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프의 개>와<슈뢰딩거의 고양이>
익히 알다시피 파블로프는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작은 종을 울리는 실험을 한다. 이것을 꽤나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러자 작은 종만 울려도 개는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학문적으로 말해보자면 '고전적 조건 형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학술 용어일 뿐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의 익숙함이라 부른다.
반면 슈뢰딩거라는 물리학자는 완전히 밀폐되고 불투명한 상자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담긴 병을 들어있다고 그럴싸한 가정을 한다. 실험 내용은 뭐 물리학에 관한 내용이고 워낙 학술적이고 지랄 맞은 내용이라 생략하고 대략 이것은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살아있을지 죽었을지는 모른다. 다양한 견해와 해석이 있지만 대중들은 그저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받아들였다. 학술적으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 말한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
몇 해 전부터 월급이라는 것이 매달 내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온 후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다. 가끔 작은 종이 울릴 때 침을 흘려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이미 조건 형성이 됐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흘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드사에 빚진 숫자로 인해 침이 아닌 피눈물을 흘린다. 물론 그로 인해 얻는 것도 많다. 술, 사람, 그리고 거처할 수 있는 집, 옷, 신발 등등 가지고 싶은 것들을 가진다.
조건적, 습관적으로 돈을, 카드를 쓴다. 어차피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면 다 사라질 공허한 숫자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위한다. 이것은 하나의 족쇄로 다가온다. 이 족쇄를 끊고자 초기에는 반항도 해봤다. 이미 나는 덫에 빠져 있었다. 이제는 이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자괴감도 문득 든다. 작은 종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의 개 상태가 된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마도 월급이라는 것을 받는 대부분의 이들이 파블로프의 개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개 중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호기심을 못 참고 상자를 열어보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도박을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찾아 혹은 자유를 찾아서 상자를 연다. 대부분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어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상태, 후회하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호기심 때문에 고양이를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파블로프의 개보다 나은 것은 하나 있다. 고양이는 죽었을지 언정 자신의 호기심은 해결됐고, 결국은 다시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 여전히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남아있다.
파블로프의 개 상태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태가 좋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상자를 열어보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어떤 상자도 열어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종이 울렸을 때 더 큰 보상이 있기를 그저 바라는 상태다. 내 노력과는 무관한 채 우연이라는 운명이라는 이름 하에 무언가 더 큰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상자는 그렇게 점점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호기심을, 질문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잊지 않는 것이 있다. 아마도 그 언제가 됐든 분명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상자를 언제 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고양이가 죽어도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뒤를 보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기를.
지금의 파블로프의 개 같은 내가 미래의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 갇혀 있을 고양이에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