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청년으로>
내가 만약 청년으로 다시 난다면 이렇게 하고 싶어라, 우선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의 허술한 곳을 남기지 않고 운동을 하되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여 튼튼하고 멋진 몸을 가꾸리라. 그리고 나의 한가지 특기를 살려 연마하되 기초를 튼튼히, 튼튼히 하고 결코 교만하지 않으리라.
내가 몸담았던 군대는 조금 독특한 곳이었다.
악습과 구타가 만연했고, 그것을 타군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전통이자 멋으로 받아들였다. 군대 생활 내내 나는 꽤나 많은 구타를 당했다. 맞았던 이유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갔다. 어찌 존버 정신을 실현하다 보니 상병이 되었다.
상병쯤 됐을 때 소위 말하는 아들 기수들이 들어왔다. 아들 기수라고 해서 관심이 딱히 가진 않았다. 그런 문화 자체가 유치하기고 했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당시 내 군대 생활조차 감당하기 벅찼다.
어느 날 중대장이 내 근기수들을 모았다. 지금 갓 중대에 배치된 이병들의 부모님께 너희가 아버지 기수이자 멘토로서 안심하라는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인가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중대장의 말에 상명하복 할 수밖에 없는 상병 나부랭이가 그 존명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기로 편지를 썼다. 무슨 내용을 끄적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휘갈겼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통의 편지가 '아버지'께로 갔다. 어느 날 나에게 편지가 왔다. 상병쯤 되면 여자친구가 있지 않은 이상 편지가 올 까닭이 없는데, 누구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었다.
답장을 읽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에는 내 후임의 아버지가 아닌 시대의 어른이자, 모든 군 장병의 아버지로서의 당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는 박재동 화백의 '청년으로'가 적혀 있었다.
그 후에도 '아버지'와는 전역 때까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에 쓸 내용을 고민하고, 정성스럽게 적는 것은 군 생활을 즐기는 또 하나의 낙이었다. 늘 어떤 내용의 답장이 올까 궁금했고, 나의 있는 고민을 진솔하게 적었다. 상병 휴가 때는 안산으로 가 '아버지'를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부자 관계를 맺자고 했다. 나도 그 자리에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알겠다고 했다.
전역 후 종종 연락드리긴 했지만, 안산으로 직접 찾아뵙지 못했다. 대학을 다녀야 하기도 했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찾아뵙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늘 후순위로 밀렸다. 어느 날 그 후임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많이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내가 '아버지'를 잊는 사이, 점차 '암'이 아버지를 좀 먹고 있었다. 당장 안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정신이 없으니 조금 더 호전되면 찾아오라는 소식만 들었다. 알겠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아버지'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됐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뵈려고 했지만, 무균실에 계셔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전화로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반드시 건강해져서 보자. 제일아 라는 말씀만 남겼다.
그 후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대면한 건 아주대학교 장례식장이었다. 한 번쯤, 한 번쯤 찾아뵐 수 있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괜찮아질 것이라는 거짓 믿음으로 찾아뵙지 못했다. 그게 참 후회가 깊게 남는다.
찾아뵐 수 있었고, 찾아뵜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날 새벽까지 장례식장에서 후임과 진탕 마셨다. 취하는 것만이 내가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사죄였다. 그 일이 있은 지 어느덧 10년 전이다. 망각이라는 놈은 도저히 자비란 걸 모른다.
나는 그래서 마음이 해이해질 때쯤 늘 박재동 화백의 '청년으로'를 꺼내 읽어 본다.
내 또 하나의 '아버지'인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며, 바라셨던 대로 늘 청년처럼 살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는 의미에서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누구든 쉬운 일이 여전히 어렵고 모자라지만, 아직까지 걸음을 가눌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방일하지 않은 걸음을 걸어 나가야겠다. 아버지의 바람처럼 말이다.
끝으로 사족 하나.
아버지, 저는 오늘도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에서는 어찌 편하신지요. 우린 글로만 대화를 나눴지, 실제로 마주한 것은 단 하루밖에 없네요. 그래도 그 날, 그 순간에 소주 한잔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직 아버지랑 저 먼 곳에서 소주 한잔 마실 날이 멀고도 멀겠지만, (너무 일찍 가면 그것도 그것대로 저를 나무라시겠지요.) 언제 어느 날 문득 제가 그곳에 가게 되면 그때도 예전처럼 너그러운 웃음으로 소주 한잔 부어주십시오. 그 날까지 당부하신 말씀 잊지 않고, 때가 되면 홀연히 당신을 만나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좀 많이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