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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터파머 DataFarmer Mar 24. 2024

참된 평안

#2024. 03.24 #worship #wooridle

요약


자기가 상황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참된 평안과 상관없다고 한다. 헛된 평안을 구하는 것도 평안과 상관없다고 한다. 열왕기하 말씀에 등장하는 예후는 불안한 상황에서 그것을 덮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참 평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불안을 초래한다. 요람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족신화에 사로잡히는 악을 끊지 못해, 결국 예후의 반역에도 분별하지 못하고 참된 평안도 찾지 못한다.


제목 :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말씀 : 왕하 9:11~22 (김양재 목사님)


가장 평화로운 나라는 2023년 기준 아이슬란드이고 한국은 43위, 북한은 149위라고 합니다. 평안, 평강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샬롬입니다. 평안을 좋아하는데 살면서 평안이 없으니 엉뚱한 것을 쫓게 됩니다. 평안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평안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 평안이 나와 상관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봅니다. 


1. 자기가 상황을 만들려고 합니다. (평안과 상관없는 것)

어두운 남유다, 북이스라엘 상황 속에 하나님의 대안은 예후였습니다. 엘리사는 하사엘과 예후를 주목했습니다. 때를 보며 기다린 것입니다. 지금은 예후가 이미 반역의 기틀을 갖추고 있었고 엘리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예후를 세우셨습니다. 잔인함의 개혁으로 쓰임 받았지만 믿음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를 보고 그 미친 자가 무엇을 했느냐고 말합니다. 장수들이 그 미친 자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는다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고 왕이 된 때는 요람이 이스르엘로 돌아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력부대는 길르앗 라못에 있고, 요람은 이스르엘로 피해있었습니다. 혼란의 시기에 야당적 기질이 강한 그들이기 때문에 엘리사의 제자를 미친 자라 하면서도 이 모반을 위해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제자라고 하니, 이 혁명을 엘리사에게 돌리기에 딱 맞다고 생각하여 이 모반이 나에게 유익이 되니 당장 따라가는 배반과 기회중의를 하고 인간의 악한 군중심리 입니다. 예수 믿는 자 입장에서는 미친 자라는 소리도 들어봐야 하고, 이용당하고 미움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군중 심리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따라만 움직입니다. 이 군중은 "예후는 왕이다"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예후는 대담하지만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자기의로 모반을 일으켰기에 예후 왕조가 4대는 가지만 믿음의 왕조로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왕이 되려면 신경 쓸 일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해야 하고, 그 결과가 고민대로 나올지 확실치도 않습니다. 예후가 처한 이 상황은 예후가 만든 게 아닙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이 세상에 우연히 없습니다. 하나님이 상황을 만들어 예후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후는 자기 스스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굽은 길은 스스로 만드나니 (나에게 유리한 상황) 이 사람은 평안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쁘니 내가 복수하겠어 하는 마음은 아합의 집 길이고, 가장 미련한 길입니다. 내 감정, 내 생각대로 원하는 감정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키우려고 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기에, 하나님을 목적으로 두어야 평안과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 뜻을 언제 이루어 주시나, 내가 목장에서 밥을 몇 끼나 준비했는데, 나는 왕이 되고 싶은데 언제 열어주시는 거냐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잘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와도 인생의 목적이 아이들 학교 승진, 돈 버는 것, 건강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면 안됩니다. 나에게 주신 지금 환경의 자리가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 평범한 상황을 잘 살면 하나님이 평안을 만들어 주십니다. 하루하루 평범하게 잘 사는 것이 평안입니다. 

(적용 질문) 요즘 평안합니까, 불안합니까? 내 힘으로 만들고자 하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2. 헛된 평안은 구하는 것입니다. (평안과 상관없는 것)

뜻밖의 상황에서 왕으로 된 예후는 환경에 장사 없다고 바로 나는 왕이고, 너희는 신하라는 태도로 명령을 합니다. 자기 명령으로, 자기가 원한은 상황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장 불안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길르앗 라못에서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갑니다. 파수꾼이 예후의 병거를 보고 미치게 몬다고 하였습니다. 나라를 뒤집어 엎어야 하는 이때 예후는 더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너무 명분이 있는 것 같지만 들킬까 봐 불안한 것입니다. 

무언가 명분이 있는 것 같아도, 불안을 없애려는 모든 노력과 수고는 결국 더 깊은 불안이 됩니다. 문제를 문제로 덮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불안을 덮으려고 하니 더 불안한 것입니다. 전부 인격이라는 가면을 쓰고 밖에서는 평안해, 아름다워라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가면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헛된 평안을 구하면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예후가 병거 타고 달려오던 그 시간 이르스엘 상황은 요람 왕이 거기 누워있습니다. 주력부대는 전장에 나갔는데 자기 혼자 누워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불안이 너무 많아도 문제지만 요람처럼 이렇게 너무 없어도 문제입니다. 순간순간 자기 원하는 대로 일을 저지르고, 분별을 못합니다. 

성경은 아하시아의 상황도 알려줍니다. 삼촌을 보러 요람을 보러 왔다고 합니다. 아하시아의 인생 마지막 종착지가 요람이 있는 이스르엘입니다. 가족 신화에 젖어있다가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둘 다 모두 고난이 없어서 이렇게 됩니다. 가족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파수꾼이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몇 번 사람을 보내어 맞이하며 계속 평안을 묻게 합니다. 지금 쿠테타가 일어나고 있는 평안이 몇 번이 나옵니다. 심히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평안이냐고 물을 사람에게 물어야지, 자기를 죽일 사람에게 평안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평안을 물어야 하나요? 우상숭배의 중심에 있는 요람은 이렇게 평안을 엄청 찾습니다. 

우리도 부모님에게 '별 일 없죠?' 라고만 묻고 있습니다. 

다급해지니 앉으나 서나 평안을 찾고, 나에게 위로를 줄 사람만 평안을 찾아다닙니다. 내가 깨끗하고 회개해야 평안을 찾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후는 파수꾼에게 평안이 너와 상관있냐고 돼묻습니다. 예후의 연락병들은 왕의 질문인 평안한지 물었지만, 예후는 길르앗 라못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왕권이 바뀌는 이곳이 전장이다라고 하면서 죽기 실으면 자기 뒤에 서라고 합니다. 연락병은 예후의 부대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멀리서 살펴본 파수꾼이 이 상황을 살펴보다 보고하고, 요람은 다시 또 연락병을 보냅니다. 요람은 길르앗 라못 이 전쟁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했지만, 아무 노력도 안 하고 누워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는데, 고난 없이 영광만 누리고 싶어 합니다. 문제없는 헛된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육이 무너지는 것만큼 영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민음의 분량이 안되니 한 마디에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 없으니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한 대가를 얼마든지 치러야 한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는 것이 주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십자가 없이 얻고 싶은 헛된 영광은 무엇입니까? 없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가지게 되니 불안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주님과 함께 기꺼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3. 악을 끊지 못합니다. (평안과 상관 없음)

파수꾼이 상황을 요람왕에게 보고하니, 지금 오는 사람이 예후라고 보고합니다. 이 보고를 듣자마다 요람이 병거를 타고 나서고, 같이 있던 아하시아도 함께 합니다. 가족신화로 뭉친 이 둘이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같이 갑니다. 이 세상에 악하고 음란한 인간들이 모였는데 무엇이 화목합니까? 

왜 요람은 직접 병거를 타고 예후에게 갔을까요? 요람은 백성들에게 밟혀 죽은 그 장관을 기억했는데, 예후는 할아버지 때부터 가신인 장관 예후라, 그를 철석같이 믿습니다. 연락병 2명이 안 돌아왔는데 의심을 해봐야 하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요람은 그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 믿고 의지하는 것과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으로 살마을 믿기 때문에, 사람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100% 죄인입니다. 자기를 죽일 사람인 예후인데, 얼마나 예후가 좋았으면 아픈 상황에서도 예후에게 병거를 타고 갑니다. '그럴 리가 없어' 하는데, 100% 그럴 리가 있습니다!! 예후는 요람을 죽이러 왔는데 요람은 그저 반갑습니다.

둘이 만난 그 장소가 바로 나봇의 포도원 토지입니다. 하나님이 사소한 나봇의 토지 하나를 보았다고 바로 그곳에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병거의 시간까지 계산해서 바로 나봇의 토지에서 정확하게 만나게 됩니다. 

요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예후에게 평안하냐 묻습니다. 예후는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은데 어찌 평안하냐 대답합니다. 요람은 평안이 너무 같고 싶어서,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갖고 싶어서 또 묻습니다. 

예후는 직선적이고 잔인한 사람이고, 병거도 미친 듯이 몹니다. 예후는 더 이상 요람의 부하가 아닌 적입니다. 요람이 가족신화에 사로잡혀 지극히 높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이름을 반역자 예후의 입을 통해, 반역을 통해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를 세우는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열심입니다. 악한 일은 악한 자를 통해 하십니다. 평화의 사도 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런데 이게 밝혀져서 감옥에 옮겨지게 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각자의 사명에 맞게 기름 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역할, 악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한 역할입니다. 항상 악한 자는 악한 자가 치는 것이 맞고, 어떤 경우도 내가 복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돈이 평안으로 보이고 이것만 있으면 평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이세벨의 움행, 술수, 욕심입니다.

끊을 수 없는 악을 가장 쉽게 끊는 방법은 반대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는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참 평안은 주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딱 붙어 있는 것이 봉사입니다. 

(적용 질문) 절대 믿었다가 배반당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것만 있으면 평안할 텐데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끊지 못한 악은 무엇인가요? 교회에서 어떤 봉사로 섬기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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