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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작가 Mar 18. 2021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최규석, <송곳>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대한민국에서 노동 문제를 말하는 건 일종의 금기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임에도 우리는 자신을 노동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 인식 속에서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 아닌 부끄러운 것이 돼버렸다.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여태껏 없었고, 지금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송곳>은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이자,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다.


<송곳>은 최규석 작가가 첫 웹에 연재한 작품이다. 웹툰 시장이 커지면서 출판 쪽에 집중했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온라인 시장으로 넘어왔다. 최규석이 지금껏 출간한 작품들은 송곳과 같이 예리했다.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가 그랬고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그랬다. 


문제적 작품만을 다룬 최규석이 야심 차게 웹툰 시장에 내놓은 작품 송곳은 한국 경제의 특이점을 이해하는 노동의 이중 잣대를 다양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노동을 이해하는 이중 잣대

경제 규모는 선진국이지만, 노동 문제를 이해하는 수준은 후진국보다 못한 대한민국은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임에도 노동 문제가 배척당하는 특이한 사회다. 자기 자신이 노동자임에도 학력이 높거나 직책이 높다고, 혹은 사무직이라고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생각하는 이상한 나라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있어 '노동'은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더 사용된다. '노동'이라는 단어보다는 '근로'라는 가치 판단이 들어간 단어가 사용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 사회의 노동 운동과 노동 가치는 편견과 차별, 박해로 얼룩져 있다. 노동 문제와 일자리 현안이 사회 1순위로 현재 꼽히지만, 그 누구도 진심으로 '노동'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도 어쩌면 우리 인식 속에 '노동'이 부정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송곳>이 가진 재미이자 의의는 노동 문제의 복합성을 손에 꼽을 수 있다. <송곳>이 단편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만 했다면, 보는 내내 불편함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곳은 단순히 노동자 편에서만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들 내부의 모순과 갈등, 사용자들의 시선과 편견, 사회의 용인과 침묵 등을 다룬다. <송곳>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불편함 들을 주머니 밖으로 꺼내 날카롭게 후벼 판다.   


시시한 강자와 시시한 약자들의 이야기

<송곳>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별 볼일 없고, 시시한 인간들이다. 자기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수인은 어쩌면 가장 시시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영원히 '노동 문제'와 단절한 채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지도 모른다.

이수인과 연대하는 구고신 또한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특정 노동 단체에 속한 '전문 시위꾼'도 아니며 '외부세력'도 아닌 구고신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노동 운동가는 아니다. 오히려 군부 독재 시절 운동을 한 후 피해 의식과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사에 닳고 닳은 인간이다. 한때, 모진 고문에 투항하고 동지들을 배신한 기억과 후유증을 몸에 달고 살 수밖에 구고신은 송곳처럼 강하고 날카로운 인간이지만, 그만큼 쉽게 무뎌지고 부서질 수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송곳>은 그저 시시한 강자와 시시한 약자의 이야기다.   


재벌도 기업도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들이다. 기업들이 약육강식을 따르니 그 기업에서 밥 벌어먹는 그 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업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들이 뭉칠 수밖에 없다. 몸집을 불려 강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푸르미의 개미들이 모여 밟으면 밟히는 대로, 시키는 시키는 대로 하는 개미들의 죽음과 그에 따른 반란을 보면서, 제발 <송곳>에서 만이라도 그들의 승리하고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송곳]은 회차가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마음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송곳>은 최규석 작가의 의도한 대로 다양한 시선이 교차한다. 누군가는 <송곳>을 보면서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혹 누구는 <송곳>을 보며 그래도 과거에 비해 지금의 노동 현장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고 말한다.


둘 다 옳은 말이자 둘 다 틀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인 이들의 일구어 놓은 밭에서 열매만을 따먹는 수혜자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수혜자고, 그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수혜자다. 


이처럼 수혜자들이 늘어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노동 현실은 <송곳>보다 참담하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내달릴수록 더 강렬하고 참혹한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기에  가끔은 마주하기 싫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송곳]을 마주할 이유는 결국 송곳이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이자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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