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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터파머 DataFarmer Apr 08. 2024

갚아주심을 믿는 삶

#2024. 04.07 #worship ##wooridle

부모의 중심과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우리의 인생이 하루하루 살기에 길어 보이지만, 나중에 나의 삶이 한 줄로 남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남겨지고, 그리고 물려줄 유산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여호사밧의 신앙으로 악한 아하시야가 다윗의 묘실에 장사된 바와 같이, 나의 신앙이 아이들에게 물려지길 바라게 된다. 나의 아이들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통치하시고, 갚아주시는 그 분의 삶에 이끌리어 살기를 바란다.


요약


요람은 마지막까지 신뢰했던 예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반역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나봇의 밭에 버려짐으로 말씀대로 공의 심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요람과 같은 악한 길을 걷다가 요람과 같이 죽게 되지만, 여호와를 전심으로 구한 여호사밧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다윗의 묘실에 장사된다.



제목 : 내게 갚으리라

말씀 : 왕하 9:23~29 (김양재 목사님)


 강아지가 겁이 많을수록 많이 짓고,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이고, 북이스라엘 요람왕이 평안하냐 하는 게 더 평안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요람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엘리야, 엘리사는 요람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으나, 요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공의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합의 집 길로 가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1. 손이 아닌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온 군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부하 예후가 온다니 요람이 맞이하러 갑니다. 십자가는 착함이 아닌 분별인데 요람은 마지막까지 예후를 믿습니다. 사람이 망할 때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믿었던 사람이 죽이겠다고 돌진하고 있고, 요람은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분별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요람의 손은 도망가려고 말을 돌이키고, 예후는 요람을 쏘려는 활을 손으로 쏩니다. 두 손이 있었지만 예후의 손으로 쏜 화살이 예후의 염통을 관통했습니다. 예후가 잘 쏜 게 아니라 모든 게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연이 없습니다. 염통과 마음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요람의 존재의 중심과 마음을 뚫고 나왔습니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던 요람의 마음을 공의로운 심판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진 요람의 마음은 그의 손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주님의 심판의 손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요람 왕의 '마음'이란 단어를 동물에게나 사용하는 '염통'이라고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다 도망가려고 합니다. 대비하던 문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문제라 다 도망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심리적인 전략으로 문제를 피하려고 합니다. 요람이 손을 돌이켜 도망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람은 여러 손을 생각했지만, 여호와의 손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엘리사,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전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면 저절로 마음이 돌이켜 회개하게 될 텐데 그렇지 않으니 심판이 오고 더 이상의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온갖 방어기제로 회피하며, 평안을 외치지만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습니다. 내 불안으로 일을 하니 비판과 판단을 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중심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중심을,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 마음을 돌이키라고 주셨을 때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적용질문) 갑자기 당한 반역의 사건이 있습니까? 문제를 가리려고 손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2. 말씀대로 갚으십니다.

요람의 죽음으로 개혁이 되었고, 예후만 왕이 되었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백성의 수준대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후가 내린 첫 번째 명령을 빗갈에게 내리는데, 요람의 시체를 나봇에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봇과 그 아들들의 피를 나봇에 밭에서 갚으리라 말씀하셨기에, 예후는 요람의 시체를 이 밭에 던지라 하였습니다. 아합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지만 사마리에 무덤에는 묻혔지만, 요람은 그 시체가 아예 들판에 버려졌고 이 모든 일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말씀대로 응하지 않은 삶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후의 행위로만 보면 요람왕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악하고, 서로 나쁘다 좋다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람은 왕으로서 엘리야와 엘리사 소식을 잘 알 수 있었으나, 원하면 그들을 불러 말씀을 들을 수 있었지만 부르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며 평안만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합은 마지막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를 했어서 하나님은 심판을 미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회개하면 심판의 결정을 유보하십니다. 아합은 부끄러운 회개라도 하였지만, 요람은 이세벨 손에서 낳고 자라서 회개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불신결혼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불신결혼의 정 반대편에 서있는 것은 이혼, 낙태, 자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생명에 대해 인간이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 인권이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중수하면서 백성의 삶에서 그렇게 중수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신결혼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나를 기억하소서 기도합니다. 욥도 내가 가는 길은 주가 아신다고 합니다. 가정 중수하려고 애쓰고 적용하려는 것을 아십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산 요람에게는 심판의 말씀대로 갚으셨습니다. 세상의 비난을 다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갚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야 합니다. 망하는 때는 말씀이 안 들리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요람이 그런 상황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릅니다. 권세가 있으니 주변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날에 악한 자를 붙이십니다. 지도자들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적용질문) 내 인생에 주님이 말씀대로 갚으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내 인생의 결론임이 인정됩니까? 나는 지금 말씀 편에 서있습니까? 


3. 남김없이 갚으십니다.

아하시야는 삼촌 요람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조카입니다. 하지만 착한 게 악한 것이라고 아하시야는 가족 신화와 우상에 사로잡혀 가족만 외치다가 가족 따라서 죽게 됩니다. 이세벨과 아달랴가 아하시야의 인생을 망쳐놓았습니다. 디모데는 루이스, 유니게로 믿음의 제자가 된 것과 반대됩니다. 아하시야가 도망하여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합니다. 도망을 가도 정원의 길로 갑니다. 저 푸른 초원의 정원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가정 자체가 구원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면 안 됩니다. 가정 자체가 천국이 되면 그것조차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고난이 주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는 가장 거룩한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입니다. 세상적인 정원 같은 가정이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목장에서 말씀으로 양육해 주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람이 죽었는데 예후는 아하시야에게까지 쫓아갑니다. 아하시야 역시 악으로 요람과 결탁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때문이라고 핑계대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아하시는야 겨우 므깃도까지 도망하였지만 잡혀 죽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삼촌 나라였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는 것입니다. 누고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집의 악을 모두 심판하시고 갚으셨습니다. 아하시는야 그 집에 태어나서 자란것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아합의 집 길로간 결론입니다. 자신이 어떤 길로 가는것을 선택하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힘써 이루어가는 것이 구속사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해가는 것이며 공로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이지만, 또 우리도 힘써 이루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구속사는 하나님이 100% 써가시지만 우리도 100% 이루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내 안에서 100% 역사하심을 믿고 내 100%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내 동역자라고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아시고 갚으시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로 썩지 않은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십니다. 요람과 아하시야의 죽음은 말씀대로 갚은 것입니다.

들판에 버려진 요람과 달리 아하시야는 묘실에 장사가 되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아하시야인데 왜 묘실에 장사되었을까요? 그에게 무슨 공로가 있었을까요? 역대하22장 9절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한 여호사밧의 아들이라..."아하시야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말씀에서 바로 여호사밧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할아버지 덕분에 그 손자가 묘실에 들어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반역하고 나와서 한 왕도 선한 왕이 없고 구원받지 못했지만, 유다 왕은 이렇게 형편 없는데도 다윗의 묘실에 묻힌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손이 하는일과 심장이 하는 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위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구원때문에 해야합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게 최고의 복입니다. 믿동짤린 나무로 태어난 우리도 예수님이 계시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단 하루, 단 한시간이라도 쓰임받고 갈 수 있습니다.

(적용질문)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임이 인정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어떨수 없어서 회개하며 지고가야 할 나의 연약함, 아픔, 악함은 무엇인가요?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내가 힘써야 할 역할과 사명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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