다. 화장품 에스떼 로더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한 그가 지난 6월 타계하자 이 작품이 경매시장에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강탈했는데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나치가 강탈했던 작품을 엘리자베스의 동생 에리히 레더러가 돌려받은 후 1983년 매각하게 되자 로더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로더는 2013년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 작품 78점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했으나 이 작품만은 유일하게 그의 거실에 걸어두고 있었다.




로더의 형제 로널드는 2006년 사적 거래에서 ‘금빛 여인’으로 알려진 ‘아델 블로흐 바우어 초상 1’을 당시에 1억 3,500만 달러(한화 약 2,000억 원)에 구입했고, 2023년 6월 28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클림트의 ‘부채를 든 여인’이 한화 약 1,600억 원 정도(108.4 밀리언 달러)에 팔린 것이 당시 클림트 작품 경매 최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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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limt 작품, 1) Adele Bloch-Bauer I(1907), 2) Dame mit Faecher(1917-18)



2.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 이야기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는 다소 진부한 서사의 역사를 지닌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클림트가 레더러 가문의 여성을 그린 세 점의 초상화 중 두 번째 작품이다. 그 누구도 클림트에게 한 집안의 인물을 세 번씩이나 작품 의뢰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일무이의 작품제작 의뢰 기록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중국 미술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정권은 이 작품을 압수하지만 레더러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사라지는 운명을 모면한다.


이 초상화는 40년 동안 레너드 A. 로더의 컬렉션에 소장되기도 했는데, 클림트가 이 보다 몇 년 전에 그린 작품인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어머니 ‘세레나 레더러의 초상화’(1899)와 1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레나 레더러의 작품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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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레나 레더러 초상화(1899), 2)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부분, 1914-16))


클림트의 작품 중 완벽하게 구성된 작품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는 엘리자베스를 정면에 배치하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클림트 그림의 수많은 몽환적인 여성들과는 달리 관람객 너머를 바라보거나 관람객을 고려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다소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클림트는 당시 스무 살이 된 젊은 여성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은 중국식 의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그녀는 환상적인 복장을 하고 중국 왕족의 가운을 입고 있다. 이 작품이 패션을 통해 보여주는 상징성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녀의 옷은 위계와 서열, 동 시대성과 전통, 개인의 취향과 세속적인 세련미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카펫이 깔린 바닥부터 머리 위의 하얀 꽃, 배경 인물들의 후광과 그녀를 장식하는 황제가 입던 옷,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까지, 이 그림의 모든 면면은 기존의 그림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동양적 디자인과 상상력을 통해 보다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느낌을 구현하려고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거의 3년에 걸쳐 작업을 했다. 이 그림은 1916년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 클림트의 작업실에 세레나 레더러(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급하게 찾아온다. 과연 세레나 레더러는 클림트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녀의 말을 들은 클림트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은 듯했다. 그녀는 혹시 클림트가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그림을 버리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며 그의 작업실을 떠났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가 레더러 가문의 구성원을 그린 마지막 작품은 아니었다. 실제로 1917년, 세레나는 클림트가 엘리자베스의 그림을 완성한 다음 자신의 나이 든 어머니(엘리자베스의 할머니)인 샬롯데 퓰리처의 초상화를 의뢰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치가 압수한 후 행방불명이 된다.


G. 클림트, 샬롯테 퓰리처 초상화(1917), 행방불명

클림트는 겨우 26세 때 세레나 레더러를 처음 그렸다. 세레나 레더러는 당시 그녀의 딸처럼 매력적인 검은 눈썹과 긴 속눈썹,, 그리고 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관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작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을 평가하듯 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 클림트는 빈 미술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주로 정부의 공식 의뢰를 받아 활동했는데, 그중에는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 동료 화가 프란츠 마치와 함께 비엔니에 신축 부르크 극장에 그린 로코코풍 신화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후 다른 의뢰들도 받았는데, 특히 1894년 빈 대학교 세 단과대학에 각각 설치할 작품들(Fakultätsbilder: 단과대학별 그림들)을 주문받는다. 철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법학부 강당에 설치하기 위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 역시 레더러 가문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의학부 그림을 제외하고 나치가 압수해 소각해 버리는 바람에 사라지고 만다.

G. 클림트, Die Philosophie(철학), 행방불명

유럽 전역의 다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클림트와 그의 모더니스트 동료들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1897년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를 결성하고 빈 쿤스트하우스(Künstlerhaus)를 설립한다. 1901년 비엔나대학교 3곳의 단과대학에 첫 작품을 출품할 무렵, 클림트는 이미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영감을 받은 벽화의 서사적 요소인 그의 우화적 인물들의 과감한 누드는 보수파의 분노를 샀다. 다행히 몇몇 비평가들이 그를 옹호하고 그의 후원자인 레더러(Lederers)까지 개입했지만 클림트는 대중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1905년 클림트는 항의의 표시로 그림을 철회하고 그의 막강한 후원자인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도움을 받아 정부로부터 받은 3만 크로네의 사례금을 정부에 되돌려준다. 그 대가로 아우구스트 레더러는 클림트가 1899년에 그린 자기 아내 '세레나 레더러의 초상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얻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레나 레더러의 초상화는 레더러 가문 컬렉션에 포함되는데, 191*85cm 크기로 제작된 작품을 걸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레더러 부부는 두 개의 방을 하나로 합치고, 당시 빈분리파의 가까운 동료인 요제프 호프만을 초대하여 공간을 재설계한다.


비엔나 있는 레더러 가문 저택 (세레나 레더러 초상화가 걸려 있는 거실, 1930)

그 후 몇 년 동안 레더러 가족은 비엔나대학교에서 철거한 학부 벽화 3개 중 두 번째 작품인 법학부(Jurisprudence)에 설치했던 유화 스케치를 클림트로부터 넘겨받아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클림트의 풍경화, 인물화,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나치가 불태워 버림) 등 유화작품들, 그리고 수백 개의 드로잉 작품들을 소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프리즈’ 작품들까지 넘겨받음으로써 아우구스트 레더러는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컬렉션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레더러 가문의 후원에서 볼 수 있듯이, 클림트는 레더러 가족과 친밀하고 특수한 관계를 누렸다. "클림트의 작품에 대한 레더러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예술가는 그들의 사회적 서클과 요제프 호프만이 '비엔나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여성'이라고 불렀던 세레나가 운영하는 살롱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클림트는 레더러 집에서 매주 점심 식사에 초대되었고 세레나와 그녀의 어린 딸 엘리자베스의 드로잉 교사로 고용되기도 했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부터 엘리자베스를 알고 지냈다. 엘리자베스는 클림트를 ‘Onkel’이라 부르며 그를 따랐다. 클림트는 또한 레더러 부부에게 에곤 쉴레를 소개하기도 한다. 에곤 쉴레는 1912년 레더러 부부가 자택으로 초대를 하자 그곳에서 레더러 부부의 장남 에리히(당시 15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다.

(* 어린아이가 ‘Onkel’이라고 부를 때는 ‘삼촌’이라는 직역보다는 우리말로 ‘아찌’라는 애칭으로 사용한다. 엘리자베스는 클림트를 어려서부터 "Onkel, Onkel(아찌 아찌)"라고 하면서 아빠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 세레나 레더러를 그린 지 15년 동안, 클림트는 휘슬러에서 영감을 받은 흰색, 회색, 복숭아색으로 표현된 여성들의 천상적인 초상화에서 모자이크처럼 반짝이는 황금빛 작품('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과 '키스')으로, 그리고 성숙한 초상화 양식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제 성숙한 숙녀로 성장한 엘리자베스 레더러, 그녀를 그린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는 섬세함과 권위 사이의 균형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 있는 듯한 표정까지 느끼게 한다.


전신 초상화 형식은 고대 조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에는 엘리자베스처럼 유럽 전역의 군주들이 지배력과 신성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전신 초상화를 사용했다. 전신 초상은 또한 부와 권력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당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이 지닌 부를 과시하고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장치로 필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귀족들의 초상화 양식은 정부 관료와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다. 그런데 클림트의 초상화 중 전신초상화는 가장 돈 많은 재벌부인들이 대상인 것은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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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dele Bloch_Bauer 2(1912), 2) Elsabeth Lederer(1914), 3) Friederike Maria Beer(1916)


한편, 클림트는 1909년 경부터 죽을 때까지 중국 미술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9년 파리에서 가장 큰 극동 미술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기메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벨베데레, 전시 카탈로그: 클림트의 여성, 2000, 44-45쪽)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야수파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1909년 국제 쿤스트샤우(Internationale Kunstschau)에 전시되었는데 클림트도 참석했을 것이다. 마티스의 작품은 바닥과 벽을 하나로 합치고 캔버스 표면을 풍성한 아라베스크와 꽃무늬 요소로 장식함으로써 점점 더 평면화되는 클림트의 공간에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향은 '아델 블로흐-바우어 2'(Adele Bloch-Bauer 2)에서 볼 수 있다. 야수파의 감정적인 색채 해방 또한 해방적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화려한 파스텔 색조는 그보다 더욱 대담한 녹색과 주황색, 그리고 유려하고 개성적인 붓놀림으로 강조되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는 모티프는 그녀의 가느다란 옷자락을 이루는 화려한 중국식 용포이다. 이 옷은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상징하는 옷이다. 실제로 이런 화려한 용포는 황제와 궁정의 특정 구성원들만 입었으며, 황제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클림트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장식적 상징들을 자신의 그림에 녹여냈다.


용포, 기타 맞춤 모티프, 그리고 그림의 구성 디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갈수록 클림트의 작품에 중국 미술이 미친 영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용의 형태는 광서 시대 청나라 후기의 용포를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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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포와 황제 초상화, 청나라 건륭 시대, 클림트의 스튜디오(리셉션 룸), 1917 년경


중국과 일본의 예술 작품은 예술가에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클림트는 이미 중국과 일본의 예술과 유물에 깊이 정통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컬렉션은 호프만이 디자인한 검은색 캐비닛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 앞방에 보관, 전시되었다. 예술가의 소장품에는 일본 우키요에 판화, 기모노, 네츠케, 칠기 조각뿐만 아니라 일본 사무라이와 청나라 궁정 예복, 도자기, 연극 인형 및 기타 장식품 등이 포함되었다.(* 클림트의 아뜰리에인 '클림트 빌라'에서 적지 않은 중국식 자료들을 볼 수 있다.)


1913년 아터제 여름 여행 중에 찍은 용의 옷을 입은 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의 사진은 동아시아 예술에 대한 클림트의 매혹과 감상을 더욱 증명한다. 그러한 인식은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의 세속성에 구현되어 있다. 황제에 대한 암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레더러는 분명히 가장 현대적인 유럽풍 패션을 입은 현대 여성이다.(* 중국식 의상 이미지와 견본 의상들은 MAK(비엔나 응용 예술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중국식 용포 의상을 입은 에밀리 플뢰게, 1913

클림트는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Bildnis Elisabeth Lederer)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그렸는데, 이 전쟁은 전례 없는 인명 손실과 엄청난 파괴, 그리고 유럽의 세력 균형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그런데 클림트는 제국이 붕괴되던 바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클림트와 매우 가까웠고 그를 "Onkel"이라고 불렀던 엘리자베스 레더러는 회고록에서 클림트의 죽음을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은 큰 감정적 충격으로 기억한다.


1921년, 그녀는 개신교로 개종하고 맥주 양조 가문의 상속자인 볼프강 바호펜 폰 에흐트와 결혼한다. 그녀는 바호펜 폰 에흐트 남작부인이 되는데, 실제로 이 작품에 대한 많은 역사적 문헌이 그녀에게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녀와 남편은 잠시 한 명의 자녀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1938년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사망한다. 같은 해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다.


나치 정권 하에서 엘리자베스는 유대인 독신 여성으로서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다. 1939년 그녀는 어린 시절, 특히 클림트와 친밀하게 지낸 시간들에 대한 회고록을 쓴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의 아버지로 알고 있던 아우구스트 레더러 대신에 어릴 적 “Onkel"이라 부르며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자신의 친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친부에 대한 근거자료로서 그동안 자신이 쓴 회고록을 제출한다.


히틀러가 지배하는 비엔나에서 유태인 가족으로 낙인찍힌 레더러 가족은 나치의 눈을 피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피신해 있었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세레나는 클림트의 친자 관계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한다.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후, 엘리자베스는 클림트의 사생아로 인정받는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레더러 가문의 저택 거실(1930)

이제 엘리자베스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안" 혈통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나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안탑깝게도 1944년 비엔나에서 숨을 거두고 클림트가 묻힌 비엔나의 히칭 묘지에 있는 그녀의 아들 옆에 묻힌다.


엘리자베스 레더러 그림은 아우구스트와 세레나 레더러 부부의 빈 집에 항상 걸려 있었다.(세레나의 고향 부다페스트에도 저택이 있었다). 그들의 미술 컬렉션은 비엔나 최고 부자답게 시모네 마르티니, 루카스 크라나흐, 벤베누토 첼리니 등의 귀중한 르네상스 회화와 청동 작품을 포함하여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수장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레더러 가문의 컬렉션은 클림트의 그림 11점이 넘는 작품들과 수백 점의 드로잉, 그리고 '베토벤 프리즈' 등 거의 박물관 수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귀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였다.


그런데 1938년, 엘리자베스 레더러 초상화를 나치 정부가 압수한다. 그리고 1939년 보관 시설로 옮겼다가 2차 대전 전쟁 기간 동안 클림트가 그린 세레나 레더러 초상화와 에곤 쉴레가 그린 에리히 레더러(세레나 아들) 초상화, 그리고 약탈당한 가구와 장식품들과 함께 나치보관소로 보낸다.


‘레더러 가족사진’으로 불리는 이 작품들은 1943년 비엔나 벨베데레 궁에서 열린 클림트 회고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회고전에는 레더러 가문이 소장했던 클림트 유화 11점이 포함되었을 뿐이었다. 그 후 이 11점의 그림(레더러 가족사진이라 칭한 작품들은 제외)과 박물관의 다른 작품들이 오스트리아 동북부 지역에 있는 임멘도르프 성으로 옮겨진다.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 1899, 행방불명

그러나 2차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는 1945년 5월 8일 나치가 도망치면서 임멘도르프 성과 그 안의 모든 예술 작품을 불태워 버린다. 1948년, 다행히 세 점의 가족 초상화들은 다른 곳에 보관되었다가 전쟁 중 스위스로 도망친 엘리자베스의 동생 에리히 레더러에게 반환된다.


한 유대인 가족을 묘사한 이 그림들이 불타버린 레더러 가문의 나머지 소장품과 분리되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자 레더러 가문이 보유하던 작품 중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459점과 에곤 쉴레의 작품 77점이 레더러 가문에게 반환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은 불타거나 실종상태로 알려졌다. 손실된 작품 중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유화 작품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1899)를 비롯해 그가 그린 중요한 연작 그림들, 그리고 1900년에서 1907년 사이에 그린 비엔나대학교 천장화(철학, 법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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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클림트, 1, 2) 엘리자베스 레더러 스케치들과 3) 세레나 레더러와 그녀의 어머니 샬롯데 퓰리쳐


클림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특정 컬렉션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들은 클림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리 모델을 스케치한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듯하다. 이 중 많은 작품들이 알베르티나 미술관(비엔나)에 소장되어 있고, 몇 장의 사진들이 현재 ÖNB(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비엔나)에 소장되어 있다.


클림트의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화>는 특정 시대를 구현하는 동시에 그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역사의 질곡을 그려낸 애절한 순애보 같은 서사적 작품이라 하겠다.


에곤 쉴레, 1) 레더러 아들 에리히 초상(1912), 2) 세레나 레더러 스케치(1917), 3) 아우구스트 레더러 스케치(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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