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별의 마지막 모습 -
군 입대를 하루 앞둔 날.
부모님과 나는 서울로 향했다.
전남 광주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가야 했으므로 입대 하루 전날은 서울에 계신 첫째 큰아버지 댁에서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가는 차 안의 공기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FM에서 신나는 트롯 음악이 나오면 늘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을 까딱이시던 아버지의 ‘장단 맞춤’도 없었고, 조수석에서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답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
두 분 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시는 듯했다.
심한 내적 괴로움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시느라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슬픈 모습이셨다.
웃음과 슬픔이 함께 묻어나는 표정.
그런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나는 안타까웠다.
식사나 간식을 먹기 위해 가끔 들른 휴게소에서 그 상반된 두 표정이 함께하는 모습들을 마주 보기 힘들었던 나는 식사하는 내내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공기를 대 여섯 시간 달려 도착한 서울 큰아버지 댁에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수원에 사시는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인 다섯째 작은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보기 위해 와 계셨다.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이내 부엌으로 가셔서 저녁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저녁이 나오기도 전에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작은 술상을 받아 놓고 둘러앉았다.
술이 한 순배 돌자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께서는 자신들의 험난했던 군 생활 이야기에 열을 올리셨다.
카투사를 제대한 큰아버지와 일반 현역병을 나온 작은아버지는 군 입대를 앞둔 조카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말해줌으로써 ‘군 선행학습’을 시키시려는 것 같았다.
많은 말씀들을 하셨지만 그분들의 하나같은 결론은 ‘군대에선 잘하려고 하지 말고 딱 중간만 해라’, ‘군대에선 눈치 봐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열띤 강의(?) 속에서도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도 하지 않으신 체 술만 드셨다.
술도 잘하지 못하는 분이 소주를 두 병 가까이 드셨다.
전경대(전투경찰대)를 나온 아버지는 원래 군대 이야기를 잘 안 하시는 편이었다.
하지만 일단 전경대 시절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빼놓지 않고 하시던 두 레퍼토리는 있었다.
지금까지 스무 번 이상 들은 것 같지만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하듯 열을 올리며 하시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형제분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어머니와의 사랑이 들불처럼 일던 그때,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영내(營內)를 몰래 빠져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걸려서 밤새도록 빳따질(몽둥이질)을 당했던 이야기,
달리기만 했다 하면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군대 시절 자신의 건각(健脚)에 대한 이야기를 할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조용히 술잔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렇게 열띤 강의와 침묵이 함께하던 중 저녁이 차려졌고, 식사 후 우리들은 내일의 대업(?)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급히 아침을 먹고 큰아버지 내외 분의 인사를 받으며 해가 뜨기도 전에 춘천으로 출발했다.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나를 마지막까지 배웅하고 싶으시다며, 우리와 함께 하셨다.
다시 대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춘천의 모 부대 근처.
남도에서만 자란 나에게 높은 산과 험한 고개들로 이루어진 강원도의 풍경은 낯설었다.
심지어 흙 색깔도 내가 나고 자란 곳과는 다른 듯했고,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흙냄새도 바람이 싣고 오는 대기의 냄새도 익숙지 않았다.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런 낯선 풍경 속에 위치한 허름한 근처 식당에 들렀다.
그곳엔 나 말고도 입대를 앞둔 까까머리 청년들이 부모님 혹은 친구들이나 연인끼리 앉아 있었다.
“쟤네들도 오늘 군대 가는가 보구나.”
어머니는 같은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셨다.
무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휑한 밭뿐인 부대 근처를 좀 걷다가 이내 부대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내내 아버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곳만을 보셨다.
아마 자신의 감정이 들키면 아들의 마음이 무거워질까 염려돼서였을 것이다.
부대 안에 들어서자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충성’도 ‘단결’도 아닌 낯선 경례 구호를 붙이며 상관에게 경례를 했다.
전방 부대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는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의 인도에 따라 걸었고, 곧 부대 내에 있는 대강당 앞에 섰다.
그때 한 간부가 소리쳤다.
"여기서 자녀분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2층 관람석으로 가주시고 장정(입대자)들은 1층으로 모이십시오"
대강당 1층과 2층으로 갈리는 계단 앞이 마치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할 이별의 그 어떤 지점 같았다.
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지 아버지에게 반쯤 기댄 체 “어여...... 들어가라”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하셨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망울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체, “잘하고 와라”고 덤덤히 말하셨다.
나는 그때 여태까지 가장 슬픈 아버지의 눈을 보았다.
무덤덤히 아들을 보내 주고 싶었건만, 당신의 마음을 다 감추기엔 감정의 파도가 너무 높은 듯했다.
“네... 걱정 마세요. 편지 자주 할게요.”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1층과 2층으로 이별했다.
1층은 나처럼 사복에 짧은 머리를 한 또래의 녀석들로 북적거렸다.
억지로 센 척하며 바닥에 침을 찍찍 뱉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창피함도 잊은 체 훌쩍이며 우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님을 찾느라 2층 관람석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도 언제 또 뵐지 모를 모습들을 눈에 담기 위해 2층을 바라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부모님을 찾는데 한참이 걸렸지만, 나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식을 보기 위해 다른 부모님들은 서로 뒤엉켜 전부 1층으로 향한 난간에 몰려있는데 반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께서는 2층 제일 높은 곳에 계셔서 단번에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저렇게 다른 부모들과 뒤엉켜 있다간 ‘윌리를 찾아라’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셨던 것 같다.
달과 지구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1,2층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간부 한 명이 연단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자 강당 옆문을 통해 금색 자수로 ‘조교’라고 수를 놓은 빨간 모자를 쓴 군인들이 열 명 남짓 들어왔다.
연단 위 간부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란히’를 시키며 열을 맞추라 했다.
다들 ‘교련’ 과목 세대여서 그런지 그리 어렵지 않게 열과 오가 맞춰져 갔고, 모자 창을 광대뼈 부근까지 푹 눌러쓴 빨간 모자 사내들은 우리들 중간중간을 다니며 열에 각을 더해갔다.
그리고 2층 부모님들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데시벨로 우리들에게 낮고 근엄하게 말했다.
“야! 아까 바닥에 침 뱉은 새끼 누구냐. 그 새끼 내가 봐 놨다 이따 보자!”
“벌써 처우는 새끼는 뭐야!!!”
“흐흐흐, 웃음이 나오지? 지금 웃는 새끼,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하는 행동들이 동네 양아치들을 보는 듯했지만, ‘아... 내가 군대에 왔구나’라고 실감을 했던 때가 그때였다.
마이크를 잡은 간부는 장시간을 들여 요즘 군대는 좋아졌다는 설명을 침을 튀어가며 열변했다.
옛날처럼 폭행도 없고, 일과 후엔 자유시간이 부여되며, PX를 통해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고, 무엇보다 매일 우유가 나올 정도로 군대가 좋아졌다고 힘주어 말했다.
‘집에서도 안 먹는 우유가 매일 나와서 군대가 좋아졌다니......’
내가 들어도 씨알이 안 먹히는 소리가 자녀를 군대 보내 놓은 부모님들에게 곧이 들렸을까?
사회였었다면 듣다가 나갔던지 아니면 실소(失笑)라도 지었을 텐데, 우리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는 조교들의 강압 어린 목소리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해찰하지마! 말씀에 집중해!”
“늬들은 부모님 가시면 두고 보자!”
우리들의 열 사이를 유령처럼 떠도는 빨간 모자들 때문에 다들 얼어붙어 있었다.
“전체! 뒤로 돌아!”
스피커를 타고 들려온 간부의 명령에 우리는 2층 관람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입대하는 장정들은 부모님을 보내드리면서 ‘어머님 은혜’를 부르도록 하고, 장정들의 노래가 시작되면 부모님들은 한 줄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노래 시작!”
밑도 끝도 없는 식순(式順)이 당황스러웠지만, 누군가 처음 연 첫음에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실제...... 흐흐흨... 흐흐흨... 흨흨흨......”
벌써 ‘나’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녀석이 있었다.
헌데 그 한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자 그 옆 녀석도, 그 옆의 옆의 녀석도......
그렇게 장내는 점점 울음바다가 되어갔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던 나도 내 양옆의 녀석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울기 시작하자 마음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내내 2층의 부모님과 서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어 끝까지 참으려 애썼다.
주먹을 부르르 쥐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며 참고 또 참았다.
내 양 옆의 녀석들은 이제 거의 통곡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왜 울고 지랄들이야!’
나에게 울음을 전염시키려는 옆의 녀석들에게 화가 났다.
“어떤 새끼가 울어!”
“울지 말고 고개 들어! 니들은 이제 군인이야, 군인! 울지마!”
“새끼들아! 노래 큰 소리로 안 불러!”
조교들의 언성이 높아지고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런 억압 속에서도 그 많은 수의 반절 이상이 울고 있었다.
그래도 노래는 이어져 갔고 부모님들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래 남은 사람들도 울고,
위에 떠나는 사람들도 울고 있었다.
2층 관람석 맨 윗부분에 있던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는 맨 마지막에서야 나가셨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있다 보니, 한 군복 입은 사내의 ‘이제는 나가셔야 한다’는 독촉 어린 손짓도 있었다.
서로 시선을 맞추고 있던 내내 울음을 참으려 애쓰던 나는 나가려는 부모님에게 걱정 말고 잘 가시라는 눈빛과 미소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과 떨어지지 않는 시선으로 부모님이 나가시려는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출입문 앞에서 쓰러지셨다.
바닥에 거의 그대로 떨어질 뻔 한 어머니를 아버지가 붙잡으셨고 일으켜 세우시려 했으나 어머니는 다시 또 쓰러지셨다.
“어... 어...... 엄마!!!”
내 목소리를 들으셨을까?
두 팔은 아버지가, 양 다리는 작은 아버지에게 들린 체, 거의 짐짝처럼 실려 나가시던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셨다.
그 눈빛......
내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그 눈빛......
어머니의 얼굴은 너무 일찍 핀 백목련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고, 일순(一瞬) 입술의 핏기는 모조리 빠져나가 급히 져버린 흰 진달래 같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 눈빛만큼은 흰 광목천에 떨어진 먹물처럼 짙디짙었다.
온갖 걱정과 염려와 앞으로의 안부를 담은 그 눈빛......
그 간절함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부모님과 나는 헤어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와중에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찮으신 건지......’
안부 전화 한 통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게 군대였다.
그래서 군대였다.
2년 2개월... 만 26개월 동안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지탱해 준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음이 극악(極惡)으로 치달을 때마다 ‘그래 그런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다.’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었다.
이 땅에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이고, 모두 다 힘든 군 생활을 견뎠고 지금도 견디고 있기에 내가 겪었던 힘들었던 일들은 적지 않고자 한다.
다만 그런 힘듦 속에서도 내가 무사히 만기제대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덕분이었다는 것은 말해드리고 싶다.
199X년 3월 30일.
약 20년 전 오늘......
내가 군에 입대하던 날이다.
* 사진 : 구글 이미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