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 <나빌레라>
이제는 성장영화의 고전에 반열에 오른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대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누구나 익히 아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전주로 흐르고 빌리의 아버지인 재키와 형 토니가 자리에 착석해 빌리가 등장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 옆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여장을 한 마이클이 앉아 있다. 이윽고 빌리 엘리어트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나빌레라>는 어린 빌리와 달리 이제 더 이상 꿈 따위 꿀 일 없어 보이는 은퇴한 노인 심덕출을 전면에 내세운다. 더 이상 꿈과 도전, 희망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보이는 덕출을 통해 <나빌레라>는 청춘의 의미, 가족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연극을 비롯해 뮤지컬로 여러 번 재현될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야기’다. (나빌레라 또한 최근 뮤지컬로 제작됐다.) 특히 <빌리 엘리어트>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마가렛 대처 시기의 암울했던 탄광촌의 현실과 맞물려 ‘발레’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 소년의 성장드라마다. 성장극 혹은 모든 이야기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존재한다.
<빌리 엘리어트>가 가진 갈등의 구조는 그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의 꿈을 방해하는 가족이다
권투를 하라고 준 20펜스를 가지고 발레를 배우는 빌리를 보며 그의 아버지 재키는 빌리를 나무란다. 권투나 제대로 하지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꾸짖는다. 탄광촌에서 자랐고 광부가 된 재키에게 빌리의 발레는 그저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는 말과 실제로 본 빌리의 발레는 몸부림이 아닌 춤사위였다. 발레의 ‘ㅂ’ 모르는 그가 봐도 빌리의 재능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재키의 갈등이 시작된다. 대처리즘에 대한 시위 중이었기에 급여를 받을 수 없던 빌리를 런던까지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믿었던 이들을 배신하고 탄광으로 향한다. 이 모습을 본 토니는 재키를 만류한다. 토니가 재키를 부둥켜 앉자 그제야 재키의 몸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리며 토니의 품에서 그는 눈물을 흘린다. 이후 탄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키는 부인의 유품을 팔아 빌리를 오디션에 참가시킨다.
시간이 흘러 빌리의 합격 발표가 난다. 그리고 그 날 광부들의 몸부림이 끝난다. 빌리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오르고, 재키와 토니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 지하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맞긴다.
<빌리 엘리어트>, 한 인물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쓴 작품의 경우 대부분 그 인물의 서사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명작이란 볼 때마다 감정을 이입하는 인물이 달라지는 마법이 있다.
처음 영화를 볼 때 빌리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두 번째는 재키, 세 번째는 토니, 네 번째는 월킨스 (빌리의 발레 선생님)에게로 그 감정선이 전이된다. 빌리와 달리 꿈을 이루지 못한 인물들 혹 꿈조차 꾸지 못한 인물들이 ‘꿈’과 재능을 가진 빌리를 열렬히 지지하고 기꺼이 그를 위한 토양이 되는 이야기가 바로 <빌리 엘리어트>다.
<나빌레라>는 이 <빌리 엘리어트>와 얼핏 비슷해 보이나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이야기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더 이룰 것이 없어 보이는 노년의 덕출, 그에게 있어 발레를 오랜 꿈이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잠시 다녀온 러시아에서 본 발레리노와 발레리나의 모습은 덕출의 유년시절에 무엇보다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그러나 전후세대인 덕출에게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가족의 부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개인의 꿈이라는 이상을 넘어서 가장으로서의 의무였다. 덕출은 이 의무를 받아들인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자신 셋을 낳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완수한다. 이제 은퇴하고 가장으로서의 멍에도 던져 버린 덕출은 어느 날 발레를 하고 싶다고 가족에게 선언한다. 이 폭탄선언은 곧 가족의 불화를 야기한다. (덕출의 둘째 아들인 성관은 빌리를, 첫째 아들은 성산은 묘하게 토니가 취했던 스탠스와도 맞닿아 있다.)
그 어느 곳에도 완벽한 가족은 없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노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과거부터 변화를 가장 빠르게 수용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가치 변화에 따른 급격한 사회화에 민감하다.
지난 30년간 산업화가 진행된 한국사회에서 가족 또한 수많은 부침을 겪어왔다. 현재는 핵가족이 이미 대세가 된 상황에서 <나빌레라>는 가족공동체에 묻는다.
<나빌레라>를 이끄는 또 하나의 중심축은 이채록을 중심으로 한 서사다. 덕출이 우여곡절 끝에 입단한 문경국 발레단의 연습생은 채록은 촉망받는 발레 유망주다. 웹툰이든 소설이든, 영화든 주인공이 문제적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을 봤을 때 일흔이 먹고 발레를 하겠다고 선언한 덕출보다는 갓 약관의 넘은 나이에 반항심과 더불어 이리저리 방황하는 젊은 청춘 채록이 조금 더 주인공에 가깝다.
덕출의 가족은 그 어느 가족보다 화목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는 현대 핵가족이 만연한 사화에서 하나의 ‘가족 판타지’라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이는 가족공동체, 그리고 이 가족공동체를 만든 가장 중 하나인 덕출의 폭탄선언으로 시작된 가족 간의 갈등. 이런 갈등 속에서 <나빌레라>는 오히려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묻고 있다.
치매에 걸린 덕출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보살피는 채록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그리 원만하지 않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덕출의 가족보다 채록의 가족이 오히려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대 가족의 역설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채록은 덕출에게 때론 스승으로, 때론 친구로, 때론 부자관계 혹은 조손 관계를 보여주며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인 덕출을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는 성관이 채록을 찾아와 아버지를 부탁한다며 눈물짓는 장면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나빌레라는 심덕출이 발레를 배우는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포개져 있다. 바로 방황하는 청춘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축구나 운동을 했으나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발레를 하는 청춘의 하루는 오늘도 힘겹다. 인생의 끝이 보이는 시기와 방황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선 묘한 브로맨스를 자아낸다. 이 브로맨스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어린 스승과 늙은 제자,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와 같은 관계다. 이 두 가지 관계가 묘하게 뒤섞인 이야기는 이웃과 가족에 대한 근원적은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덕출은 채록에게서 자신의 젊음을 읽어 내려간다.
누군가의 미래, 누군가의 과거 그리고 이쇼라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건축한개론>의 포스터의 문구와 같이 채록과 덕출은 누군가의 과거 혹은 누군가의 현재 나아가 누군가의 미래다. 이는 <나빌레라>를 설명하는 ‘나이 일흔에 도전을 시작했다. 스물셋, 방황이 시작됐다’는 소개 문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 1세대 원제 발레리노인 이원국의 평소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성장통을 겪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자만하고 안주하는 순간 호수의 물은 썩어 백조가 떠난다. 발레 무용수들은 자신의 땀과 눈물로 만든 호수를 가지고 있다. 이 호수가 넓고 깊을수록 좋은 댄서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궁극적으로 <나빌레라>는 끊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는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젊음을 낭비하고 방황하는 채록, 그들이 발레를 통해 세대를 초월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나빌레라>는 도전에서 좌절하는 인간, 그리고 젊음을 잃어버린 채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그리고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꿈을 위한 도전과 노력을 마지막으로 ‘이쇼라스(러시아어로 한번 더)’ 해보라고 조용히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